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책에 대한 강의를 책으로 담은 책, 그러니까 책에 대한 책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우리가 이렇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강의로, 책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이야기하는 책을 보다 많은 독자들이 직접 읽어보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를 떠올려볼까요? 불안해서 누군가가 뒤를 잡아주어야 조심스레 페달을 돌릴 수 있었지요. 우리는 자전거의 뒤를 잡아주는 이 누군가의 역할을 자처합니다. 하지만 결국 남이 잡아주는 자전거는 재미가 없습니다. 본인이 자기 발로 쌩쌩 달려야 재미가 있죠. 그렇게 독자 여러분이 직접 이 위대한 고전들을 읽을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우리는 할 뿐입니다.
---「책을 펴내며」중에서
아킬레우스의 기준은 희랍군의 관습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독특하고, 비범한 인물입니다. 전쟁 서사시에서 영웅의 비범함이란 으레 무력에서 비롯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정서에 있습니다. 이 시는 여신에게 아킬레우스의 진노를 노래해달라고 청하며 시작합니다.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 /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카이아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 그 많은 영웅들의 강인한 목숨을 하데스로 떠나보내었으며, / 그들 자신을 온갖 개 떼와 새 떼의 먹이로 만든 / 그 저주받을 것을! (…)”
---「1장 《일리아스》 호메로스」중에서
오뒷세우스가, 고립된 아킬레우스보다도 더욱 고립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갇혀 있는 세계는 그가 돌아와야 할 세계와 차원이 달라요. 인간 세계에서 떨어져 나간 채, 저 너머의 세상에 갇혀 있어요. 시인은 그를 저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되돌려놓아야 합니다. 제의적인 해결책 말고는 없지요. 그것이 텔레마코스의 여행입니다. 그의 제의적 여행을 통해, 아들은 영웅의 귀환에 요구되는 조건들을 모두 해결해냈어요. 그는 저세상으로 건너가 포세이돈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망각/죽음으로부터 오뒷세우스를 일으켜 세웁니다. 과연 고귀한 명성을 얻을 자격이 있는 젊은이입니다. 그런 까닭에 텔레마코스의 여행은 이 시 자체가 진행될 수 있는 진정한 원동력입니다.
---「2장 《오뒷세이아》 호메로스」중에서
또한 그 바탕의 상상력이 출중합니다. 복수의 의무와 친족살해 금기 사이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피의 복수의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 없을 때, 이전에 없던 발상으로 새로운 제도를 창안했습니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추격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질 찰나, 그동안 바닥만 내려다보던 시선을 위로 향하고, 거기에 또 다른 차원, 수직의 방향이 있음을 발견한 듯, 돌연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위기를 벗어난 듯, 깨달음의 짜릿함과 후련한 해방감이 있습니다. 인간들 모두가 제 손으로 직접 정의를 세우겠노라 하면 사회는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이 작품은 공적인 제도에 복수의 권리를 양도하고, 사적 구제를 피하자는 발상을 제시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형법의 기본정신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인류의 정신이 도약하는 그 놀라운 순간을 우리 앞에 놀랍게 재현해주었습니다. 대단한 걸작입니다.
---「3장 《오레스테이아》 아이스퀼로스」중에서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좋은 작품이라면 보통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용, 형식, 그리고 의미입니다. 한국에서는 대개 좋은 작품을 소개할 때, 대충의 내용과 작품의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의미만 놓고 보자면 거의 모든 작품이 똑같습니다.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이런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운명에 대한 심오한 통찰.’ 그리고 이건 형식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유려한 문체’라는 평가도 자주 보입니다. 하지만 유려하지 않고서 좋은 작품이 어디 있을까요? 또 인간과 운명을 깊이 살피고,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시대를 넘어서는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는 《돈키호테》나 소포클레스 비극이나 다 똑같습니다. 그러니 앞에 한 말들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입니다. 저로서는, 형식에 주목하지 않으면 결코 작품의 진수를 느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4장 《엘렉트라》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중에서
이 작품은 맨 마지막까지도 감정을 차단하고 분산시킵니다. 예상했던 대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고 계속 뜻밖의 사건이 이어집니다. 주인공도 다른 데서 보던 전형적 인물이 아닙니다. 관객들의 시선을 중심 흐름에서 벗어나게 하고, 계속 토론과 설명이 등장하며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천재의 작품입니다. 여기서는 감동을 찾지 말고 에우리피데스가 얼마나 현대적인지 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구슬을 쭉 꿰어서 목걸이처럼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입니다. 그런데 이제 현대에 이르러 그 목걸이의 끈을 끊고, 구슬을 부숴서 구슬의 깨진 한쪽 면이 반짝이는 순간을 즐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에우리피데스가 그런 경향의 시조입니다. 물론 아이스퀼로스도 소포클레스도 훌륭한 작가입니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는 이들과는 좀 다른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면모에 주목하고, 즐기기를 바랍니다.
---「4장 《엘렉트라》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중에서
또 하나의 주제는 그리스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인 ‘오만hybris’에 대한 ‘징벌nemesis’입니다. 한 사람이나 한 나라가 번영하거나 과도하게 무언가를 갖게 되면 쉽게 오만해집니다. 그리고 오만함은 반드시 징벌의 대상이 된다고 그리스인들은 믿었습니다. 번영은 그리스어로 ‘올보스olbos’라고 합니다. 인간이 번영하면,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지면 오만해지고, 오만해지면 눈이 멀어버립니다. 이렇게 정신이 눈먼 상태를 미망, ‘아테ate’라고 합니다. 아테에 빠지면 판단도 잘못 내리고 잘못된 행동을 하고, 결국 징벌을 당합니다. ‘네메시스nemesis’라는 개념입니다. 이런 패턴은 많은 그리스 비극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작품에서뿐 아니라, 인간의 실제 역사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번영-오만-미망-징벌’의 수렁에 빠지고 마는 수많은 개인과 나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5장 《역사》 헤로도토스」중에서
아테나이를 “헬라스의 학교”로 만든 그 아테나이의 힘이 끝내는 아테나이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아테나이가 가진 참주적 지배력은 아테나이를 가장 강력한 해상제국으로 만들었으나, 그 지배력의 본성이 아테나이에 재앙으로 되돌아왔던 셈입니다. 그리고 아테나이 민주정의 핵심인 아테나이 민중과 민회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은 아테나이 민주정의 쇠락을 가져옵니다. 민중의 끝없이 팽창하는 욕망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궁극적으로 비극적인 역사적 파국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투퀴디데스가 바라본 아테나이의 이런 현실은 과거 아테나이인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젠가 다시 인간 조건에 따라 앞으로의 일들이 그런 식으로 반복해서 일어나게 될 것”이며, “사람의 본성이 동일한 한, 더 가혹하든 좀 더 견딜 만하든, 그리고 각각의 일들이 놓이는 변화들에 따라 양상의 차이가 있어도, 일어나는 일이 생기고 또 계속하게 일어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6장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디데스」중에서
사실 일상적으로도 욕구 충족이 밑도 끝도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됩니다. 욕구의 충족에 따른 쾌락은 일시적이고 쉬이 사라집니다. 취업 준비생을 떠올려볼까요. ‘취업만 하면 진짜 행복할 텐데!’ 그런데 막상 취업을 하면 어떨까요? 취업이 더 이상 기쁨이나 행복을 안겨주지 않습니다. 월급이 올라가면 행복할까요? 막상 월급이 오르면 더 오르길 바랄 것이고, 혹 돈에 대한 욕심이 약해진다 해도 또 다른 욕심이 계속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더 나은 상황에 도달하면 거기에 금세 적응하고 당연시하게 되고 새로운 기대가 생기는 과정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돈, 건강, 명예, 권력 등 외적인 조건들이 나아지면 주관적 기대가 상승하고 이전의 조건으로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합니다. 욕구 충족에서 행복을 찾으려면 계속 채워나가야 하는데 욕구는 한없이 오르기 때문입니다.
---「7장 《고르기아스》 플라톤」중에서
그가 보기에 사유재산의 불허만으로는 미덥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혈연이라는 것도 탐욕과 부패의 강력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호자들은 서로 가족을 공유해야 합니다. 내 부인도, 내 남편도 없고, 내 자식도 없습니다. 사적인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것이다”라는 잠언대로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 없는 공유를 통해서만, 탐욕으로 인한 나라의 분열과 분쟁을 제거하고 ‘하나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입니다.
사실, 앞서 수호자들이 ‘처자’를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부정확한 표현입니다. 플라톤의 제안은 수호자인 남편들과 수호자인 부인들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랍지요. 여성도 ‘아름다운 나라’에서는 ‘수호자로서 나라를 경영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도 이 일을 하려면 남성과 똑같이 통치자 교육을 받아야 하므로, 여성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도 주어집니다.
---「8장 《국가》 플라톤」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행복의 윤리학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즐거움과는 동떨어진 덕 있는 행동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즐거움이 없는 행동은 덕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단지 흉내에 불과하지요. 아까 용기를 예로 들어 중용에 대해 설명했죠? 부족하면 비겁이 되고 너무 과하면 만용이 된다고요.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 이게 중용의 덕입니다.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아이들을 매섭게 야단쳐야 할 때도 있고, 한없이 온화하게 대할 때도 있지만, 늘 같은 마음이잖아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식으로 중용을 찾아가는 겁니다.
---「9장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중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리스 비극과 같은 작품들을 참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장면이 무대에서 펼쳐지면 당장 칼을 빼 들고 무대로 뛰쳐 올라갈 사람들이라서 비극을 즐길 수가 없다는 것이죠. 생각해보면 특이한 일입니다. 왜 이런 끔찍한 이야기들을 일부러 공을 들여 만들어서 공연을 하고, 또 그걸 사람들은 기꺼이 공연장에 가서 볼까? 하지만 우리가 공포영화를 즐기고 가슴이 찢어지는 슬픈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것을 보면 또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극을 즐기는 것은 시대와 문화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 문명이 만든 하나의 전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가 된 비극적 사건을 보면서 감정을 정화하고 인생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는 전통입니다. 여기서 그리스인들이 기여한 점은 끔찍한 사건을 드라마로 보는 것은 엽기적인 취향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통찰하는 예술적 행위라는 체험의 전통을 세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장 《시학》 아리스토텔레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