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는 순간, 화려한 색감으로 칠해진 군상들의 분노, 절망, 희망에 가득한 얼굴들과 마주할 것이다. 어떤 그림은 낯설기도 하고 어떤 그림은 익숙하다. 그러나 이 그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림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들과 그들 재일조선인이라 불리는 미술가들의 고뇌를 말하는 연구자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다가, 다시 그림들을 펼치고 이번에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미술사 연구자 백름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들의 흔적을 무려 20년간의 연구를 통해 ‘발굴’해냈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강렬한 그림들, 이 그림들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제주 4·3, 한국전쟁, 4·24 한신교육투쟁, 귀국운동,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등 한반도와 일본의 격변 한가운데에서 재일조선인미술가들이 어떤 고뇌와 씨름했는지 사료와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다. 또 이들이 단순히 ‘그리고 전시하는 일’에 머물지 않고 일본과 한반도의 변화를 위해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펼쳤음을 증명한다. 한편, 그러한 시대를 살았던 재일조선인들의 폭발하는 듯한 긴장과 열정을 연구자 백름은 지극히 냉정하게 또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연구자 스스로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졌으며 그가 연구하는 대상이 자신의 ‘지금’을 만든 선대들이라는 자각에서 오는 조심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재일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 무지가 만연한 곳이 현재의 일본과 한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깊이 이 책을 읽다 보면 글 저변에 깔린 저자의 자신감과 확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백름은 이 연구를 통해 재일조선인미술가들이 올바른 역사적 위치를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점으로 산재한 이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는 이 작업이 결국 남과 북, 일본이 잊고 있는 소중한 무언가를 깨닫게 해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과제가 흥미진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언젠가 남과 북, 일본에 흩어져 있는 그들의 그림이 한 장소에서 전시될 날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