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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선구자 김교신 선생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선구자 김교신 선생

: 조선 무교회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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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2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74쪽 | 152*225*30mm
ISBN13 9788968498053
ISBN10 8968498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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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김교신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유교적인 가정으로서 한학(漢學)을 중시하였다.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학과를 졸업하였다.
일본에 가자마자 동경 시내에서 노방전도하던 일본동경 동양선교회(OMS) 청년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고 기독교의 깊은 사상을 배운 것은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 선생으로부터였다.
왜 하필이면 일본인 우치무라 간조를 스승으로 모셨을까?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된 조선과 조선인은 한결같이 일본국, 일본인, 일본문화를 배격하는 입장이었는데 김교신은 왜 일본인 스승 밑에서 그리스도교 사상을 배웠을까?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6인 동지 회원모두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선택했을 리가 없다. 김교신을 비롯한 함석헌 등 6명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치무라 문하에 들어간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치무라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제국주의를 강하게 반대하는 지식인이었고 또 권위와 조직과 정통을 자랑하는 기독교를 배격하고 하나님을 신앙하되 원시 기독교처럼 교회가 없는 무교회(Non-Church)를 주장하는 주체성이 매우 강한 기독교인이었다. 아울러 그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던 사람이었다. 대체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김교신과 5명의 동료들은 우치무라 무교회의 교인으로서 일본유학생활을 한 것이다.
김교신은 1919년 초부터 1927년 초까지 일본에 머무는 동안 매우 밀도 있게 외국유학생활을 하였다. 대학에 들어가기 직전 약 2년 동안은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 노방전도대원들(우시코메 야라이정 성결교회 청년들)을 조우하게 되어 그 교회에 출석하여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 교회의 불미스러운 일(목사 축출사건)을 목격하고 실망하여 그 교회출석을 중단하였다. 그래도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까지는 버리지 않고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유지하고 있던 차 당시 그곳(도쿄)에서 유명했던 스승 우치무라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국민 중 한사람이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적국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사무라이 출신으로서 정통 일본인이었지만 그는 일본이 행한 조선의 합병, 식민화에 대해서는 완전히 반대하는 지식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김교신이 잠시 경험했던 기성교회의 거대한 조직 및 부조리에 환멸을 느끼고 항거하는 지성인이었다. 그는 이 견해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기성교회제도를 반대하는 ‘무교회운동’이었다. 기성교회에 대해 별로 아는 바 없었지만 김교신은 이 참신한 운동에 전적으로 매력과 호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외롭고 쓸쓸한 도쿄의 유학생활 속에서 우치무라 선생이 주도하는 무교회운동은 김교신에게 크나큰 광명으로 다가온 것이다. 따라서 조선인 친구들 5명과 함께 무교회클럽에 가담하여 기독교의 심오한 진리를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이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계기를 통해 희망에 벅차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도쿄에서 혼신을 다한 삶을 살았다고 추정된다. 즉 한 마리의 토끼는 동경고등사범학교(대학과정) 유학생활이요 다른 한 마리의 토끼는 우치무라 선생을 통한 참신하고 심오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는 일이었다. 우치무라 선생이 이끄는 ‘성서연구회’라는 모임에서 일반 기독교 지식은 물론 희랍어를 배우면서 신약성서 원전까지 파고들었으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의 기쁨을 만끽했을 것이다.
김교신은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소위 중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획득함과 동시에 무교회운동의 창시자 우치무라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때가 되어 1927년 사랑하는 조국(조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유학생활에서 터득한 세상의 진리(지리ㆍ박물학)와 영적 진리(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운동 기독교)를 듬뿍 안고 매우 희망찬 모습으로 귀국하였을 것이다.
조국에 돌아온 김교신은 혼신을 다해 중등학교 교사로서의 삶과 생기를 잃고 있었던 조선 기독교사회에 새로운 무교회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서울 양정고보에서 12년간의 교직생활, 그 밖에 경기중학교, 함흥영생여고보, 개성 송도고보에서 사정상 각각 단기간 동안 교편생활을 하였었다. 이렇게 본직을 유지하면서 자택에 ‘성서조선사’라는 사무실을 두고 그 유명한 월간신앙지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선교활동에 적극 나서게 된다. 게다가 소외된 이웃(소록도 나병환우들)에게 역시 『성서조선』지를 통해 삶의 희망을 제시하였다. 소록도 선교는 결코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 절망과 고통과 소외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진심어린 희망의 빛을 던져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 각색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는데 특히 불치의 병이나 다름없는 나병환자(속칭 문둥이)들을 사랑하고 치유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를 닮은 삶(Imitation of Christ)을 살아보려고 힘쓰고 애를 쓴 것이다.
김교신은 유교(儒敎)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한학(漢學)을 공부한 탓인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인생관이 몸에 배어있었던 듯하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반드시 계곡에 나아가 몸을 씻고(냉수욕) 새벽기도를 했던 것, 어머님을 잘 모시고 가족들을 잘 보살핀 것, 직장(중등학교)에 나가 국가의 장래를 위해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한 사실(2세 교육에 힘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노심초사한 것(성서조선을 발간하여 애국심과 영적 힘을 앙양한 사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세계평화를 도모하려는 그의 원대한 포부가 그것을 명백히 입증한다.
이러한 그의 원대한 포부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그의 지혜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즉 우리민족을 식민지배하던 원수같은 일본제국이었지만 마냥 억울해하고 분통만 터뜨린 게 아니라 그 역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 자국(일본)의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혐오하던 학식이 풍부하며 덕망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당시의 유력한 일본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스승으로 삼아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사상을 공부하면서 조선인 동지 6인의 써클을 만들어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 큰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기초작업이 『성서조선』 발행과 ‘성서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6인의 동지회’였다. 함석헌, 정상훈, 송두용, 양인성, 류석동, 김교신이 그 모임의 회원이었다. 이들은 『성서조선』이라는 우리말로 된 월간잡지, 매주 일요일에 모이는 성서연구회, 이따금 열었던 종교강연회, 물에 산에(무레사네)라는 등산 그룹 등을 통해 조용한 가운데 일본제국주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다각도로 모색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의 주무자는 김교신이었다. 6인회의 회원 중 2~3명은 일본에서 김교신, 함석헌, 정상훈등은 조선에서 우리 민족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부단히 암중모색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숙지한 필자는 6인의 동지회원 중 조용하고 겸손한 리더십을 발휘한 김교신의 인격과 삶과 애국정신에 감명을 받아 그의 고결한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여 정리해 보고자 하였다. 당시의 시끄러운 세상, 잘난 체 하며 떠들어대는 무리들이 많은 상황에서, 소리없이 묵묵히 흐르는 깊은 강물 같은 조용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애국지사, 참종교인, 순전한 기독교인(나다나엘 같은), 진실하고 겸손했던 한국인 김교신(金敎臣)을 나의 사고력(思考力)과 나의 손으로 소묘해보고 싶어서 상당기간 그를 생각하고 독서하고 자료를 모아 집필에 돌입한 것이다. 김정환 교수(고려대)가 『김교신』이라는 평전을 낸 이유를 “단지 김교신이 훌륭해서”라고 말했듯이 필자(나)역시 동감이다. 이렇게 겸손하고 맑은 인격을 지닌 애국자를 탐구하여 소품이 나오게 되면 그 소품을 통해 독자들이 그분의 인격으로부터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오늘날 가치관이 뒤죽박죽이 된 현대 한국사회에서 푯대 없이 삶을 겨우 지탱해가는 사람들이 김교신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헝클어진 사고방식을 깨끗이 세탁하고 심기일전하여 새롭게 삶을 설계하기 바라는 것이다.
김교신 선생은 매우 부지런한 분으로서 일인(一人) 다역을 하였다. 우선 18명의 대식구를 거느린 가장(家長), 중등학교교사로서의 수업, 『성서조선』 주필로서 원고집필과 발간사무, 그리고 『경성성서연구회』 강사로서 성경강의, 이렇게 그는 1인 다역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과로의 탓인지 그의 눈은 늘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부르터 있을 때가 많았다. 이중에서도 『성서조선』 발간사무는 육체적인 고통과 노력을 많이 요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과 좌절감, 회의심이 늘 따르는 어려운 일이었다. 『성서조선』 발행직전에는 반드시 일본정부 당국의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조판이 된 후에도 몇 번씩 교정을 보아야 하고, 또 책이 완성되면 독자들에게 우송하는 작업을 혼자서 모두 해야 했으며 서울 시내의 독자들에게는 직접 자전거로 배달했었다. 배달받은 독자의 집 문간에서 자전거를 받쳐 놓고 회심의 미소를 띄면서 잠시잠깐 나누었을 대화를 상상해 보면 가슴이 훈훈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는 일이 하도 많아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나님께 항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은 내용을 김교신 스스로 구성해보기도 했다.

A. 하나님께 항변 : 한 사람 몫의 직분을 가진 자가 일주의 6일간을 근무하고서 주말 휴가를 가질 것은 생명 부지상 절대로 필요한 일인 것을 당신도 아시는 바일 뿐이오리까! 여호와 당신께서 제정하신 법칙이 아니오니까. 주간 6일을 지칠대로 지치고서 또 주일을 쉬지 못한지도 대략 10여년, 그동안 우리의 외침을 들은 사람이 몇 사람 있었습니까?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당신은 나의 못난 것을 이용하셔서 장터에 나가 피리 불라 하셨으나 어디 춤추는 인간 하나 있습디까? 일주일 내내 교단에 섰던 자가 일요일에까지 강의하는 것은 피를 뽑아 주는 일이요, 살점을 분배하는 일이 아니오니까?

B. 하나님의 답신 : 입신(入信) 이전에는 허약해서 약병만 차고 다니던 것이 근 20년 내로 큰 병에 누워 본 일이 없고, 짐작컨대 어떤 사회에 가든지 너와 동년배 중에서는 가장 건강한 편이 아닐까?(1939년 10월)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인물 중에서 한용운(1879-1944)과 김교신(1901-1945)은 종교로 민족을 거듭나게 하려고 했던 종교개혁가였다. 한용운이 불교계의 그 기수라면, 김교신은 기독교계의 그 기수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한용운은 널리 알려져 있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김교신의 경우는 일반인에게는 물론이요, 기독교계에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한 분은 ‘민족의 시인’이라는 좋은 인상 때문에 그 불교개혁론도 전적으로 공감, 수용되었는데, 한 분은 처음부터 기독교의 ‘이단자’로 안팎에서 몰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새로운 사조나 종교가 들어오게 되면 유입을 차단하거나 성장을 차단하기 위해 정통과 이단이라는 잣대로 재단하기 일쑤다. 필자는 가끔 우리사회에서 ‘이단론’이 불거질 때 유대교에서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했던 사실, 독일에서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가톨릭이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했던 역사를 상기하곤 한다.
『김교신』평전(한국신학연구소)을 낸 고려대(교육학과) 김정환 교수는 그 저서를 출판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언표했다.

김교신은 나의 종씨도 아니고 내가 직접 배운 은사님도 아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이므로 내가 이렇게 핏대를 세우며 소개하는 것이니 오해말아달라.

필자도 김정환 교수의 생각과 동일하다. 그러나 좀 더 부연한다면 김교신의 어떤 부분은 특별히 구체적으로 좀 더 알고 싶었으며, 때가 꽤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그의 고매한 품성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무교회(Non-church) 교인의 길을 선택했는지, 왜 하필이면 우리 민족을 식민지화 해서 억압했던 나라 일본 제국주의 출신 우치무라 간조를 스승으로 존경하며 따랐는지, 그의 평교사 일생의 표상(表象)은 무엇이었는지, 그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 당시 모두가 혐오하고 멀리 했던 소록도 나환자들에 대한 물심양면의 숭고한 사랑, 그의 따뜻한 민족애와 국토(한반도)사랑, 우리말 사랑 등에 대해 알고 싶었고, 후학들에게 김교신 선생의 탁월한 인격을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교신은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살고 사명을 감당하다가 뜻하지 않던 전염병 발진티푸스에 걸려 1945년 4월 25일 타계하였다. 만 44년의 일생이었다.
아울러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가정, 사회, 국가가 잘 사는 길은 ‘교육’에 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검증된 진리나 다름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또 현대 한국의 교육현실이나 종교계의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감안할 때 김교신 선생님 같은 교육자나 종교인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앞으로 출간될 본서는 크게 참고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0년 초반 인류는 ‘코로나19(COVID19)’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질병을 접했고, 지금도 그 질병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는 이 전염성 높은 질병을 막기 위해 그동안 지속해온 형태의 삶을 삼가고 타인과의 접촉을 줄이면서 치료약 혹은 백신(Vaccine)의 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따라서 비접촉, 비대면(非對面)의 생활 방식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종교의 영역 또한 이러한 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고 특히 교회는 새로운 방식의 예배와 목회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비대면 방식이라는 엄중한 사회적 요구로 인해, 실제적인 모임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예배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의 모니터로 송출되는 화면을 각자의 처소에서 시청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의 신앙생활은 ‘교회’라는 체계 하에서 중앙집권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졌으나, 비대면이 활성화된 현재 상황에서는 개별적 신앙과 비대면 방식의 자율적 예배가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는 진단이 매우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전통적 교리를 중심으로 개인적인 회심(回心)에만 집중된 구원론, 교회와 세상이라는 성속(聖俗) 이원론은 ‘코로나19’의 등장과 함께 흔들리면서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의 기독교, 새로운 형태의 교회 및 예배방식이 요청되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바야흐로 온 세계 또는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는 세계시민을 완전히 흩어놓고 말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단합’을 위해 자주 사용하였던 이 구호는 이제 완전히 힘을 상실하고 그 반대가 되었다. 세계의 문화 및 문명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대형 건물, 대중 집회, 대형 도시(Mega city) 등 여러 부문에 있어서 현대인들은 크고 찬란한 것을 추구하고 선호하는 경향을 보여왔으나 ‘코로나’로 인하여 인간의 욕망이 갑자기 좌초당한 꼴이 된 듯하다. 이에 따라 인간들의 모든 지혜와 자랑이 무색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고 또는 두려워해 왔는데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바이러스)거 세계(지구촌)를 송두리째 짓눌러버린 격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바이러스 앞에 속수무책인 우리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김교신 선생도 하필이면 ‘발진티푸스’라는 바이러스 전염병으로 요절하였었다.
그런데 우리는 질병의 전염 때문에 두려워서 다수가 모일 수 없지만, 일찍이 김교신 선생은 질병이나 어떤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이 이따금 한적한 곳을 찾아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처럼 조용한 곳을 선호했고 예배의 모임도 다수가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소수가 모이는 거의 ‘교회’라고 지칭할 수 없는 ‘무(無)교회’를 선호하여 조선(한국) ‘무교회’의 선구(先驅)가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속성은 모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이라고 한다. 대체로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김교신 선생은 큰 모임이 아니라 작은 모임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소그룹의 동인(同人)들의 모임을 인도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취지의 모임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활에 딱 알맞은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코로나의 문제를 떠나서라도 21세기의 한국교회는 소규모의 알찬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대형교회나 중형교회만 선호되고 소형교회는 무시되는 작금의 한국 기독교의 상황에서 김교신 선생이 추구했던 ‘무교회(無敎會)’ 운동은 깊이 새겨볼 가치가 있으며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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