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지도리다. 내가 나비가 되어 지도리에 왔듯이, 물고기 곤이 붕이 되어 하늘을 나는 건 변화다. 곤은 원래 작은 물고기 알이었다. 이 작은 알이 큰 물고기 곤이 되고, 곤은 다시 큰 새 붕이 되어 구만리(九萬里) 하늘을 날게 되었다. 장자는 이 화이위조(化而爲鳥; 새가 되다. 즉 새로운 것으로 변하다)에서 하나의 길을 전하고 있다. 알에서 곤이 되고 붕이 되듯, 모든 사물은 원래 모양이 없고 변화가 존재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틀(이름)을 만들어 모든 걸 그 안에 가두고 변화하지 않는 모양을 만들려고 한다. 장자는 이것을 경계하며 “그 틀을 깨고 나와 더 넓은 세상으로 가라!”고 외치고 있다. 그렇게 가는 길이 道(도)다.
참새들이 일제히 웃었다. 나도 하마터면 쿡 하고 웃을 뻔했다. 부리에 깃털 날개까지 단 녀석이 나비라고 하니 어이가 없다. 아, 웃을 일이 아니다. 나도 내가 나비라고 믿고 있지만, 내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한 번도 날개 달린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이전에 나는 사람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나비 모습인지, 아니면 사람 몸에 나비 날개가 달렸는지 알 수 없다. 저 참새들에게 아직 들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뭔가 다른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웃을 일이 아니다. 나는 얼른 날개를 최대한 움츠렸다.
비밀조직에 가담한 참새와 벌떼들이 모르는 일이 있었다. 성과를 이루지 못하거나 색깔이 희미해서 보안이 취약해진 참새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아미스타트(La Amistad) 호에 태워 암시장에 내다 팔았다. 용도 폐기다. 겉으로는 본인이 실수하여 참새잡이 그물에 걸려 희생된 것처럼 위장했다. 아미스타트, ‘우정’이라는 뜻이다. 악어의 눈물처럼 잔인한 폭거를 달콤한 우정으로 위장한 노예선이다. 참새들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그렇게도 조작한다. 아미스타트 호를 탄 참새들은 결국 참새구이 식당이나 포장마차에서 소주 안주가 된다. 이것도 모르고 참새들은 죽자 살자 반대편 인사를 공격해 대고 있다. 벌떼도 마찬가지다. 용도 폐기된 벌들은 봉침 용으로 팔리거나, 소주병에 담가 벌술을 만들어 주당들에게 판다. 혼돈 대왕이 다스리던 중앙은 이렇게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모두 갈망하는 그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장자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무위에서 도망쳐나간 길든 인간과 길들어진 짐승들이 한계에 이르면 스스로 되돌아오리라 희망했다. 혼돈에서와 달리 이들이 몰락하는 걸 장자는 원하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마지막 희망의 끈 하나를 남겨두었다. 그건 인간이 아닌, 들과 산으로 돌아간 착한 ‘들짐승’에게서 소요유를 얻으려 한 것이다. 이 들짐승들은 무위에서 자연에 동화하여 질서를 찾아 자유롭게 살고 있지만, 아직은 유위로 길든 인간과 길들인 짐승들의 무지막지에 밀려 숨어서 살 수밖에 없다. ‘없는 것(無爲)보다 있는 게(有爲) 낫다’라며 큰소리치는 인간들이 지금은 우위에 있지만, 유의는 결국 무의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만약 인간들이 미리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결국 혼돈에서 자멸한 늑대나 여우들과 같은 길을 갈 것이다. 그리하여 무위에서 사는 착한 이 들짐승들이 광장으로 나오는 날 제대로 된 제물을 이룬다.
돌 하나를 두고 사람들은 아직도 싸운다. 내가 보기에 이 싸움은 끝낼 수 없을 것 같다. 집 문제도 마찬가지다. 누가 옳고 그른 게 아니다. ‘저것이 이것이고, 이것이 저것인데’ 무슨 해결책이 나오겠는가. 시비가 일어나기 이전 모습, 사물의 본래 모습을 보지 못하는 한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이름 지은 대로 그것이 정답이라고 굳게 믿는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프다. 이건 물아가 일치되지 않는 한 해결 못 할 문제다. 옛사람들이 “밑돌 빼서 위를 받히고, 윗돌 빼서 아래를 받힌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어려운 시절에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가계를 꾸려갔다. 따지고 보면, 가정도 작은 세상이다. 그 세상을 탈 없이 꾸려가던 ‘가장’이 참 훌륭한 지도자였다. 무릇 세상을 다스리는 지도자는 이처럼 자기 가정을 지키듯 일하면 덕을 쌓을 것이다.
나는 개자추 사당 앞으로 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모시는 주군을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낼 정도의 충성심과 세상만사에 초연하기 위해 면산에서 소신을 선택한 그 절개에 경의를 표했다. 그가 살아서 장자를 만났는지 죽어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까지 온 거라면 세상을 평안하게 할 사람일 수도 있었겠다 싶어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이렇듯 내가 기억하는, 혼탁한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개자추 같은 사람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의 허벅지 살을 먹은 문공도 그를 잊었고, 그를 불태우지 않았는가. 가까이 두기 위해 불을 질렀다지만,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몬 행위는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이다.
사실 포정이 혜공에게 한 말의 핵심은 ‘칼’에 있는 게 아니다. “…… 한 3년을 그렇게 소를 잡고 나니, 어느 틈에 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이 말에 포정이 말하고자 한 핵심이 담겨 있다. 우리는 땅 위를 걷고 있지만, 땅의 본래 모습인 지구를 보지 못한다. 지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앞의 길을 가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 종일 다녀도 발의 존재를 잊고 있는 건 신발이 발에 맞아서다. 허리가 불편하지 않은 건 허리띠를 허리에 맞게 잘 맸기 때문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의 눈에 세상이 보이면 안 된다. 그 세상은 보이지 않고, 움직이는 그 세상의 속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산을 보려면 산 밖에 나와야 하지만, 산을 알려면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소가 보이는 백정에게는 소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칼날에 살이 베이고, 뼈가 부딪힌다. 세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통치자가 세상이 움직이는 길을 잘 볼 리 없다. 그런 통치자가 세상을 마음대로 다듬고 고치려고 한다. 그 세상이 온전할 리 없고, 다듬는 칼이 성할 리 없다. 세상은 다듬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스스로 움직이면서 모양을 갖춘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 힘들이 세상을 만든다. 통치자는 움직임이 멈출 때만 무엇이 원인인지 살펴 바로잡고, 위험한 곳을 미리 살펴 탈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만 잘하면 된다. 요순이 세상을 잘 다스린 것은 있는 그대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까지도 있는 그대로 숨 쉬도록 했기 때문이다. 나라 모양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