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를 읽었을 때 내 시선은 옮긴이 소개에 오래 머물렀다. 거기 이런 말이 있었다. “통증 때문에 삶의 위기를 겪으면서 고통과 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의아했던 것 같다. 고통과 어떻게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지? 물리치거나 삼켜지거나 둘 중 하나 아닌가? 이후 메이님이 옮기고 쓴 글을 찾아 읽으면서, 그가 심각한 만성통증을 겪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물리칠 수 없지만 삼켜질 수도 없는 아픔. 나는 언젠가 메이님이 직접 쓴 아픈 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그 글을 받아서 읽으며 그에게 일어나 앉아서 아픔에 관한 글을 쓸 수 있도록 나아진 컨디션을 허락한 그의 몸에게, 통증에게 감사한다. 만성통증을 겪는 사람의 말은 이중으로 억압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을 남에게 언어로 전달한다는 것이 애초 불가능하거니와, 우리 건강한 사람들은 아픈 사람이 이십사 시간 아픈 이야기를 이십사 시간 듣고 싶어하지 않기에 아픈 사람이 입을 다문다. 그렇지만 고통은 실재하고, 아픈 사람도 실재한다. 그것을 알려면 누군가는 말해야 하고, 누군가는 들어야 한다. 하지만 뜻밖에 이 책에서는 웃게 될 순간이 많을 것이다. 동료 병자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 병자의 인간관계에 관한 글 등은 쉴새없이 웃기고 울린다. 누구나 아픈 몸이 삶을 구석구석 호령하는 상황을 짧게라도, 혹은 늙으면서 겪는다. 병자의 왕국으로 먼저 건너간 사람 중에 이토록 유창한 안내자가 있다니, 우리는 운이 정말 좋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나는 언어의 불가능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