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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라블레
Francaois Rabelais
국내작가 문학가
출생
1494년 출생
사망
1553년 사망
작가이미지
프랑수아 라블레
국내작가 문학가
프랑스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꼽히는 작가. 서프랑스 쉬농 근처 라드니비에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변호사인 앙투안 라블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10년경 프란체스코수도회 소속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보수 교단이어서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에 맞지 않았고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에도 미흡했다. 지식욕이 강했던 라블레는 법률과 신학을 공부한 다음 의학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성직을 떠나 몽펠리에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졸업 후 의사로 활동하면서 의학에 관한 고전 번역서를 여러 권 출간했다.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은 1532년 리옹에서 『팡타그뤼엘』을 출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 『팡타그뤼엘 대연대기』에 착안해서 이 작품을 썼다. 첫 작품이 대성공을 거두자 1534년에 『가르강튀아』를 발표했다. 팡타그뤼엘이 가르강튀아의 아들이므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작품을 쓴 셈이다. 이어서 1546년 『제3서』,1552년 『제4서』까지 『가르강튀아』 연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가 죽은 뒤인 1562년 『제5서』가 출간되지만 진짜 그의 작품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제4서』를 제외하고 모두 이단이며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금서 처분을 받는다. 그는 1553년 4월 파리의 자르댕 거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1483년 또는 1494년
프랑스 중서부 투렌의 쉬농 근처, 라 드비니에르에서 변호사인 앙투안 라블레의 막내아들로 태어남

1510년~1526년
1510년 앙제 근처의 프란체스코파의 라 보메트 수도원에 수도사가 되기 위해 들어감
1524년 청년기를 방데 지역에 있는 퐁트네 르 콩트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와 마유제 근처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회에서 수도사로 생활함
이 지방 출신인 앙드레 티라코와 아모리 부샤르 등, 시인과 법률가들이 모이는 문예 살롱에서 고대문화에 관심을 두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연구함
기욤 뷔데, 장 부셰와 서신을 주고받음

1526년~1528년
수도원 생활을 청산하고 부르주, 오를레앙, 파리, 몽펠리에, 보르도, 툴르주 등, 여러 대학 도시들을 방문함

1528년~1530년
환속 신부가 되어 파리에 체류함
파리의 어느 미망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프랑수아와 쥐니가 출생함

1530년
9월 17일 유럽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몽펠리에 의과대학에 등록함

1531년
4월 17일부터 6월 24일까지 몽펠리에 의과대학에서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그리스어 원전을 강의함

1532년
2월부터 4월까지 장 뒤 벨레 추기경의 주치의로 로마를 방문함
10월 알코프리바스 나지에 필명으로 리옹의 클로드 누리 출판사에서 처녀작 『팡타그뤼엘』을 출간함
11월 30일 에라스뮈스에게 라틴어로 쓴 편지를 보냄. 이 편지는 현재 옥스퍼드 대학에서 소장함

1532년~1534년
장 뒤 벨레 추기경의 수행 비서로 리옹에 체류함
리옹시립병원 의사로 근무하면서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 문집주석판을 발행함

1533년
소르본대학 신학부가 『팡타그뤼엘』을 외설을 이유로 금서 처분을 내림

1534년 5월 또는 1535년 5월
『가르강튀아』를 출간함

1535년
1월 작가의 부친 앙투안 라블레가 사망함

1535년
8월부터 1536년 5월까지 장 뒤 벨레 추기경의 주치의로 로마를 두 번째 방문함
장 뒤 벨레 추기경이 로마교황 바울 3세에게 라블레의 배교 사죄와 세속 신부 허가를 간청함

1536년
사생아 테오뒬이 두 살 때 사망함
장 뒤 벨레의 도움으로 파리 근교에 있는 생 모르 데 포세 수도원에서 사제직을 수행함

1537년
5월 22일 몽펠리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함
여름 리옹에서 의료활동을 하면서 인체 해부 실험함
10월 18일부터 1538년 4월 14일까지 몽펠리에 의과대학에서 히포크라테스를 강의함

1541년
3월 라블레는 장 뒤 벨레 추기경의 친형인 기욤 뒤 벨레 외교관이자 장군의 주치의 겸 비서로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토리노)에 체류함
11월 기욤 뒤 벨레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옴

1542년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 개정판을 파리에서 출간함
5월 기욤 뒤 벨레 장군이 있던 피에몬테(토리노)에 체류함

1543년
보호자인 기욤 뒤 벨레 장군과 조프루아 데스틱삭의 죽음 이후,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의 발행 및 발매금지 처분이 내려짐

1545년
생 크리스토프 뒤 장베(르망)의 사제직을 수행함

1546년
『제3서』의 출간과 동시에 발매금지처분이 내려지자, 그 당시 황제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던 메스(프랑스 동북부)로 피신함

1547년
장 뒤 벨레 추기경에게 망명지 메스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적은 편지를 보냄

1547년~1549년
장 뒤 벨레 추기경과 함께 세 번째로 로마를 방문함

1548년
8월 1일 리옹에서 『제4서』(서론과 제1장~제11장)의 일부분을 출판함

1550년
장 칼뱅이 『파렴치한 죄』에서 라블레를 무신론자라고 비판함
장 뒤 벨레가 거주하고 있는 파리 근교 생 모르 데 포세 수도원에 체류함

1551년
1월 18일 생 마르탱 드 뫼동(파리 근교)과 생 크리스토프 뒤 장베(르망)의 두 사제직을 수행함

1552년
『제4서』를 출간했으나 소르본대학 신학부의 고발로 금서로 지정됨
10월 라블레가 쇠사슬에 묶인 채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리옹에 퍼졌으나 그 진위는 불확실한 것으로 밝혀짐

1553년
뫼동과 생 크리스토프 뒤 장베의 사제직을 사임함
3월 초 혹은 4월 9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생폴 교회 묘지에 묻힘

1562년
유작 『종이 울리는 섬』이 16장 부분 출판됨

1564년
유작 『제5서』가 출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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