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풍광의 백미는 석포의 아침을 가득 채운 동녘 노을 속의 독도다. 울릉도에서 군 복무를 하던 어느 부사관이 찍은 빨간 아침노을 속에 흑점으로 드러난 독도. 스땅달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혹할 정도로 ‘적과 흑’의 조화가 저토록 두드러진 장면은 눈을 씻고도 보기 힘들다.
두번째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천부동에서 바라본 추산錐山을 들겠다. 송곳바위. 세상을 돌아다니다 본 바위들 중에서 추산만 한 바위도 드물다.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도의 예수 상과 마주하고 있는 사탕바위Pao de Acucar보다도, 남태평양 외딴섬 티코피아의 퐁테코로Fong tekoro보다도 울릉도의 추산은 하늘을 찌르는 송곳의 모습으로 으뜸이다.
--- p.20~21
근대에 들어 울릉도는 러일전쟁에 나선 일본 해군의 요새 역할을 했다. 이때 러시아의 주력 함대가 울릉도 근해에서 침몰한 바 있다. 독도박물관에는 러시아 주력 해군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세기 말부터 울릉도의 나무들을 베어냈다. 교토역 근처의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건물의 일부 기둥의 자재가 울릉도에서 베어낸 느티나무이다. 오키노시마 민가에도 울릉도의 목재로 지은 가옥이 있고, 또 인근에는 울릉도에서 파 간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 p.29
울릉도에 관한 기존의 인류학적인 문헌들을 보면서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이 역시 토리이 류조의 글이다. 그것이 울릉도에 관한 최초의 인류학적인 보고문이라는 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발표되는 배경의 제국주의적 바탕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이 간다.
--- p.54
일제시대 울릉도에 거주했던 조선인 가운데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으며, 대체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당시 울릉도의 어업은 거의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이 오징어잡이를 위해 입도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도동의 주거지역은 지금은 복개된 도동천변을 따라 형성되었는데, 상류의 계단식으로 형성된 전작지 부근의 조선인 거주지역과 하류의 도동항 근처의 일본인 거주지가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직업 분포와 연관되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섬을 떠나면서 그 빈자리를 한국인들이 채우게 되었다.
--- p.65
오징어를 말릴 때에는 포구에 있는 덕장에서 바람과 햇볕으로 건조시키지만, 날씨가 좋지 않을 때에는 공장에서 ‘불 건조’를 하기도 한다. ‘불 건조’는 인위적으로 더운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공장이 없었던 시절에는 비가 올 경우 덕장에 널어 놓은 오징어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비가 오면 ‘이깟대’가 상할까 봐 오징어를 바다에 버렸다. 오징어는 어차피 쓸모없어지기 때문에 ‘이깟대’라도 건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공장에서 ‘불 건조’ 할 수 있어서 ‘이깟대’를 버리지 않는다.
--- p.67
특기할 만한 바위 이름으로는 ‘보찰바위’가 있다. ‘보찰’은 거북손이라는 표준어의 전라도 지역 방언인데, 경상북도에 속해 있는 독도의 지명에 전라도 방언이 사용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울릉도민들도 ‘거북손’보다 ‘보찰’이라는 말을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는 개척령 이전부터 전라도와의 왕래가 많았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나선羅船’이라는 전라도 출신의 배가 천부를 중심으로 많이 오고 갔다. 이들은 배 한 척에 타고 건너와 여름 동안 배를 건조하고 미역을 따고 고기를 잡아서, 각자가 울릉도에서 건조한 배 한 척씩을 몰고 돌아갔다. 1882년 울릉도 검찰사로 파견된 이규원李奎遠은 울릉도에 조선인이 140명이었다고 보고했는데, 이 중 115명이 전라도 출신이었다.
--- p.77
그 결과 토속지명의 범주에 속하는 울릉도의 지명들 중 상당수가 전라남도 흥양 지방(여수, 고흥반도 인근, 거문도를 비롯한 도서 지역) 방언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울릉도의 토속지명이 흥양 방언과 일치하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체계적인 말꾸러미로 확인되고 있으며, 이것이 울릉도 토속지명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p.82
칙령에서 명시한 석도가 지금의 독도獨島임을 증명하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전라도 방언을 연구해야 한다. 울릉도를 내왕했던 전라도 흥양의 어부들이 불렀던 ‘독섬’(돌섬의 전라도 방언)을 대한제국의 공문은 한자로 ‘석도’(돌 ‘석’+섬 ‘도’)라고 적었고, 이를 승계하지 않은 명칭이 지금의 ‘독도’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공문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울릉도 주민의 방언을 존중하였다는 얘기다. ‘독도’는 발음을 중심으로 지은 이름이고, ‘석도’는 의미 중심으로 지은 이름이다. 전라도 흥양 어부들의 일상이 잊히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오키노시마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죽도’가 생생히 살아 있다는 사실과 대조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흥양 어부들의 기억은 소상하게 복원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인류학자들이 해야 할 작업이다.
--- p.91~93
울릉도의 토속지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내륙 지명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해안 지명들이다. 후자는 거문도를 포함하는 흥양, 즉 전라남도 해안 지방의 지명 또는 용어가 바탕이 된 토속지명들이다. 예를 들면, 여러 곳의 해안가에서 보이는 -‘ 구미’(항구로 이용할 수 있는 좁고 깊숙하게 들어간 만), -‘ 작지’(자갈돌들이 널려 있는 해변), ‘가제’ 또는 가지(바다사자), ‘보찰’(거북손), ‘와달’(작은 돌들이 널려 있는 긴 해안), ‘걸’(물고기나 수초가 모여 있는 넓적한 바닷속 바위), ‘독섬’ 등이다. 이 일곱 가지는 모두 고유어로, 한자의 영향을 받은 한글과는 무관한 점이 특징이다.
--- p.209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잡히는 오징어를 다 수입해 가던 시절도 있었다. 독도 근해의 오징어가 가장 좋은 오징어다. 일본인들은 명태는 알만 빼서 가져갔고, 나머지는 조선인들에게 팔기 위해서 제수용 북어를 만들기도 했다. 오징어의 종류는 갑오징어, 한치, 먹통(먹물 많이 쏘는 종류. 통통한 모양새로 몸 가운데 뼈가 들어 있음), 낙지(엄청나게 큰 오징어다. 보통 낙지라고 하는 것은 문어류임) 등이다. 쭈꾸미는 문어과의 일종으로 오징어가 아니라고 했다.
--- p.252~254
우데기는 바람과 눈을 막기 위해 집의 투방벽에서 130~150센티미터의 공간을 두고 바깥쪽에 둘러치는 일종의 외벽이다. 벽체 바깥쪽에 기둥을 세운 후 억새나 옥수수대를 엮어 둘러치며 말아 올릴 수 있는 문을 달아 집 안의 온도를 조절하며, 방풍효과를 더한다. 눈이 많이 쌓였을 때 외부로 나가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도록 우데기 내부에는 부엌과 장독 등이 있다. 벽체와 우데기 사이의 공간을 축담이라고 하는데 눈이 많이 쌓인 겨울에도 축담을 통해 우데기 안에 있는 부엌과 장독으로 이동할 수 있다. 축담 내부 공간에 있는, 방과 방 사이를 연결하는 봉당은 남부 지방 가옥의 툇마루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울릉도에서 봉당은 신발을 신지 않고 집 안에서 이동할 수 있는 통로이자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며 더위를 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 p.308~310
울릉도와 오키노시마의 사진들에는 공히 영토주권에 관한 주장이 담겨 있다. 주권을 둘러싼 충돌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인데, 현수막이나 간판으로는 이 목소리들이 일상과 어떻게 접합되어 있는지를 알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일상의 문화주권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영토주권을 천명해야 하는 국가권력이 직접 충돌하지 않는 가운데 대리인들의 언설이 충돌하고 있는 현장이다. 호적(또는 본적지)으로만 본다면 독도에서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인 1,919명이 등재되어 있고(2006년 기준), 일본인 69명이 등재되어 있다(2005년 기준).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상의 어느 곳에도 이런 해괴한 일은 없다. 이러한 언설들이 양 지역의 문화주권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려면 다른 방향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 p.367~368
반면 오키노시마의 어부들은 자신들의 생계가 걸린 어장으로 독도 해역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근대국가의 국경이 명확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제국주의적 야욕과 결부되는 사례를 독도에서 볼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준동하던 시점에, 오키노시마의 어민이 이른바 어업권을 획득하기 위해 일본의 독도 영유를 부추기는 과정이 드러난다. 국가 권력과 일상의 생계 활동이 야합하여 약소국의 영토를 탈취하는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에 기여하는 사람은 ‘어업권’이라는 이권을 손에 넣는다.
--- p.374
일본 제국주의는 오랫동안 독도 해역의 어로를 기반으로 살아왔던 여러 지방의 문화주권을 유린하였다. 또 1904년 2월 23일 공포된 한일의정서 제4조에 근거하여 1904년 7월 21일 독도에 전쟁용 망루를 설치하기도 했다. 1903년 8월부터 러시아의 차르 정부와 협상에 들어간 일본은 1904년 2월 4일부로 협상 중지를 선언했다. 사실은 그해 2월초에 마산포와 원산 등에 일본군을 상륙시키는 등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 모든 작업이 러일전쟁(1904년 2월 8일~1905년 9월 5일)이 벌어지던 때 진행되었음을 생각하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국제정치적 배경에 전쟁 수행의 목적이 있었음을 지적해야 한다.
--- p.377
독도에는 약간의 식물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대나무는 찾아볼 수가 없다. 대나무의 일종인 시누대가 울릉도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오키노시마 어민들의 머릿속에 리앙쿠르암이라고 각인되었던 섬의 이름이 ‘죽도’로 변경된 시점은 러일전쟁이 종결된 이후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문서에 드러난 명칭인 ‘죽도竹島’는 울릉도를 가리키고 독도에는 ‘송도松島’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죽도’가 독도를 가리키게 된 것은 그 후의 정책에 의한 결과이다.
--- p.397~398
울릉도의 삶은 피곤하다. 주민들의 살림살이는 식민지 침탈에 의해서 기반이 무너진 채 표류하고 있다. 어업에서 농업으로, 다시 관광업으로 휘둘리고 있는 주민들의 살림살이는 정착 기반을 상실한 듯하다. 땅과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살림살이가 식민 착취로부터 시작된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면서 허덕이는 모습이다. 주민들 스스로의 삶의 방식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난 100년 동안 외부의 힘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어온 것이다.
--- p.411
독도에서 자취를 감춘 가지는 우리에게 또 다른 과제를 남기고 있다. 독도의 주인은 누구인가? 가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순차적으로 두 무리의 손님들이 등장하여, 주인인 가지를 다 죽이고 잡아간 뒤, 서로 자신들이 독도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각한 적반하장에 더불어서 이만저만한 언어도단이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절대적 가치를 앞세우면, 결국에는 이런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참으로 몰염치한 인간들이다. 염치는 사람 사이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나무, 사람과 흙, 사람과 물고기 사이에서도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주인이 사라진 자리에서 서로 자기가 주인이라고 말싸움을 하면서 으르렁거리는 자들이 있다. 몰염치가 지나치면 범죄가 될 수 있다.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할 손님들은 사라진 주인이 다시 등장하기를 학수고대하면서 반성할 차례이다. 그러지 않으면 마땅한 대가를 치를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독도의 진정한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가지와 보찰이며, 그들의 이웃인 물고기와 해조류, 그리고 새들일 것이다.
--- p.417~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