들린다. 그녀의 숨소리가.지극히 여리고 가늘게, 그러나 끊이지 않으면서, 조금씩 불규칙하게 거칠어지다가 또 잦아들면서, 그녀의 살 푸는 소리는 소리의 잔 실줄기를 만들며 이 고요함 속ㅇ 사르르 사르르 흘러내린다. 못박힌 그녀의 시선도 이제 그윽히 흐려질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무엇을 응시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이미 그녀의 눈과 귀를 넘어섰다. 저 너머에서, 그녀의 숨소리가 들린다. . 저 너머에서, 그녀가 누구에겐가 안타깝게 속삭인다. 절 잊지 않았었죠? 그죠?....언제 다시 돌아올 거에요. 네?.... 저 너머에서는, 그녀가 저를 잊고 부드럽게 애무받고 싶어한다. 그 `저 너머`에서, 그녀의 손이 누군가이 애무를 끌어들이며 뜨겁게 움직인다.
그녀가 슬며시 손이 누군가의 애무를 끌어들이며 뜨겁게 움직인다. 그녀가 슬며시 치마를 움켜올린다. 달아오른 어둠처럼, 그녀의 휘발성의 살내음이 풍겨난다. 쾨쾨칙칙한 집내음과 어울리지 못하는 그 냄새가 이물스업게 침침한 공간을 휘돈다. 허벅지를 드러낸 그녀의 손이 테이블 위로 뻗쳐간다.
--- p.21-22
그녀에게서 어머니를 느끼는 나를 억누르며,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뻔한 거짓을 꾸미며, 책을 펴놓았던 밥상 밑으로 손을 뻗쳐 주머니칼을 칼집에 꽂는다. 나는 그녀를 '그녀'라 부르지만, 그녀가 저 병든 고요함을 두 손에 파묻는 눈물에서만은 어머니를 느낀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어머니를 느껴서는 안 된다. 나는 칼집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다문다. 나는 주머니칼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아까부터 노리던 기회를 여기서 찾는다. 아까부너 나는 저 유리창의 벌을 잡아 그 날게를 뜯어낼 결심이었따.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바저 열어제치고, 신발 위로 풀썩 뒤어내린다. 신발을 바로 신으며, 나는 개보지 같은 주인 년을 쏘아본다. 아니, 저 새끼가 왜 사람 잡아먹을 눈을 부라리구 지랄이야... 그 소리가 지금은 주인년의 목 안에 깊이 잠겨 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두 여자의 침묵을 가로질러 문 쪽으로 걸어간다. 바깥으로 나서, 나는 바깥 우리문 앞에 돌아선다. 두 여자의 어두운 침묵으로부터 시선을 당겨, 나는 유리창을 떠돌고 있는 벌을 찾는다. 어찌 된 일인지, 벌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유리문 전체를 잔인스럽게 찬찬히 훑어내린다. 벌을 없다. 벌이 보이지 않는다. 벌이 빠져나갈 출구도 없다. 그렇다면, 벌은 애당초 없었단 말인가? 그 생각이, 갑자기 내 몸 속에 싸늘한 헛기운을 감돌아내리게 한다. 잠깐 멈칫하던 나는 대상 없는 적개심에 유리문을 밀어닫는다. 이유 없이, 나는 문밖에 감아올려셔 있던 휘장을 펴내린다 붉은 광목에 큼직하게 씌어진 <왕대포/돼지갈비/동태찌개/빈대떡>의 흰 글자들이 유리문 안을 가린다.
--- p.24-25
갈대들이 휘적휘적 바람결에 휩쓸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높이까지 높이 떠올라 있는 저 섬으로 당장이라도 건너뛰고 싶다는 맹목적인 충동을, 그녀가 달래듯 멈춰 세웠다. "그리로는 저 섬에 못 가. 길은 따로 있다구."창가로 다가가 바라보니, 섬과 방 사이의 검은 심연은 넓고도 깊었다. 뜬 감정을 빨아들이는 저 밑바닥으로부터 무거운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저 섬엔 이름이 없다 그랬었지?..... 나도 이름이 없고 싶었는데, 이름이 없고 싶어서 너를 만났던 건데,근데 넌, 거꾸로 이름을 붙여놓고 그 이름의 탈을 만들고....왜 이렇게 된 거지?"사이. " 왜 이렇게 됐지가 아니라,어쩌면 이거야말로 진정으로 이름을 지우는 길일지도 몰라. 지금은 너한테 처용이라는 이름이 될 테니까. 머지않아 넌 탈을 벗게 될거고, 그러면 이름도 내던질 수 있을 거야." 사이."그럴 거라면, 애당초 이름 없이는 안 되나?"사이. "글쎄. 이름이란 게 저리로 건너가선 필요없다 하더라도 여기선 필요한 거 아닐까? 뭐랄까. 저기로 가는 길을 찾는 이정표 같은 거랄까...." 거기서부터, 조금씩 그녀가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멀어져가는 극진한 음성이 그런데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보탰다.
---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