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은한 살들의 피어나는 기쁨을 위하여
어느 시인이 말했다. “연인의 살은 측은하다.”라고.
인문학자이며 철학자인 김영민 선생님은 [사랑 - 그 환상의 물매 2004]에서 ‘측은한 에로티시즘’을 권한다.
“낮은 시선, 혹은 낮은 손가락 아래에서 보이고 만져지는 연인의 살은 측은하다. 어떻게 보아야 할지, 어떻게 만져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 살은 (절대) 타인의 손길 아래에서 너무나 쉽게 허물어지고 왜곡당한다. 도대체 내 연정을 증명할 수 있는 살-만지기라는 것이 있겠는가? 도대체 연정과 살 사이의 매개를 표준화시킬 ‘화폐’와 비슷한 것이 있기라도 하겠는가? 그 어떤 부드러움, 그 어떤 섬세함으로써 연정이 만지기, 보기, 그리워하기로 환원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그 살을 만지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대체 무슨 ‘마음’을 먹어야만 내 연정의 온건함이 증명될 수 있겠는가? 혹 그것은 ‘측은한 에로티시즘’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시대의 파멸을 도도한 에로티시즘 속에서 슬몃 확인한다.)”
[사랑 48-49p]
10여 년 전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연인의 살은 측은하다’라는 대목에서 그냥 멈추어 울고 말았다. 많이, 꺼이꺼이 울었었다. 일단 몸부림치며 실컷 운 다음에, 다시 반복해서 글을 읽었다. 답이 보였다.
바로 그 답이란 ‘측은한 에로티시즘’이었다. ‘측은한’의 의미는 존재론적인 의미였다. 나의 존재, 너의 존재가 총체적인 존재이기에 ‘살’로서 다 채워질 방도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인, 부부, 섹스 파트너, 성매매 당사자, 범죄자까지도 도저히 채워질 수가 없다. 이미 사람은 털이 없는 몸과 마음, 정신(영혼)을 득템해버린 3중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 연인, 타인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측은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상적이고 불확실한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 차라리 실제적이고 명백한 ‘측은한 마음’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기술적인 오르가즘을 넘건 말건, 존재 자체에 연민이 기초되어야 그나마 잠시라도 ‘하나’임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10년 넘게 (사)푸른아우성에서 함께 활동했던 3명의 후배들이 책을 만들었다. 이 3명의 공동 저자들은 수많은 상담과 현장 성교육을 해온 베테랑들이다.
김영민 선생님은 젊은 지인들과 대화를 하는 중에 단서를 얻어 ‘도도한 에로티시즘’에서 시대의 파멸을 ‘슬몃’ 보았다고 하였다. 이 후배 저자들이 성상담과 교육현장에서 좌절하며 몸부림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도도한 에로티시즘’에서 시대의 파멸을 ‘슬몃’이 아니라, ‘확실히’ 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특히 디지털 문화 속에서 ‘보여주는 것’을 기준으로 삼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보여주는 삶’으로 젖어든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성취도, 그냥 온몸으로 몰입하여 성취하는 게 아니라, 그 노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몰입하고, 그 비교치를 기준으로 인정과 평가에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최근의 2030의 연구를 보면 여성의 우울증이 3배 이상 급증하고, 남성의 무력감이 기본 정서로 깔려있다고 한다. 더 ‘측은해져 가는 존재감’이다. 그런 와중에 살들의 만남과 다룸도 더 헝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존재감과 문화 속에서 어떤 길을 찾아야 할까? 심호흡을 하며 그래도 찾아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살’이 있기에 살아있는 사람인데, 그래서 ‘살’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상담과 교육은 솔루션의 세계이다. 40만 건이 넘는 상담의 세계에서 꾸역꾸역 디테일한 솔루션을 마련해 온 후배들이, 정성들여 그 솔루션을 정리한 책을 만들었다. ‘화폐’와 같은, 살들의 만남을 위한 표준화된 매뉴얼이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나는 파트너끼리 만들어내는 것이 진짜 매뉴얼이지 않겠는가? 이 책은 그 파트너들끼리 스스로, 그때마다 맞춤 매뉴얼을 만들어보라고 격려하면서, 참고 사항을 알려주는 조언의 책이다.
야동 문화가 무엇을 빼앗아 가는지,
속살들의 만남을 어떻게 방해하고 있는지,
그 조언을 보며 따져보라고 한다.
파트너 각자에게 걸려있는 ‘살 만남’의 장애물은 무엇인지 살펴보라고,
상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체크 리스트를 통해 확인해보라고,
자신의 느낌과 요구를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할지, 배워보라고 한다.
<느리고 아름답다>는 서로의 몸의 차이를 호기심 넘치게 탐구하며, 순진하게 맞춰 보면서 점점 즐거움의 깊이를 더해가라고 방법을 알려준다. 이 모든 것을 요란하지 않게, 또 요상하지 않게, 밝은 기운에서 펼쳐가는 책이다.
아무쪼록 여러모로 존재감이 낮아지고 우울해지는 시대에, 서로를 그냥 측은하게 보면서, 고운 살들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토닥여주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결국 ‘측은한 살’들이 기쁨으로 꽃 피었으면 여한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