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진정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상관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정치적 태도이다.
---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강하고, 이기적이며, 게으르고, 가장 밑바닥에 깔린 동기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책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고 기나긴 병치레와 같아서 끔찍하고 기진맥진한 싸움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악마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그런 일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악마는 아기가 관심을 끌려고 울부짖는 것과 똑같은 본능이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끊임없이 싸우지 않는 한 읽을 만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 같다. 나는 어떤 동기가 가장 강한지 단언할 수 없지만 어느 동기를 따라야 하는지는 안다. 내 작품들을 돌이켜 보면 항상 〈정치적〉 목적이 없을 때는 생명력 없는 글을 썼고 화려한 문단, 의미 없는 문장, 장식적인 형용사에 현혹되어 전체적으로 실없는 글이 되었다.
---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교수대까지 35미터 정도 남았다. 나는 앞서 걸어가는 죄수의 헐벗은 갈색 등을 쳐다보았다. 그는 팔을 묶인 채 무릎을 절대 펴지 않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걸이로 어설프지만 착실하게 걸었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근육이 깔끔하게 제자리를 찾아갔고,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춤을 추었으며, 발이 젖은 자갈에 자기 형체를 새겼다. 한 번은 간수들에게 양쪽 어깨를 잡힌 채 옆으로 살짝 걸음을 옮겨 웅덩이를 피하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순간까지 건강하고 의식이 있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다. 나는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려고 걸음을 살짝 옮기는 모습을 보고서야 한창때인 생명을 끊는다는 것의 수수께끼를, 이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잘못된 일임을 깨달았다.
--- 「교수형」 중에서
그때 불현듯 깨달았다. 결국 나는 코끼리를 쏘아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그것을 기대했으므로 나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저항할 수 없도록 등을 떠미는 2천 명의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라이플을 손에 들고 거기 서 있던 바로 그 순간, 동양에서 백인의 지배가 얼마나 부질없고 공허한 것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여기 내가, 총을 든 백인이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무리 앞에 서 있다. 겉으로는 주연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뒤쪽의 저 노란 얼굴들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떠밀리는 어리석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백인이 독재자로 변할 때 그가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 「코끼리를 쏘다」 중에서
나는 그때 흙빛의 늙은 육체를, 압도적인 무게 밑에서 반으로 접히고 뼈와 가죽 같은 피부만 남은 육체를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아마 모로코 땅에 착륙한 지 5분도 안 되어 무리하게 짐을 실은 당나귀들을 보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당나귀가 지독하게 학대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모로코의 당나귀는 몸집이 세인트버나드종과 비슷하지만 영국 육군에서는 키 150센티미터짜리 노새에게도 너무 많다고 할 만한 짐을 지게 하고, 길마를 몇 주씩 벗겨 주지 않을 때도 많다. 특히 안쓰러운 것은 당나귀는 지구상에서 사람을 가장 잘 따르는 짐승이므로 굴레나 고삐가 없어도 개처럼 주인을 따라다닌다는 점이다. 당나귀는 12년쯤 헌신적으로 일을 하다가 픽 쓰러져 죽는다. 그러면 주인이 나귀 사체를 도랑에 던지고, 동네 개들은 사체가 식기도 전에 내장을 찢는다.
이런 일은 우리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지만 ― 대체로 ― 인간의 역경은 그렇지 않다. 나는 비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등이 다 벗겨진 당나귀는 누구나 불쌍하게 여기지만, 장작을 진 노파는 무슨 사건이라도 있어야 눈에 들어온다.
--- 「마라케시」 중에서
우리 시대의 정치 연설과 정치적인 글은 대부분 옹호할 수 없는 것을 옹호하는 데 쓰인다. (……) 그러므로 정치 언어는 대체로 완곡어법, 논점 회피, 아주 불분명한 애매함으로 구성될 것이다. 무방비한 마을들이 폭격당하고, 주민들이 시골로 밀려나고, 가축이 기관총에 떼죽음을 당하고, 헛간이 소이탄에 불타는 것이 바로 〈화평 공작〉이다. 농부 수백만 명이 농토를 빼앗기고 들고 갈 수 있는 것만 챙겨서 도로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이 바로 〈인구 이동〉 또는 〈국경 조정〉이라는 것이다. 재판도 없이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히거나, 뒤통수에 총을 맞거나, 북극 벌목지로 보내져 괴혈병으로 죽는 것이 바로 〈불안 요소 제거〉이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면서 마음속에 심상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을 때 이러한 어법이 필요하다.
--- 「정치와 영어」 중에서
나는 오줌을 싸는 것이 (1) 나쁜 짓이고, (2)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나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두 번째 사실을 알았고, 첫 번째 사실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따라서 죄를 짓는다는 의식도 없이, 죄를 짓고 싶지도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일이 가능한 것이었다. 죄란 반드시 우리가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일일 때도 있는 것이었다. 샘보에게 매질을 당하던 바로 그 순간에 이 참신한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이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으므로, 아마 집을 떠나기 전부터 얼핏얼핏 들었던 생각일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내 어린 시절을 지배한 크나큰 교훈이었다. 내가 착하게 구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 「즐겁고도 즐거웠던 시절」 중에서
강자가 약자를 끊임없이 이기는 것이 바로 학교생활의 패턴이었다. 이기는 것이 미덕이었다. 미덕은 다른 사람보다 크고, 힘세고, 잘생기고, 돈 많고, 인기 많고, 우아하고, 비양심적인 것이었다. 즉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바보처럼 만들고, 모든 면에서 그들을 앞서는 것이 미덕이었다. 삶은 위계였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옳았다. 강자는 이기는 것이 당연하면서 실제로도 항상 이겼고, 약자는 지는 것이 당연하면서 항상, 언제까지나 졌다.
--- 「즐겁고도 즐거웠던 시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