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20세기 전반 일본판 산업혁명의 현장이었던 이들 공업 대도시에 이주해 온 조선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 이주민 인구 집단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우선 한 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당시 한반도가 제국 일본의 영토였다는 점이다. 조선인은 ‘외지인(外地人)’으로서 ‘내지인(內地人)’과 구분되기는 했고, 때로는 이주 인구 조절을 위한 도항 허가의 제한이나 검문검색 등 당국의 관리·통제 체제가 작동하기는 했으나, 식민지 제국 체제하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본질적으로 국경의 장벽이 없는 ‘매끄러운 평면’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 p.33, 「제1장 ‘재일한인 1세대 집주 공간의 형성과 변천」 중에서
이카이노 일대에 조선인 집주지가 형성되면서 1930년대부터 조선인들을 위한 상거래 공간이 자리 잡았으며, 주로 노점상들을 중심으로 1930년대 말 이카이노 일대에 ‘조선시장’이 형성되었다. 조선시장에는 갈비집이나 천엽집과 같은 조선식당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인들이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풍부한 상품 시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 일대에는 식료품부터 혼수용품까지 한인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점포 약 200개가 모여 있어 오사카 한인들이 운집하는 상업적·문화적 중심지가 형성되었다.
--- p.50, 「제1장 ‘재일한인 1세대 집주 공간의 형성과 변천」 중에서
공업 부문에 가장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취업하고 있었다. 공업 부문 중에서는 금속 및 기계 기구 부문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진행된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전시경제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 p.77, 「제2장 1940년의 재일조선인 취업 구조」 중에서
여성 작업자의 경우는 제조 관련 작업자가 전체 여성 작업자의 48.8%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방직품 제조 작업자(19.9%), 피복·일상용품 제조 작업자(8.2%)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표 2-7〉). 그러나 금속·기계 관련 작업이나 요업 토석류 가공 작업처럼 남성의 일로 생각되는 작업에도 여성들이 상당수 취업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밖에 점원·판매원(6.5%), 접객업(5.5%), 소사·급사(4.4%), 가사 사용인(4.5%) 등도 여성이 많이 취업하는 직종이었다.
--- p.93, 「제2장 1940년의 재일조선인 취업 구조」 중에서
재일조선인 취업자의 30% 이상이 공업 부문에서 주로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이 가장 많이 취업하고 있는 업종은 기능 수준이 낮은 섬유공업이나 고무공업, 유리공업, 기타 잡업이 아니라 금속, 기계 기구 업종이었다. 일본의 중화학공업화, 그리고 전시경제의 진전에 따른 군수공업의 확대 속에 재일조선인은 이러한 산업을 저변에서 지지하는 공업 부문의 노동자로서 존재했으며, 일본의 공업은 전시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재일조선인의 존재 없이 성립되지 않는 상태였다.
--- p.99~100, 「제2장 1940년의 재일조선인 취업 구조」 중에서
유업 비율이 15% 이하로 떨어지는 20대 (결혼) 이후에도 여성들은 내직을 포함해 비공식 부문에서 경제활동을 계속했을 확률이 크다. 나아가 돈벌이를 위한 일 외에도 “교회에서 성심으로 수십 년간 봉사”를 하거나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아이를 들쳐 업고 민족학교 일을 위해 간빠(모금)하러 다니거나” 병문안, 행사음식 만들기 등의 다양한 볼런티어 일을 했다.
--- p.166, 「제3장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어요”」 중에서
조정순은 어머니가 일본에 가면 편하게 살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일본에 와서 “일만 세가 빠지게 하고”, “생전 안 해본 일도 다했다”고 회고한다. 탄광 일을 했는데 처음 갔던 야마구치현 우베 탄광은 좁은 갱도가 바다 아래로 이어지는 해저 탄광으로 남자들도 겁이 나서 못 들어가는 데를 들어가서 일했다. 갓 스무 살이었다. 남편은 탄광 일을 싫어했다. 노름에 빠져 지내는 일이 많았다. 탄광 일 외에도 온갖 막노동을 전전했다.
--- p.178~179, 「제3장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어요”」 중에서
이런 상황에서 가구의 생존을 위한 여성의 기여와 역할이 어떻게 평가되었고 가족 내 권력관계와 위신 구조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가부장제에 어떤 변화와 균열을 초래했는지에 대해 향후 보다 심도 있는 분석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점과 관련해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는 지점 중 하나는 제사이다. 많은 재일 1세 가정은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지내고 나름대로 상세한 제사 규범을 고수해 왔다.
--- p.189, 「제3장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어요”」 중에서
물론 일본에서 일했던 조선 여공이 그대로 다 일본에 정착해 ‘재일한인’이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지 않은 여성들은, 요즈음의 국제 노동 이주자처럼, 단기간의 출가 노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향했고 실제 많이 귀국했다. 다른 한편 조선 여공 중 일부는 일본에 정착해 재일한인 1세가 되었고, 1세 여성 중 다수가 방적·방직을 포함한 공장 노동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은 일본의 산업 경제사나 재일한인의 역사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한국 근대사나 한인 해외이주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조선 여공’의 모습을 가시화시키는 것은 재일한인 1세의 역사나 한인 해외이주사를 좀 더 다면화하고 그 주체들의 삶을 보다 면밀히 들여다보는 창구가 될 것이다.
--- p.199, 「제4장 일본에 돈 벌러 간 이야기」 중에서
이렇게 일본의 방적 공장은 당시 조선 여성들이 임금노동을 위해 ‘국경’을 넘는 주요 목적지가 되었다. 방적 여공은 조선 여성이 임금노동자의 지위를 갖고 일본으로 이주한 특별한 경로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여성들의 공적 노동이 아직 예외적이던 상황에서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노동 이주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 p.210, 「제4장 일본에 돈 벌러 간 이야기」 중에서
재일한인 1세 여성의 삶을 일과 노동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그동안 이들에 대한 지배적인 재현이 지나치게 단순하며 이들이 살아냈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함을 알게 된다. 1세 여성은 기존의 연구나 대중적 재현에서 흔히 강조해 온 것처럼 ‘숭고한 어머니’이자 ‘억압받는 희생자’인 것만큼이나 노동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종종 그 노동을 통해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고 자식을 가르친, 실질적인 생계 부양자였다(본서 제3장 참조).
--- p.224, 「제4장 일본에 돈 벌러 간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