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들어와 과학이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과학이 제시하는 질문들은 과학적 세계 이해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런 질문들은 과학 자체를 뛰어넘어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우리에게 지시하면서, 더 심오한 수준에 이르러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함을 일러주는 듯하다. 과학 너머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과학의 성공과 한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있을까? 인간 존재에 얽힌 수수께끼와 난제들이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더 심오한 사물의 질서가 과연 존재할까?---p.64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가 던지는 수수께끼들이 지닌 의미와 그 답들에 천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 작업은 이런 궁극의 물음들에 이르기 전에 멈춰서며, 또 그렇게 멈춰서는 것이 옳다. 과학은 자신의 한계를 알며, 그 한계는 증거가 결정한다. 그러나 때로 증거는 증거 너머를, 그 지평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를, 과학으로 탐구할 수 없는 저편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훌륭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이 점을 강조한다.
“과학은 단지 인간의 지성과 인간 유기체의 조그만 일부일 뿐이다. 과학이 멈추는 곳에서도 인간은 멈추지 않는다. 물리학자는 자신의 방법론이 끝나는 곳에서 그가 사실들을 그려 보일 때 사용하는 손을 멈춘다. 그러나 각각의 물리학자 뒤에 자리한 인류는, 물리학자가 그리기 시작한 선---p.線)을 연장하여 그 선이 끝나는 곳까지 계속 이어간다. 이는 마치 폐허가 된 아치를 응시하는 눈이, 이제는 사라진 채 비어 있는 아치 곡면부---p.曲面部)를 그 눈으로 그려 완성하려는 것과 같다.”---p.87
앞에서 우리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언급, 즉 “세계가 지닌 영원한 신비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를 인용한 바 있다. 아인슈타인은 설명할 수 있다는 것 자체야말로 분명히 설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우주를 놓고 볼 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바로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은 자연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증해 보인다. 이 이해할 수 있음은, 인간의 지성과 우주의 구조 사이에 이런 근본적 조화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일으킨다. 삼위일체적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의 지성과 우주의 심오한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조화는, 자연의 근본 질서 그리고 자연을 관찰하는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합리성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p.116
기독교 신앙은 만물의 질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하고 그 성품을 표현하는 의미의 틀을 제공해준다. 실제로 세계는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물들을 제대로 볼 수 있으려면 어떤 렌즈 혹은 개념의 틀이 필요하다. 세계는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올바른 시각으로 세계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세계가 소망이 없을 정도로 초점이 없고 체계가 없어 보인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 세계의 초점이 무엇인지 일러주고 겉보기에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실들을 함께 엮어 의미 있는 태피스트리로 만들어줄 열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실재라는 어두운 땅을 밝게 비춰주고, 우리가 세계를 관찰한 결과들의 초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일러주며, 우리의 경험이라는 실들을 어떤 패턴으로 엮어줄 의미 체계를 제공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C. S. 루이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섬세하게 조율된 언어로 요약했다. “내가 해가 떴다고 믿는 것은 해를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뜬 해 덕분에 다른 모든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기독교를 믿는 것도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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