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이 태자비를 살렸어.”
제이슨의 말에 위그가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감히 살리네 마네……. 위그가 입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비비안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입 다물라는 뜻이었다. 위그가 말을 삼켰다. 대신 비비안의 낭랑한 목소리가 다이닝 홀을 울렸다.
“태자 전하께서 태자비 전하께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을 저희는 안답니다.”
“부인, 말을 하기 전에는 생각이라는 걸 하는 게 좋겠군. 지금 내가 이디에트를 두려워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태자 전하께서는 이디에트를 두려워하지는 않으시지만, 태자비 전하를 잃는 건 두려워하시겠죠.”
비비안이 생글거리면서 웃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귀족들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제이슨이 엘리미아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대부분 제이슨이 엘리미아를 지독하게 혐오하고 경계한다고 생각했고,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려 둔 이유는 이디에트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마치 제이슨이 엘리미아를 아쉬워한다는 듯한 뉘앙스라니.
그러나 비비안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가 천진하게 웃었다. 제이슨의 뱀 같은 눈빛이 그녀의 눈에 얽혔다. 공기가 지독한 냉기로 차올랐다. 그러나 비비안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래.”
그녀는, 이곳의 그 어떤 귀족도 이해하지 못하는 짙은 열등감을 어떤 식으로 해소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추측이 맞는다면, 제이슨은 엘리미아를 단순히 혐오하고 증오하지 않는다. 주도권은 절대 제이슨에게 있지 않았다.
“그렇지.”
그리고 그 순간 비비안은 자신의 추측이 진실임을 확인했다.
제이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길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웃었다. 이제 그의 눈에서 그 예리한 칼날은 사라지고 남은 건 예의 건들건들한 미소였다. 그는 천천히 엘리미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엘리미아는 제이슨의 이 갑작스러운 태도에 조금 당황하는 듯하면서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제이슨이 갑자기 엘리미아의 손을 잡았다.
“그래, 맞아. 공작 부인의 말이. 내가 어떻게 감히 우리 태자비에게 험하게 대하겠어.”
“그렇지요?”
비비안은 생긋 웃었다. 그녀는 이제 위그의 손을 놓았다. 곧 제이슨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으며 디텔 공작에게 말했다.
“디텔 공도 그래, 우리 이디에트 공이 소문만 무성하지 언제 진짜로 도를 넘는 행동을 한 적이 있던가? 심지어 부인께서 저리도 아름답고 현명하신데.”
“송구합니다. 전하.”
“그래, 분위기가 이상해졌군. 엘리미아, 잔을 들어. 얼굴 풀고.”
삽시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녹는 듯했다. 귀족들이 분분히 잔을 들었다. 위그 또한 그다지 유쾌한 얼굴은 아니었으나 천천히 잔을 들었다. 그의 시선은 온통 제이슨과 엘리미아에게 가 있었다.
곧 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다이닝 홀은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넘쳐났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그런 상황이었다. 엘버린 공작 부인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비비안은 자신의 앞에 놓인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디에트 공작 부인께서는 여전히 지혜로우시네요.”
“엘버린 공작 부인께서는 항상 제가 처음 들어 보는 칭찬만 하시고요.”
“어머, 그렇지만 저는 항상 이디에트 공작 부인은 참 총명하다고 생각했어요.”
비비안은 엘버린 공작 부인의 말을 그저 흘려들으며 가볍게 미소를 흘렸다. 가끔 곱게 자란 여자들이 그녀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엘버린 공작 부인이 생긋 웃으며 말을 잇자 그녀가 살짝 멈칫했다.
“어쨌든 저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비비안은 묘한 눈길로 엘버린 공작 부인을 보았다. 그녀가 활짝 웃고 있었다. 비비안은 엘버린 공작 부인이 순진하고 착할지언정, 그렇다고 멍청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백작 영애로 한평생 사랑받고, 공작 부인으로 집에서 사랑받는 귀부인이 멍청할 리가. 그러나 비비안은 원래 착한 영악함과 총명을 즐겼기에 그저 엘버린 공작 부인을 향해 웃어 줄 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와인 잔을 들고 몸을 살짝 바로 할 때, 로건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그리고 그 순간, 우연하게 위그의 시선이 로건에게 꽂혔다.
비비안은 나긋하게 웃으며 와인 잔을 들었다. 그때, 위그가 제 잔을 그녀에게 내밀자 비비안이 습관처럼 그에 살짝 부딪치는 시늉을 하며 와인을 마셨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련의 행동에 로건이 고개를 돌렸다.
무척, ‘평화로운’ 만찬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