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그렇다는 말이 아니잖아. 어떤 말도, 모든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아. 어머니가 있어도 아이를 싫어할 수도 있고, 방치할 수도 있어. 어머니가 수호신이 아니라, 악마 같은 집고 있을 거고. 아동 학대 사건을 봐. 얼마나 많아... 너무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마. 세상에 너보다 힘든 일을 겪는 사람도 많으니까. 인생은, 어머니란 존재 하나로 천국이 될 만큼, 녹록지 않아.”
해인이 흥분하는 바람에 우연도 휩쓸리듯 남편의 말까지 빌어 대꾸하고 말았다.
“그게 아니야, 우연아. 어머니가 있는 집이 천국이고, 세상의 모든 집이 천국인데 나만 지옥에 있다는 게 아니야. 그렇게 과장할 생각 없어. 엄마도 없으니 얼마나 불쌍해. 나 좀 동정해 줘.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니까.”
친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게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야. 어머니가 있는 집은 알록달록 색이 칠해져 있고, 우리 집은 무채색이었다는 얘길 하는 거야. 똑같은 세상인데, 완전히 달라. 남들은 자꾸만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해. 너무나 쉽게 그런 말을 해. 별 차이 없어. 별 거 아니야. 더 불행한 사람도 있어, 더 불쌍한 사람도 있어. 그게 아닌데. 내가 불행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닌데. 단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것뿐인데... 어머니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 어떤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진짜 사랑을 받아 보고 싶었어.
--- 「1 낙산사 홍련암 - 진짜, 사랑을 찾다」 중에서

문은 세계를 이어 주는 통로라는데... 그것은 게임을 하다 터득한 이치였다. 게임은, 하나의 레벨에서 다음 레벨,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려면 대부분 문을 통과해야 했다. 어찌 보면, 괴물과 싸우고 레벨을 올리고, 이런 것들이 오로지, 문을 열기 위한 과정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난관이 크면 클수록, 더 큰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이 열렸다.
그러나 이 문은 고시원에 딸린 객실의 문이었다.
냉혹한 현실의 문. 그것을 넘는다고 해서, 결코 레벨이 올라가지는 않을 문.
건너편은 휑한 방뿐이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아무리 어렵게 문을 젖히고 들어가도, 서너 평 남짓한 방과 화장실 한 칸이 전부일 뿐. 살림이라고는 미니 냉장고와 텔레비전, 2단 서랍장이 있고. 그에 더해, 이불 세 채와 옷가지들, 간단한 먹거리가 담겨 있는 사과 박스, 그릇 몇 개와 김 노인 몰래 감춰 둔 휴대용 가스버너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문은 시치미를 뗀 채, 버티는 듯했다.
잠시 문을 노려보던 청연은 호흡을 가다듬은 후, 재차 달려들어 문짝을 위로 들어 올렸다. 문이 들렸는지 모르겠지만 악이 받쳐 대고 몸으로 밀어붙였다.
--- 「2 선운사 참당암 - 낯선 문을 열다」 중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주차장을 돌아보니, 참으로 대단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난생 그런 구경은 처음이었다.
주차장에는 이미 관광버스가 열 대 가까이 두 줄로 정차해 있었다. 그리고 관광버스를 타고 온 승객들이 동그란 간이 탁자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수백 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회색 법복을 입고 있었다. 원래 아는 사이들인지, 보살 같은 여인들은 식탁을 차지하고는 웃으며 식사 중이었다.
식사가 끝난 테이블이 있으면, 버스 앞에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냉큼 달려가, 테이블 위의 쓰레기를 깨끗이 쓸어 버렸다. 그리고 횟집 테이블에 덮는 것 같은 얇은 비닐을 걷고, 동그란 상판과 다리를 접어 버스 아래 짐칸에 넣었다. 켜켜이 포개 놓은 파란 의자들도 함께 짐칸으로 사라졌다.
그 과정이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두 이런 여행이 몸에 익은 듯, 승객들도, 기사들도 일사천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인섭과 강 회장은 그 광경이 마냥 신기했다.
그리고 어느새 인섭은 그들 속에서 아내를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엔 여인들을 구경할 뿐이었으나 나중엔 그 속에 부인이 있는 양, 저도 모르게 부인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낯선 여인과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들 단체로 오는구만.”
강 회장도 기가 질린 듯 겨우 한마디 했다. 그는 단체로 버스를 타고 온 여인들이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기개가 늠름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그들의 합장한 두 손에... 아들의 결혼이며, 딸의 취직이며,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 모두 달려 있을 것이다.
--- 「3 남해 보리암 - 마지막 소원 하나」 중에서

그랬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자식이 부모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게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잘 착각한다. 자식은 철이 없어 부모를 싫어할 수 있어도, 부모가 제 배로 낳은 자식을 싫어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옥자는 그것이 사람들의 착각임을 안다. 부모도 사람이다. 물론 대부분은 대가 없이 자식에게 내리 사랑을 베풀겠지만, 부모에게도 엄연히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 그리고 깨물면 덜 아픈 손가락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마치 여섯 번째 손가락이라도 돋은 양, 아예 없었으며 하고 바라는 미운 손가락도 있는 것이다.

남편은 큰딸을 예뻐했으며, 둘째를 미워했다. 그 차가 너무 심했다. 옥자는 그 이유를 처음에는 딸들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사랑 받을 행동을 하는 첫째와 미움 받을 행동을 하는 둘째 탓이라고.
남편은 가부장적 사고가 완전히 밴 사람이었다. 낳고 길러 준 아버지로서, 마땅히 자식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큰딸인 가희는 아버지의 그런 기대에 부응했다. 심지어 그녀는 엄마보다 아버지를 좋아했고,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었다. 남편도 가희에게는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반면 서희는 그렇지 않았다. 둘째는 아버지라면 질색을 하고 펄펄 뛰었다. 남들이 보면 친부가 아니라고 의심할 만큼, 그녀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때문에 남편도 서희를 미워하는 것이리라. 처음엔 이렇게 딸들의 태도 때문에 남편이 가희와 서희를 차별한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진실을 알게 되는 기회가 오고 말았다.
아버지와 딸의 지독한 반목과 대립이... 바로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 이라는 진실을. 그것을 알 게 된 때의 충격을 옥자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b>나에게 온 가족, 나와 이어진 가족에 대한 인연의 이야기</b><br/><br/>‘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구절을 조금 변형한 말들도 여러 번 들었다.<br/>‘처음’이란 말에는 모르는 것에 대한 낯설음과 두려움이 담겨 있다. 혹은,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예고와 더불어 너그럽게 봐 달라는 부탁도 담겨 있는 듯하다.<br/>그러나 한편으로는 ‘처음’이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 기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으로 겪는 생이니, 얼마나 신기한 일들이 많을 것인가.<br/>낯설음과 두려움. 궁금증과 호기심. 기대감과 희망. 이런 것들이 ‘처음’인 것에 대한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br/>반면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은 그냥 지나쳐 버린다.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은 관성으로, 습관적으로 대하고 어림짐작으로 넘겨 버리고 만다.<br/><br/>이런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낯선 존재를 보며 익숙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가족’이다. <br/>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처음으로 겪어 보는 이들이야말로 ‘가족’이 아닌가.<br/>이번 생도 처음이지만, 나의 가족도 처음이다.<br/>세상에 이런 아버지, 어머니도 처음이고. 이런 형제, 자매도 처음이고. 이런 아들, 딸도 처음이다.<br/>그들은 참으로 신기한 존재들이다. <br/>생각해 볼수록 신비롭고, 또 신기한 인연이다.<br/><br/>가족은... 태어나자마자 부대끼며 살아야 했기에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늘 집에서 만나는 사람들. 같은 공간에 없어도 어딘가 나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존재들. 그들에 대해 훤히 잘 안다고 생각했다. <br/><br/>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br/>나는 그들에 대해 모른다. <br/>잘 모르는 것 같다.<br/>부모가 어떻게 서로를 만나, 가족을 꾸리며 살아왔는지.<br/>나의 형제, 자매는 왜 이리도 나와 비슷한 생김새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br/>나에게서 나온 자식은 또 왜 이리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인지. <br/>하나도 모르는 듯하다.<br/><br/>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족은 참으로 색다르고 처음 겪어 보는 존재들이다.<br/><br/>인연... 처음으로 만나는 타인... 낯선 이별...<br/>그 원초적 뿌리, 감춰진 줄기의 시작은 역시 ‘가족’이다.<br/><br/>그리하여 ‘인연’ 시리즈 두 번째 책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 듯하다.<br/>가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익숙한 존재가 아니며,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들은 알려 준다. 여기 실린 소설처럼, 낯설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존재이며, 함께 살았으나 잘 몰랐던 존재들일 뿐이다.<br/><br/>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이 책을 읽으며, 가족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나마 달라지길 바라 본다. 혹은, 그들을 조금 낯설게 봐 주길 바란다. 그 인연의 신비로움을 알아보게 되길 바란다.<br/><br/>가장 익숙한 얼굴에서 발견하는 가장 낯선 모습... 그 신비한 아름다움을 느껴 보게 되길...... .<br/><br/><br/>"두 번째 책을 내면서 뜻밖의 경험을 했습니다.<br/>솔직히 절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경비와 시간과 체력만 갖춰진다면 가지 못할 곳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br/>최우선으로 필요한 것은, 가고자 마음을 먹는 일이었으니. 여러 사찰을 검색하며 어디로 가나, 궁리만 할 뿐이었습니다. 외진 곳에 있거나 험난한 산행까지 해야 하는 곳들이 많지만, 가 보자 작심하면 모두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습니다.<br/><br/>그런데 진작 가 보고 싶었던 곳을, 서너 번이나 출발 직전에 물러야 했습니다. 고창 선운사를 가기 위해 몇 번이나 벼르고 준비했지만... 폭설과 같은 기상 악화, 여러 가지 돌발 상황이 생겨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계획을 세운 지, 서너 달이나 지나서야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br/>대웅전 뒤 동백 군락에 꽃망울만 맺혀 있던 이른 봄. 겨우 그곳을 찾았는데, 거기서 소중한 인연의 이야기를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br/>그제서야 그 모든 일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이 이어지고 엮이어, 일어난 일 같았습니다.<br/><br/>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절이지만, 그곳에 발을 딛는 일은 인연의 실타래가 이어져 있어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br/>이름난 큰 절이나, 동네의 작은 절, 외따로 떨어져 있는 오래된 사찰들... 수많은 도량 중에 결국 자신과 인연이 닿은 절이 있는 듯합니다.<br/>그리고 절을 만나는 일이 이럴진대, 사람 간의 만남은 얼마나 신비하고 경이로운 인연인지,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br/><br/>부디 여러분들도 인연이 닿은 소중한 곳, 인연이 엮인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길 바라 봅니다. 그리고 그 인연이 아름답고 오래 이어지길 바랍니다. <br/><br/>그렇게 이어진 인연의 길목에, 이 책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br/>그런 바람을 가지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br/><br/>-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