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쓰는 게 재미없다면, 스스로 재미를 느낄 만한 걸 써보지 그래요?”
머릿속에 세계지도가 떠올랐다. 흰 여백으로 남아 있는, 20년 전에 샀을 때처럼 여전히 내 연필로 칠해지길 바라는 세계지도. 그 지도는 멕시코부터 브라질까지 자신의 일부분이 내 연필로 채색되길 바랐을 것이다. 그래, 나는 언제나 중남미에 가보고 싶었다. 그곳은 미지의 세계였고,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니까. 즉석에서 대답했다.
“그럼, 중남미 기행문은 어떨까요? 써봐야 알겠지만요.”
(……) 그리하여 나는 3주 후인 2019년 7월 2일, 멕시코시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고작 5일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내가 지낸 5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왔다. 나는 아마존이나 사바나 기후의 손아귀에 있는 줄 알았지만, 멕시코시티도 그 손길 아래 있는 듯했다. 하지만 누구도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렇기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아! 또야’ 하는 심정으로 3단계 행동을 취한다.
a. 바닥에 앉거나, 벽에 기댄다.
b. 전날 밤 숙면을 하지 못한 누군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제일 먼저 바닥에 벌러덩 눕는다.
c. 그럼 그 누군가의 친구가 의리상 따라 누워주고, 그 분위기에 한두 명 눕다 보면 어느새 절반(에서 8할) 이상이 드러눕게 돼버린다.
놀랍게도, 이 과정이 십 분 안에 일어난다. 마치 사바나 여신이 대기에 마취 가스라도 살포한 듯, 어느새 하나둘씩 쓰러져, 결국은 대형 침대식 DVD방이 된다.
--- 「멕시코, 「4회 얼굴의 일부」 중에서
이 문장을 쓰자마자 새로운 행상이 “올라(안녕하세요)!” 하며 다가와 악수를 건넸는데, 해보니 손이 매우 끈적끈적했다(혹시 꿀장수이신가요?).
너무 끈적해 글을 쓸 수 없을 지경이라, 손을 씻고 돌아왔다. 아마 그 행상의 손은, 겨울철 과메기가 추위에 얼었다가 햇빛에 녹았다가를 반복하듯, 땀으로 젖었다가 말랐다가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의 손에서 하루 치 땀의 역사를 느꼈다. 콜롬비아인들은 참 열심히 일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는 길을 가던 나를 종업원이 강권하다시피 끌어당겨 앉힌 곳이다. 메뉴를 펼쳐보니 종업원은 손가락으로 “이거 먹어! 이거!” 하며 파인애플 주스를 가리켰는데, 마셔보니 너무 맛있다. 43년을 살면서 파인애플 주스가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다.
‘나뚜랄 후고(천연 주스)’라 했는데, 주스 윗부분에 질 좋은 맥주의 크림 같은 거품이 떠 있다. 태어나서 먹어본 주스 중에 제일 맛있다. 콜롬비아인들의 강요는 ‘어. 어. 이거 아닌데’ 하며 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좋다.
“무차스 그라시아스(매우 고마워요)!” 호구를 위한 나라인 것 같다.
--- 「콜롬비아, 「17회 흔치 않은 날」 중에서
나는 마추픽추를 보며 ‘이건 잉카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감탄했다. 무슨 말이냐면, 만약 미국인이 이곳에서 무언가를 했다면, 아마 일단은 군사 기지를 지은 후 당신들을 지켜줄 테니 방위비를 달라고 했을 것이다. 독일인이라면 이 천혜의 자연 공간에 수도원을 지은 후, 수도승들에게 안데스산맥에서 내려오는 물로 맥주를 잔뜩 빚게 했을 것이다. 일본인이었다면 3대에 걸쳐 오랜 시간 고민한 후, 3대손은 게이오 대학까지 졸업시킨 후 결국 라멘집을 곳곳에 열었을 것이다. 중국인이라면, 이 거대한 공간에 ‘음. 좀 좁은데……’ 하며 일단 차이나타운부터 지었을 것이다. 물론, 언덕 입구에 용이 새겨진 빨간 대문을 세우고, 벽마다 ‘복(福)’ 자도 크게 써 붙이고, 하늘에는 연등도 매달아놓고, 말이다.
그럼 한국인은? 이때껏 언급한 미국인과 독일인과 일본인과 중국인들에게 월세를 받고 있을 것이다. 2년마다 20퍼센트씩 꼬박꼬박 인상해가며. 잉카인들을 관광버스에 태워 시원하게 ‘효도 관광 코스’로 모신 후, “어머님, 아버님. 이 값이면 저희가 후하게 쳐드리는 겁니다” 하며 헐값에 땅부터 사들여서 말이다.
그러니 마추픽추는 잉카인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고집스레 털로 짠 옷을 겹겹이 껴입고, 등에 아기를 보자기로 싸서 매고 다니고, 햇빛에 피부가 갈라질지언정 또 거리에 나와 수공예품을 팔며 살아가는, 이 소박하고 우직스러운 잉카인이 아니었다면, 그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 「페루, 「25회 마추픽추」 중에서
지금은 쉬고 있지만, 나는 9년간 밴드 ‘시와 바람’의 보컬로 활동했기에, 나름대로 소리에 민감하다. 그렇기에 커피숍으로 피신을 했는데, 도대체 어떤 스피커를 쓰는지 실내에서 그의 저음이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스으으으 떼에에에엥 바이이이이 뮈이이이이.” (다시 말하지만, 스탠 바이 미.)
그런데, 힙스터로 보이는 칠레의 젊은 커플은 그 음정 박자는 물론, 발음마저 어색한 [Stand by Me] 중에서를 커피숍에 앉아 따라 흥얼거렸다. 업소 주인도 흥얼거리며, 커피를 내렸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점검하던 바리스타도.
나는 ‘아. 역시 독재 정권을 견딘 시민들은 뭐든지 잘 견뎌내는 구나’ 하며 새삼 감탄했다. 내가 틀렸었다. 남미 여행을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빠시엔시아(Paciencia, 인내심)’가 아니라, 모든 것을 즐길 줄 아는 자세였다. 소음 같은 음악도, 추위도, 그리고 냉수 샤워마저도.
아마, 산티아고에서 ‘시와 바람’이 활동했다면, 그들은 우리 노래도 흥얼거리며 따라 불러줬으리라. 참고로, 우리의 마지막 공연에는 관객이 두 명 왔다. 아울러, 우리가 9년간 받은 호응 역시 저 중국인 가수보다 적었다.
잠깐 쓰다 말고 눈물을 닦고 왔다.
--- 「칠레, 「27회 산티아고 시민의 아량」 중에서
그들은 자기 생에 충실했다. 적어도 내가 공연을 본 삼십 분 동안만큼은, 한순간도 충일하지 않게 노래하고 춤추고 연주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직업 예술인이다. 그렇기에 창작은 물론, 창작에 관련된 모든 행위가, 이를테면 ‘삶을 위한 쟁기질’이 돼버렸다. 그렇기에 쟁기질이 즐겁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지난 10년 동안 매일 똑같은 밭에 나가 온종일 밭을 갈았는데, 그것이 어찌 마냥 즐겁기만 하겠나. 하지만, 이들에게는 진정으로 즐거운 것이었다.
200자 원고지 한 장에도 돈을 받고 쓰는 나와, 출연료도 없이 거리에서 겨우 동전 몇 닢을 받으며 웃음을 잃지 않고 춤추며 노래하는 이들 중, 과연 프로는 누구인가. 과연 직업 예술인은 누구인가. 기타를 치는 저 손가락은 거의 얼어갈 텐데, 어찌 얼굴에선 웃음꽃이 시들지 않는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자 기쁨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 「칠레, 「31회 유랑 악단처럼」 중에서
어제는 왕가위 감독이 [해피 투게더] 중에서를 찍은 바 ‘수르’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탱고 쇼를 봤다. 오늘 낮에는 마라도나가 뛰었던 ‘보카 주니어스’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보카 지역에 가서 안심 스테이크를 먹으며 탱고 쇼를 봤다. 모든 게 너무 영화 같다.
내가 자는 곳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겪은 1930년대의 영화(榮華)가 한차례 만개한 뒤 남겨진 쓸쓸함이 있고, 커피를 마시는 ‘토르토니’에는 1800년대 중반부터 간직해온 시간을 미래 후손에게도 물려주고자 하는 열의가 있다. 스테이크를 먹었던 ‘라 보카(La Boca)’는 마라도나가 뛰었던 80년대의 번영이, 바 ‘수르’에는 [해피 투게더] 중에서를 찍은 90년대 후반의 적요한 정서가 녹아 있다. 나는 이 시간이 밴 장소들을 불과 몇 걸음 만에, 때로는 몇십 분 만에, 며칠 내내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보르헤스가 그토록 많은 글을 썼지만, 간결함을 신봉해 결코 긴 글을 남기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은 나도 짧게 남기려 한다. 이렇게 쓴 이유는 사실 이 도시에서는 즐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가인 보르헤스 역시 실은 이 이유 때문에, 긴 글을 쓰지 않은 게 아닐까 싶다. 이 도시에서는 장편소설을 쓰기 어려울 것 같다. 이런 도시에서 방에 처박힌 채, 온종일 긴 글을 쓰며 씨름하는 것은 ‘탱고를 보지 않는 것’에 비견하는 범죄일 것 같기 때문이다.
--- 「아르헨티나, 「35회 보르헤스처럼」 중에서
코파카바나의 하늘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 멀리 바다 위에 섬이 떠 있고, 왼편에는 뿌연 물안개 뒤로 산과 섬들이 보이고, 그 위로 햇빛이 희붐하게 쏟아졌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도 아니었고, 한 시간 동안 파도에 역행한 탓에 지쳐서도 아니었다. 지난 10년간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큼은 부끄럽지 않도록, 한다고 해왔는데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지내는지 그 이유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만이 내 일상이 돼버렸다.
이번 여행을 왜 왔는가. 중남미가 궁금해서? 한 번은 와보고 싶어서? 여권에 도장을 좀 더 찍고 싶어서? 언젠가 내 소설의 소재가 될 것 같아서? 코파카바나의 하늘을 보고 있으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더 잘 살고 싶어서 온 것이다.
--- 「브라질, 「40회 해변에 누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