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에는 오사카 지역에서 재일한인을 중심으로 오사카상은과 오사카흥은이란 두 개의 신용조합이 설립되었다. 오사카상은은 한일합작의 신용조합이었지만 재일 한국인이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사카흥은은 순전히 재일한국인을 조합원으로 하는 신용조합이었다.
이 두 신용조합의 설립에는 오사카상공회 회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으며, 신용조합 임원 중에 오사카상공회 관계자가 많았다. …… 상은과 흥은의 설립은 향후 오사카상공회가 발전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신용조합과 오사카상공회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함께 발전해 가는 구도가 이 시기에 확립된 것이다. 일본 금융기관으로부터 융자받기가 곤란한 재일상공인에게 민족계 신용조합의 존재는 생명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거꾸로 상은과 흥은은 오사카의 재일상공인이라는 확실한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상은과 흥은은 1960년대에 급속히 발전하면서 1970년대에는 조총련계 신용조합을 제치고 최대의 민족계 금융기관으로 성장하는데, 이러한 상은·흥은의 발전은 오사카상공회 발전의 배경이 되는 한편, 오사카상공인의 성장은 다시 상은·흥은의 성장을 이끌어내었다.
--- p.46~47, 「제1장 한국 진출을 위한 재일상공인의 조직적 활동」 중에서
국교 수립 이전은 물론 국교 수립 이후에도 한동안 한일 간의 인적 교류가 자유롭지 못하던 시기에 오사카상공회에 축적된 한국의 정계 및 재계에 관한 정보는 당시의 재일상공인에게는 희소한 자원이었다. 오사카상공회는 그러한 희소한 자원을 유효하게 활용하기 위한 오사카상공인들의 ‘조직화된 기업자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오사카상공회가 본국의 정책에 협력한 대표적인 사례는 1970년 오사카에서 개최된 일본만국박람회(오사카만박, EXPO’70) 후원 사업일 것이다. …… 1968년 8월 재일한인은 “EXPO’70 재일한국인후원회」 중에서(회장 이희건) 발족 총회를 개최하고 오사카만박 후원을 위한 체제를 정비해 1억 8000만 엔이라는 거액의 후원금을 모금하는 데 성공했다. 후원회 활동의 핵심인 한국관 건설모금에서 가장 돋보였던 것은 오사카 지역 상공인들의 활약이었다. 전국적으로 모금한 1억 8000만 엔 중 71%에 달하는 1억 2810만 엔은 오사카 재주 한국인 59명의 기부금이었으며, 그중 53명이 오사카상공회 회원으로, 이들의 기부금만 1억 1900만 엔에 달했다.
오사카상공인이 이처럼 거액의 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조국에 대한 뜨거운 애정(애국심)과 오사카 상공업자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유수현 회장의 리더십하에 조직을 정비·강화한 오사카상공회가 상공인의 애국심을 조직할 수 있었다는 측면도 간과하면 안 된다.
--- p.67~68, 「제1장 한국 진출을 위한 재일상공인의 조직적 활동」 중에서
암시장이 재일한인의 경제적 기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GHQ에 의해 재일한인이 전승국민은 아니지만 해방민족(liberated people)에 해당되어서 일본 정부의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특수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재일한인은 이러한 특수한 지위를 이용해 GHQ를 등에 업고 부족한 물자를 각종 루트를 통해 구입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구입한 물자를 암시장에서 거래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재일한인의 암시장에서의 활약은 당시의 일본 위정자들에게 위협으로 비추어지기도 했다. 오사카의 암시장 폐쇄를 단행했던 스즈키 에이지(鈴木?二) 당시 오사카경찰부장은 암시장을 ‘제3국인(第三?人)의 제국’으로 칭하면서 조선인·중국인이 돌출해서 암시장에서 암약하고 있는 것처럼 기술을 하고 있지만, 오사카부경찰부가 조사한 암시장업자의 국적별 구성을 보면 일본인이 75%인 1만 1350명이었으며, 재일한인은 쓰루하시 시장에서 절반을 차지하지만 오사카부 전체로는 21%인 3172명에 지나지 않았다. …… 암시장을 비즈니스 기회로 삼아 성장한 상공인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암시장에서 확보한 물자 또는 그런 물자를 원료로 제조한 제품을 암시장에 판매해 크게 이득을 본 그룹이다. 또 하나는 당시 무법천지라 할 수 있는 암시장의 규율을 잡고 암시장을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지도력을 발휘해 재일상공인의 리더 내지는 조정자로 성장한 그룹이다.
--- p.98~100, 「제1장 보론 오사카한국인상공회 사람들」 중에서
1960년대 ‘재일교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했던 데에는 특히 당시 한국 사회에 반일민족주의, 반공주의, 개발주의라는 세 가지 담론적 필터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즉, 당시에 ‘재일교포’라고 하면 대체로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 ‘반(半)쪽발이’, 조총련 등에서 연상되는 ‘빨갱이’, 그리고 경제대국 일본의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치부(致富)한 ‘졸부(猝富)’라는 세 가지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 …… ‘재일교포’는 냉전적 대결 국면에서 재일한인을 ‘분리와 배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의미가 상대적으로 강한 반면, ‘재일동포’는 민족적 포용 국면에서 재일한인을 ‘포섭과 회유’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는 것이다. 당시 재일상공인들의 ‘모국투자’를 재일한인들의 ‘명예 회복’과 ‘정체성 인정’을 위한 집단적 실천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다.
과연 재일상공인들의 모국투자는 ‘경제적 이윤 추구’ 행위인가 아니면 ‘정체성 인정 투쟁’ 행위인가? 그들의 행위는 애국심에 바탕을 둔 공익추구적 행위인가 아니면 기업논리에 바탕을 둔 사익추구적 행위인가? 이 글에서는 이들의 투자 활동을 ‘이익 지향적 기업가 정신의 산물’이자 ‘진정한 애국자 정신의 발로’라는 양면성과 모순성을 띤 행위로 평가해 온 선행연구의 한계를 넘어서, 재일동포 기업인들의 고국 자본 투자가 차별적인 양상을 띠면서 전개된 몇 가지 대표적 사례를 비교·분석함으로써, 그 실천 동기와 구현 양상의 차이에 대해 좀 더 세밀한 유형화 작업이 필요함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역사적 행위에 내포된 실체적 진실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 p.122~123, 「제2장 1960년대 재일상공인 모국투자와 공업단지 형성」 중에서
1970년의 만박 직후 한국 정부와 민단, 재일한인 재계의 협조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고, 유효성이 증명된 ‘공헌의 윈윈 모델’은 이후 본국투자, 모금활동, 정부활동 후원 등으로 확대·재생산된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호혜적 관계는 이른바 ‘유신민단’ 이래 정부의 예산 지원과 개입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이라는 종속관계로 변질되었고, 그로부터 40년 이상 지난 오늘날의 민단은 변화된 현실에 대처하지 못하고 ‘정부의 하부기관’이 되었다는 비판 앞에 놓여 있다. 한편, 한인 상공업자들은 기업 경영상 차별이 상당 부분 완화된 까닭에 굳이 민족계 금융기관을 고집하거나 민단계 경제인들의 연합회를 위해 ‘헌신’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의 민단 - 경제인 - 한국 정부의 삼자 간 협조 관계가 “일본 사회의 다문화화 속에서 역설적으로 와해」 중에서되는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기업과 정부 간의 협력은 오히려 청산해야 할 구시대적 ‘정경유착’의 유산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실을 염두에 두고 재일한인들의 ‘공헌’을 되돌아보는 일은 그들을 이른바 ‘민족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기만 하는 작업일 수 없으며, 반대로 그들의 삶을 단순한 이해타산이나 외적 압력으로 환원시키는 일이어서도 안 될 것이다. ‘공헌’의 복합성, 역사성, 역동성을 비판적으로 묻고 또 깊이 있게 음미하는 작업은 아직까지 한일 두 사회 속에 강하게 작동하는 식민주의, 국가 건설, 개발과 성장이 남긴 유산의 양가성(ambivalence)과 대면하는 일이자 과거로부터 새로운 미래를 재발명(reinvent)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커다란 과제 앞에 이제 막 섰을 뿐인지도 모른다.
--- p.206, 「제3장 ‘자이니치’의 만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