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사회에서 민족무용이 전승되는 양상과 성격을 고찰하는 것은 그 역사성이 민족무용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재일동포 사회에서 민족무용은 ‘한국무용’과 ‘조선무용’이 경합적인 관계를 이루며 전승되어 왔다. 그것은 한반도의 본국이나 다른 재외동포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적인 현상으로, 이렇게 내부에 경합적인 두 계열을 내포한 것으로서의 민족무용이 바로 재일동포의 민족무용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재일동포 사회의 ‘한국무용’ 또는 ‘조선무용’에 대해 논할 수는 있지만, 그중 어느 한쪽만으로 재일동포 사회의 민족무용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이 책에서 필자는 민족무용이 ‘한국무용’과 ‘조선무용’으로 이원화되어 전개해 온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재일동포 사회의 민족무용의 지형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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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추자와 조택원은 당시의 정치적, 이념적 지형에서 서로 대립적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임추자가 조택원에게 조선무용을 배울 수 있었을까? 임추자에 따르면, 당시에는 사상을 초월해서 배우러 다녔다. 전문적인 것을 하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민족무용은 제대로 가르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남, 북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조직 차원에서 부탁하여 배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개인이 배우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다. 조택원도 임추자가 총련계인 것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서로 모르는 척하고 넘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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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 총련은 중앙예술단과 가무단(1965년까지는 문선대, 문공대) 등 전문예술단체들을 통해 북한의 체제를 찬양하고 정치적 이념을 선명하게 담은 북한의 민족무용을 대중에게 보급하고 있었고, 이를 위한 전승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제4장 참조). 한국의 민족무용은 춤 자체가 정치색을 담고 있지는 않은, 그런 점에서 ‘순수’예술이라 하는 무용이지만, 공연이 이루어지는 장이 정치적인 장이었던 만큼, 정치적인 함의를 갖게 되었다. 민중대회가 동포들이 많이 모이는 장이기 때문에 그런 장에서 공연을 한 것인지, 아니면 동포들을 동원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공연이 이용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비상업적인 공연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장을 활용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공연이 어떤 장에서 이루어졌든 이들의 민족무용 자체는 재일동포들에게 정치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위안과 감동, 즐거움을 선사했다. 일본 각지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공연과 활동은 ‘친선·교류’와 ‘동포 위문’과 한일회담 촉진을 위한 선전활동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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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2세들이 한국무용을 접하고 배우게 되는 계기나 배우는 과정, 한국무용의 경력을 만들어나가고 무용가로서 활동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한국무용가로서 추구하는 방향, 활동 방식 등은 총련계의 조선무용가들과 매우 다르다. 총련계에서 조선무용가가 배출되는 과정은 총련의 조직 체계 속에서 이루어져, 무용가들의 생활사는 개개인이 다를지라도 조선무용가가 되기까지의 경로는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한국무용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개별적이고 다양하다. 무용가가 되기까지의 과정뿐 아니라 공연 등과 같은 전문무용가로서의 활동도 조선무용가들은 총련 조직을 통해 제공 또는 확보되는 데 비해 한국무용가들은 개별적으로 또는 사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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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지가 김숙자의 춤에 대해 “이 선생님의 무속무용에 비하면, 국립무용단의 한국무용은 단지 체조에 불과하다”고 느꼈던 그 감정을 김리혜와 조수옥도 공유했다. 김리혜는 후일 “그 의미를 나중에 한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한국무용이라 해도 옛날부터 전승되어 온 전통무용과 근대에 들어 서양무용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신무용이 있다. 당시 각 대학의 무용과나 국공립 무용단에서 하고 있는 것은 후자였다. 우리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단지 민족악기도 민족무용도 아니다. 거기에 모국을, 민족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서 그녀도 나도 서울로 왔던 것이다”라고 술회했다(金利惠, 2010b: 184). 1981년 서울에서 이양지, 김리혜, 조수옥은 화려한 춤보다 토속성 짙은 전통춤에서 민족적인 것을 느끼고 거기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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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가극단·가무단 단원들이 무용연구소나 무용단을 만들어서, 또는 개인으로서 교습과 공연 활동을 하고, 무용강습을 받기 위해 자비로 상당한 경비를 들여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의 새로운 현상들은 총련 조직 체계의 외연에 놓이게 된 무용가들이 전문적인 역량을 살리면서 무용에 대한 열망을 추구해 나가는 사적인 활동의 공간과 기반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전적으로 총련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던 조선무용 전승 체계에 일부 시장적인 요소가 결합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무용의 지도 내지 전습에 이미 시장적인 요소가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조선무용은 총련계 커뮤니티의 민족성 함양과 연대 강화를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가무단 출신자의 경우, 가무단에서 활동하는 동안 공연 외에 일반 소조를 지도하기도 하는데 퇴단할 때는 가무단과 상의해서 지도 계속 여부를 결정한다. 최근에는 가무단 단원 수가 줄어든데다가 현역 단원들의 나이가 소조원들에 비해 어려 지도하기가 부담스러운 경우도 있어서 퇴단 후에도 기존에 지도하던 소조를 계속 지도하게 되기도 한다. 위에서 프리랜서 무용가의 예로 든 고정순의 경우도 현재 지도하는 소조들 중에는 가무단원 시절부터 지도하던 팀이 있다. 또한, 소조원들로부터 사례비를 받기는 하지만, 소조 지도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저렴하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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