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의료의 특징 중 하나는 식민 권력에 의해 일방적 재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식민 의료의 경쟁자로 선교 의료가 있었다. 선행 연구는 한국 근대 의료가 일종의 주도권 경쟁, 즉 헤게모니 경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런 접근은 식민지 시기를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한국의 특수성을 추출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경쟁은 의학 교육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된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은 일제가 선교 의학 교육과 경합, 경쟁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루어 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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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의료는 문화적·사회적 산물로서, 그 속에는 과학적 담론과 더불어 환자의 경험, 사회제도와 문화적 관념이 다층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신체 또한 생리적인 의미 이외에도 사회·문화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의학 지식은 신체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자 동시에 젠더 질서를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과정이며, 또한 권력은 의료를 통해 신체에 대해 통제와 훈육을 실현하기도 한다. 의료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분석하고, 의료-신체-권력의 상관관계를 조명하는 것은 의학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근대적 규율의 형성과 국민국가의 건설과도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의료·신체·젠더 및 그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국민국가 혹은 제국주의)과 근대성의 문제는 중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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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이 되면 의학의 권력이 점차 환자, 혹은 소비자에게로 옮겨 가면서 의료사의 독자가 일반 대중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에 따라 의료사의 서술자도 더욱 다양해졌다. 이전 의료사의 주제들은 교양 수준으로 요구되었을 뿐이고, 오히려 환자의 입장에서 왜 의료 서비스에 불평등이 생기는지, 여성의 건강은 어떻게 지키는지, 더 나아가 웰빙이란 무엇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등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더 관심을 끌었다. 방법론과 시각의 변화는 여타 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의료사는 그 태생부터 학제 간 연구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학문, 즉 일반 역사학·사회학·철학·인류학·문학 등과의 교류는 필연적이었다. 의학과 역사학을 의료사의 ‘부모 학문(parent disciplines)’이라고 부른다든지, 의료사가 ‘두 개의 시민권(dual citizenship)’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표현은 의료사의 하이브리드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또한, 의료는 인류 보편적 주제로서 초국가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에 따라 트랜스내셔널이라든지 글로벌 의학이 추구되었다. 의료사는 이렇듯 복잡한 특성을 지니고 단기간에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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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류학 연구사를 고찰하는 것은 의료를 통해 인간과 사회에 던진 인류학적 질문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몸과 질병에 대한 이해를 사회 속에서 펼치는 방식에 질문을 던진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다. 인간 집단들에 예외 없이 존재하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대처가 자리 잡는 방식과 그 방식들이 유지되고, 변형되고, 회절하는 방식을 고찰하는 것이다. 각각의 정치·경제·사회·역사의 조건 위에서 펼쳐지는, 혹은 변화하고 또는 대체되는 방식을 지켜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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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는 인간 집단의 양상(사회, 문화라고 불리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언어로 소통하고 경제활동을 하고 가족을 이루듯, 인간의 모든 집단은 의료를 통해 돌보고 치유한다. 집단의 양상이기 때문에 의료는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의료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다. 몸에 대한 지식(즉, 지식-권력)으로서, 또한 몸에(주체에) 개입하는 실천으로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집단의 양상 속에서 정치적 힘을 지닌 의료는 사회에 배치되는 과정에서 그 정치성이 배가된다. 분배되고, 혹은 분배되지 않고, 지불 능력을 갖춘 사람과 집단에게만 사용 가능한 돌봄과 치유가 되기도 하면서 정치 체계로 작동한다. 이런 면에서 의료는 과학적이기보다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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