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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

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

시인동네 시인선-150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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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4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88g | 125*205*8mm
ISBN13 9791158965112
ISBN10 115896511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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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나뭇가지들이 창문을 두드렸답니다.
눈 내리는 바깥을 물끄러미 내다보았을 뿐이랍니다.
밤새 불그레한 커튼이 풍경을 가리고
보랏빛 고양이가 울어댔다고 합니다.
후두에는 하얀 가시들이 박히고
목구멍은 안단테와 알레그로를 감금시켰을 겁니다.
가슴은 뻥 뚫려 공기를 압축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주말 공연을 환불한 프리마돈나 Q는 백신을 거부 중이며
환각 여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주에서 수십 광년 날아와 눈송이로 침투하는
미확인 우주요정(UFE)의 소행임이 밝혀졌는데요.
삼류 시인을 비롯해 화가 만화가 단역배우 SF작가 게이머 등등
각기 다른 증세를 보이는 것 또한 미스터리한데요.
이들 중 시인 몇은 자신의 종적을 지워버리기도 했다지요.
그 행성에서 지구인의 특정 영혼을 수집해 간다는
충격적 소문이 쏟아지는 오늘밤,
당신의 텅 빈 영혼을 한번 살펴 보심이
--- 「눈 내리는 감염주의보」
―――――――――――――――――――――――――――――

어쩌다 가본 단추백화점이라는 곳. 별의별 단추, 얼마나 많은 실, 색상과 모양이 교차하는 옷가지와 섶, 존재 이유가 분명한 구멍들, 언저리를 매김할 바늘들이 필요할 것인가. 손에서 뻗어 나와 손가락 벼랑에 매달린 지문을 문질러가면서, 몇 줄 끄적대다가 덮어놓은 게 있는데,

시의 소재가 궁했던 참에 눈이 번쩍 뜨이는 거 없을까 뒤적이다가, 장롱에서 삼십 년 잠에 빠진 붉은 가죽치마, 왼쪽 엉덩이에 붙어 있는 불가사리 뿔단추, 아직도 주름이 탱탱한 입술 하나를 찾아냈다.

둘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구나. 가까이 있어도 손을 잡지 못하는 사이처럼, 하지만 서로 저 홀로 빛나는구나. 다시 들여다보니, 눈 하나가 빼꼼히 째려본다. 내 눈이 응답하듯 저절로 깜박거려졌다. 눈과 눈이 만나는 허공에 실오라기 몇 개 떠올랐다.

그 눈을 갖다 대고 창밖을 본다. 멀리 있는 것들이 진눈깨비를 맞으며 반짝거린다. 가슴께에서 꾸부정 걸어 나오는 나도 보인다. 단추를 끼워 보려다 말고 슬그머니 여인의 침상 위에 그 옷을 펼쳐놓았다
--- 「단추의 눈」
―――――――――――――――――――――――――――――

내게서 멀리 있는 계절에 머물러 주는 당신이 고맙던 시절이 있었다

일기장 속에 아직도 까슬하게 살아있는 당신의 테두리

저문 밤 부칠 데 없는 이름 몇 개 달빛에 실어 날려보낸다

너의 길목을 서성거리며 긁적인 문장들이 오늘에야 되돌아오는데

이토록 선명하게 찍혀 씻기지 않는 지문처럼 당황스럽던

젊은 날의 소인(消印)이여
--- 「우표」
―――――――――――――――――――――――――――――

내 뜨거운 눈물일지라도 알레르기일지라도 내 몸은 좁은 관을 매달고 뚝뚝 떨어지는 이 정체 모를 수액을 샅샅이 받아낼 심산이다. 나는 슬픔의 부족들이 종신형을 살고 있다는 마을로 숨어들 것이다. 몇 사람이 어둑어둑 이쪽으로 걸어온다. 지나치면서 보니 거꾸로 서 있는 나무들이다. 뿌리들이 붉은 운무를 빨아먹고 있는. 그 사람들을 애타게 찾는데 새들이 날아오르고 푸른 안개가 빈 둥지를 틀고 있다. 어떤 동굴 속으로 들어가니 내가 찾는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울고 있다. 또 나무들이다. 머리가 아파서 나는 노래를 불렀다. 잠 속이 아니었는데 심박 소리가 마구 흔들어 깨웠다. 찢어진 손목 혈관에서 검은 벌레들이 뚝뚝 떨어졌다.
--- 「제목을 붙일 수 없는」
―――――――――――――――――――――――――――――

나는 꺼이꺼이 울었지
태어나기도 전에 배운 방법으로
세상 처음 나올 때
숨을 헐떡이는 방법으로 젖을 빨고
더듬는 방법으로 말을 익히고
매 맞는 방법으로 싸움을 했지
꽃의 방법으로 잠시 피었다가
그 방법으로 떨어졌지
흐르는 것 강물의 방법이지만
나무들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우두커니 강가에 서 있고
나는 작은 언덕을 오솔길의 방법으로 올라
호수에 비친 구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
일억 광년 은하수 마을을 띄운 것은 하늘의 방법
아니 그건 내가 하늘을 바라보는 방법
달이 자신의 뒷모습을 감추고 있는 방법은 비밀이므로
나는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밤 누가 내 삶의 쓸쓸함을 묻는다면
태어나서 처음 배운
눈물을 글썽이는 방법으로
그것이 굳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방법으로
--- 「생존을 위한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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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섭 시인은 늘 20대의 모습으로 내 안에 거주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보다 훨씬 젊다. 심드렁하니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다가도 호기심이 발동하면 그의 감각과 상상은 끝없이 팽창한다. 영락없이 소년의 스텐스다. 이렇게 포획된 삶의 목록들은 치밀하지만 비지시적이고, 탐색적이지만 어느 일방에 치우치지 않는다. 어쭙잖게 치장하거나 기만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의 렌즈를 통해 극화된 원초적 프레임들의 연쇄가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로 잘 짜진 ‘조화롭고 멋진 세상’의 겉과 속을 헤집어 놓는다는 것이다. 이 감각과 상상의 사유지에는 아직 저물지 않은 기억들이 온통 은유와 상징으로 두근거린다.
- 이창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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