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만은 사회와 문화를 전제하는 데서 출발하는 주류 사회학의 한계에 대해 하나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안했다. 그는 과학철학을 차이 이론적 작동이론으로 대체하여, 의미를 처리하는 소통 사건과 의미처리 형식으로서의 의미론을 상보적인 관계에 두고서 사회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자고 했다. 이 관점은 현실적인 사회 사건들과 현상들을 중립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정도의 추상성을 확보하고 있다. 베버의 ‘이념형’이나 뒤르켐의 ‘사회적 사실’ 개념에서 출발하면 그 개념들로 포착할 수 있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반면, 루만은 소통 사건과 그 결과물을 있는 그대로 잡아낼 수 있는 개념 도구를 통해 이런 가능성들을 방법론상 완전하게 배제했다. 이 개념은 “사실과 이론에서의 점화된 평형 상태(puntuated equlibria)”를 관찰 지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pp.90,91
이 글에서는 새로운 체계이론의 제안에 따른 재귀성 이해를 발전시킬 것이다. 첫 단계는 자기준거의 세 가지 연주법 가운데 하나로서 재귀성을 도입할 것이며, 재귀성(Reflexivita?t)과 성찰(Reflexion)을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명시적인 (구별)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II). 관찰의 관찰을 재귀적 스포츠 과학의 기제로서 제안하고, 그 형식과 기능을 개관하겠다(III). 재귀적인 스포츠 과학과 교육 과학의 기존 기획에 기초하면서, 마지막 고려는 재귀적 관찰의 모범적인 가능성과 결과를 예시할 것이다(IV).
---pp.90,91
루만에 따르면 타인의 어리석음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돈이 광고에 지출된다. …… 광고의 잠재적(전략적)인 기능은 취향이 없는 사람에게 취향을 선사하는 것이고, 취향은 욕망의 구조화에 이용되며, 소비자들은 동일한 의미로 취향에 반응한다. 특히 광고가 유행과 함께 가는 것은 강요와 같은 효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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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으로 명명된 산업기반의 자동화는 의사결정에서의 인간 배제로 인한 조직 변화와 지능적 자동화로 인한 많은 노동시장의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며 이를 위한 정치적·경제적·법적 문제가 따르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루만이 사회적 기능체계로서 다루어온 정치체계, 경제체계, 법체계, 조직체계에 관한 연구들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율주행자동차의 경우, 다양한 상황에서의 윤리적 결정과 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서의 로봇윤리 또한 루만의 법체계와 도덕체계의 논의가 필요하고, 가정으로까지 침투되는 다양한 가사 도우미 로봇이나 애완 로봇, 더 나아가서 성적인 로봇들도 루만의 친밀체계와 함께 논의 가능할 것이다.
---pp.144,145
루만이 스포츠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네 경우 모두 스포츠를 도핑과 관련하여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스포츠 자체에 대한 설명이 주가 아니라 정치, 법, 과학 등 다른 기능체계들의 코드가 무력화되는 현상, 즉 코드의 부패를 언급하면서 스포츠에서의 도핑을 그 유사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추론해낼 수 있는 것은 스포츠가 정치, 법, 과학 등과 같이 주도적 코드를 갖춘 사회의 부분체계이고, 다른 부분체계들과 마찬가지로 종종 이 주도적 코드가 위협받고 있다는 점이다.
---p.154
루만에게는 하버마스 식의 의도된 의사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루만에게 심리체계는 알 수 없는 블랙박스(black box)와 같은 것으로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준거적으로 닫힌 체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Gripp-Hegelstange, 1995: 83). 정작 우리 자신도 체계의 환경으로만 작용할 뿐인 것이다. 나는 내 말을 내가 뜻한 바대로 상대가 수용할지 말지에 대한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나의 역할은 다만 내 의사를 통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고, 내가 전달한 정보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상대의 몫일 뿐이다. 소통의 속행을 위해서는 필연적인 조건들만 충족되면 되지 ‘무한한’ 본질을 알 필요가 없다는 게 루만의 생각이다.
---p.179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체계이론이 인간의 존재 일체를 부정하거나 그 인간 존재의 존엄한 가치를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체계이론의 분석 대상에서 환경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관찰의 시선과 서술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체계이론은 간혹 가다 들리는 비판, 곧 루만의 이론은 실제 사회의 모습을 간과하고 형식주의적인 방법론에 치우친 나머지 “반인간적인(anti-humanistisch)” 이론에 불과하다는 매몰찬 쓴 소리에 위축될 여지도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체계이론에서 사회구조 변동이나 커뮤니케이션 이론만큼이나 복잡하고 방대한 “구조적 연동(strukturelle Kopplung)”과 “의미론(Semantik)”, “인격(Person)”과 “개체성(Individualita?t)”이라는 또 다른 개념의 틀 안에서 인간의 위상을 다룰 여지가 충분하다는 사실은 인간 탐색을 본연의 연구 지평으로 삼고 있는 문학연구자들에게는 위안이 된다.
---pp.218,219
다시 환기하자면 루만이 언어나 기호를 체계로 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단지 소통과 사고의 수단에 그친다고 보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루만의 기호 개념에는 ‘인식 작용’이 빠져 있다. 하지만 앞서 살핀 것처럼 루만은 퍼스를 인용하며 기호를 구성하는 제3의 요소인 ‘해석 작용’을 ‘관찰’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루만은 퍼스의 기호 개념 속에서는 체계의 요건인 ‘자신의 작동 방식’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루만이 통상적으로, 특히 소쉬르와 관련해 정의하는 기호 개념과 달리 퍼스는 ‘기호’를 자체 내에 “사람”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p.238
루만의 체계이론에 관한 주된 비판 중 하나는 유용성에 관한 문제이다. 하지만 루만의 이론은 어떠한 실천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루만이 연구되고 추앙받는 것은 루만이 관찰자로서 통찰한 사회에 관한 이론이 매우 정치하고,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범위와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pp.357,358
우선 양가코드의 두 가지 값은 동등하다. 양가코드의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우세하면 양가코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경제 시스템의 양가코드인 소유/비소유에서 소유가 비소유를 의미 없게 만들 만큼 선호되지 않는다. 즉, 적자를 시현하는 공장은 소유되기보다는 비소유되는 쪽으로 선호된다. 양가코드의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선택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독자적인 프로그램이 해결한다. 이를 통해 행위가 결정된다. 그러나 양가코드의 구조를 보면 양쪽의 값은 상기의 동등성과 함께 근본적인 차이도 동시에 존재한다. 즉, 사회적으로 주로 한쪽의 값에만 행위나 작동이 접속된다. 이를 긍정의 값이라 한다. 예를 들면 학문 시스템에서는 사실임(true)/사실이 아님(or not)이라는 양가코드가 사용되는데, 통상 사실인 것에 반응하고 사실이 아닌 것은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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