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앓음으로써 내가 영화에 출연하는 방식이 바뀐 건 아니지만, 마음가짐은 크게 변했거든. 좀 겸허해진 것 같아요.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도요.
---p.17
나 자신을 물처럼 만들어서 세모난 그릇이라면 세모, 네모난 그릇이라면 네모, 동그란 그릇이라면 동그라미가 되어 꾸밈없이 거기에 들어가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요.
---p.17
인간이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고, 멈춰 있지 않다는 것을 고레에다 감독은 확실히 보고 있고, 또 그런 방식으로 찍어요.
---p.21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사건이 일어났다! 또 일어났다!’로 채워져 있잖아요? 점점 그런 특별한 사건이 없으면 드라마가 아니다, 영화가 아니다, 하는 착각이 드는 건 무서운 일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있기에 인간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요.
---p.24
연예계라는 곳에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할 정도로 색정과 욕망이 줄줄 흐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고요한 것, 깨끗한 것이 줄줄 흐를 때도 있어. 그것들이 꼬인 새끼줄처럼 공존하는 와중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세계예요.
---p.66
난 일흔이 넘은 이제부터가 가장 좋을 때인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안 해도 돼. 이 연예계라는 어중이떠중이들의 세계 속에서 결국은 나 자신도 포함해 여러 사람을 마구 휘저어왔지만, 일흔이 지난 지금은 여기가 아주 좋은 거처라는 걸 실감해요.
---p.73
현장에서 감독이 엄청나게 집중해 극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저렇게 역할을 느끼면서 만들고 있구나, 역시 감독 덕분에 좋은 곳에 와 있다고 실감해. 그와 동시에 이건 딱 한 번일 거라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느낌도 들어. 만약 이어진다면 내 수준도 좀 더 높게, 인간으로서의 격이랄까, 말이 이상하지만 영혼의 품격도 끌어올려두지 않으면 낭패일 거라는 생각이 있어요.
---pp.78,79
키린 씨의 연기를 좋아하는 건 당연하고요, 함께 있으면 ‘제대로 된 감독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p.79
키키 키린은 재밌다. 훌륭한 것도 즐거운 것도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역시 재밌다.
---p.105
캐스팅할 때 “이 역할은 평범한 느낌의 사람이 좋겠어요”라고들 하지. 하지만 정말로 그런 사람을 데려다놓으면 그저 ‘평범할’ 뿐이야. ‘평범한 사람의 매력’이 있어야만 하는데도.
---p.155
제대로 느껴주는 연출가를 만난다는 건 배우로서는 행운이에요.
---p.156
난 배우로서 살기보다 연예계에서 사는 쪽이 좋아. 가장 싫은 곳이지만, 이 연예계에 가만히 앉아서 여러 사람을 보는 거야. 재밌거든.
---p.191
지금 이렇게 돌아보니, 가까운 사람들에게 남들은 헤아릴 수 없는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키린 씨는 “좀 쉬겠습니다” 하며 문을 닫고 멋지게 생生에서 사死로 먼 길을 떠난 게 아닐까 한다.
---p.231
인간은 몇 살을 먹든 그대로야. 그저 체형이 그렇게 변해버린 거지. 난 할머니를 연기하지 않아. 그대로 출연할 뿐이야.
---p.237
나한테는 늘 이쪽에서 보면 어떨까 저쪽에서는 어떨까를 생각하는, 사물을 부감해서 보는 버릇이 있구나 싶었어. 이쪽에 웃는 사람이 있으면 저쪽에는 우는 사람도 있다든지, 그렇게 사물을 보는 습성과 버릇이 있는 모양이야.
---pp.301,302
가벼운 발놀림과 ‘잡맛’을 굳이 버리려 하지 않는 당신의 자세는 TV 출신인 제 눈에 또 하나의 커다란 매력으로 비쳤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부고를 전하는 뉴스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당신을 “배우” “대배우”라고 부르는 데 약간의 거북함을 느낍니다. 그런 구분은 실은 당신의 존재를 오히려 ‘왜소’하게 만들어버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조차 듭니다. 분명 키린 씨도 그렇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요.
---p.336
키키 키린은 눈眼의 사람이다. ‘야부니라미藪?み’란 사시, 혹은 시각이나 사고방식이 얼토당토않다는 뜻인데 그의 눈이 ‘야부니라미’인 것을 두고 한국의 어느 영화평론가 백은하 가 이렇게 평했다. “현재를 보는 눈과 과거 혹은 미래를 동시에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배우는 신비롭고도 무섭다.”
---p.342
사랑해야 할 대상이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고, 손에 닿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부재’를 그립게 여긴다. 이 ‘그리워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불행한 체질의 인간이 작가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에서 이 책은 나에게 이제는 수신되지 않는 ‘연애편지’일 것이다.
---p.346
‘고분고분한 범생’ 타입인 나는, 고백하건대 번역을 하는 내내 키키 키린이 부러웠다. 뾰족한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삶이, 연기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에서도 엿보이는 천재적인 언어 센스가, 오랜 세월 나의 우상을 자극했던 대단한 재능이. 평범한 사람이 피나게 노력해도 가지 못하는 경지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 있는 이들에게 나는 늘 속수무책으로 끌린다. 그의 모나고 까다로운 면까지 사랑하고 마는 것이 범생 타입의 숙명이라 생각한다.
---p.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