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시인.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시 부문)과 2015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중편소설 『짐승처럼』, 장편소설 『최선의 삶』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 등을 펴냈다. 신동엽문학상·문지문학상·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사람의 입술이 식물의 잎사귀와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다. 화분에 꾸준히 물을 주고 잎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닦아주는 일이 식물의 언어를 경청하는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 있다. 그런 태도로 타인의 언어를 경청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런 사랑을 타인에게 주고 싶다고 꿈꾼 적 있다. 식물을 돌보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랬다. 선우는 꿈으로만 남겨져 있던 나의 소원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주제로 다룬 책을 참 많이도 찾아 읽어왔으나, 이 책은 유독 사랑이 가득하다. 선우를 통해 나는 다시금 배웠다. 타인의 언어를 점령하지 않는 사랑을. 이 세계에 도사리는 숱한 오해들을 물리칠 힘을 키워나가는 사랑을.
윤미는 그순간 자신의 결을 스쳐 가는 꼬마만큼이나 속이 좁은 자그마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윤미가 가끔 속이 좁아질 때마다 지윤은 그 사실을 건조하게 윤미에게 알렸다. 윤미는 또 트리거가 작동됐구나 알아채며 머쓱해했다. 지윤은 그럴 때마다 윤미의 손을 잡았다. 윤미는 지윤을 만나고서야 자신에게 덜 자란 면들이 많다는 것과 그것들이 어떨 때에 유독 발현되는지를 잘 알게
서린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활짝. 얼굴의 모든 부분이 찢어지고 팽창하듯. 자인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뱃 속에서 그날 먹은 분홍빛 술과, 온갖 재료가 들어간 듯한 일식, 그리고 금옥이 싸온 도시락의 기름진 반찬까지 섞인 트림이 올라왔다. 역했다. 역하구나, 나는. 그것이 자인이 마흔 살 생일에 깨달은, 진리였다. 그리고 예감했다. 자신은 이미 태인을 버렸으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자인은 생각하곤 했다. 그때 자인이 했던 말 때문에 태인이가 잘못된 건 아닐지. 아니, 태인이 아니 자기가 그때부터 잘못된 건 아닐지. 태인을 끔찍이 사랑한다면서 태인이 누군가를 사랑할까봐 미칠 듯이 두려워하는 금옥을 사실 자인은 누구보다 이해했다.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임신 테스트기에는 한 줄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둥글게 몸을 부풀리고 있는 비둘기가 여전히 그르릉 그르릉 소리 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고양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비둘기였고 나는 처음부터 고양이라고 생각하다 비둘기를 보자 비둘기도 고양이도 털이 있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둥글고 왜 인지 둘 다 그르릉 그르릉 소리를 내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비둘기를 고양이로 옮길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 비둘기는 이전처럼
방금 지나쳐버 린, 아주 짧은 '우리'였던 순간에 기꺼이 연루되어보기를 청한다. 개체적 존재 이전에 '우리'로서의 관계가 무수하게 선행하고 있음을 이 소설은 아름답게 환기시킨다. 나아가, 이 세계 모든 존재 혹은 차창 바깥의 근경과 원경이 사실은 하나의 세계에 속한 비밀이이고, 그렇기에 흔들리는 열차 안의 유리는 조금은 안심해도 된다고 귀뜸하고 있는 것이다.
애리는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익히지 않은 감자를 굳이 먹는 사람은 없다는 것쯤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리는 입을 벌려 내가 먹던 건 사과라고보여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과를 감자로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과가 사과임을 증명하는 일을 싶지는 않았다.
애리는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하든 어디에서 살아가든 자신은 잠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선호에게 직접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잠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고, 나는 그러한 공간이 있고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바다가 잘 보이는 방에서 아침을 맞이할 때도 언제나처럼 애리의 잠은 단단하고 부드럽게 애리를 지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