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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책소개

목차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오이디푸스 이야기
아이네이스
열국지
신곡
데카메론
가르강튀아
돈키호테
셰익스피어 희곡

저자 소개 8

호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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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ros, Homer

호메로스는 누구였을까? 한 명의 위대한 시인? 혹은 둘, 셋, 여섯? 아니면 유구하게 축적된 구전 서사시 전통이 의인화된 것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텍스트로 존재했으나, 정작 시인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기에 온갖 추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 번역본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 문자의 도움을 받아 전체를 계획하고 일관된 시학으로 ‘일리아스’를 집필한 단 한 명의 시인을 상정하고 있고, 그를 ‘호메로스’라고 부른다. 서양 문학의 원형으로 추앙받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호메로스를 “최초의 스승” “그리스 문화의 지도자” “모든 그리스의
호메로스는 누구였을까? 한 명의 위대한 시인? 혹은 둘, 셋, 여섯? 아니면 유구하게 축적된 구전 서사시 전통이 의인화된 것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텍스트로 존재했으나, 정작 시인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기에 온갖 추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 번역본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 문자의 도움을 받아 전체를 계획하고 일관된 시학으로 ‘일리아스’를 집필한 단 한 명의 시인을 상정하고 있고, 그를 ‘호메로스’라고 부른다.

서양 문학의 원형으로 추앙받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호메로스를 “최초의 스승” “그리스 문화의 지도자” “모든 그리스의 스승”이라고 묘사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지은 호메로스는 오늘날 터키 서부 지역인 이오니아 지방의 음유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호메로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 출신으로 기원전 8세기 무렵 활동한 시인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가 실재한 인물인지, 서사시인 전체를 가리키는 총칭인지, 실재한 인물이라면 두 서사시는 동일한 작가의 작품인지 등 호메로스를 둘러싼 질문들은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끝없는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그가 지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뛰어난 서사시로 불린다. 두 작품은 고대 그리스에서 표준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호메로스야말로 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먼저, 가장 잘 안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호메로스의 작품들은 시대와 장소, 장르를 불문하고 끝없이 계승되고 재해석됨으로써 불후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고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 13세기의 단테, 17세기의 밀턴, 20세기의 제임스 조이스가 모두 호메로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문학뿐 아니라 미술,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지금도 여전히 새롭게 재창조되면서 끊임없는 상상력과 창조성의 원천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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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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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ocles

소포클레스는 『시학』의 저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어느 작가보다도 높이 평가했던 그리스 극작가다. 『시학』의 비극론은 바로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토대로 해 집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괴테는 소포클레스를 다음과 같이 칭찬하고 있다. “소포클레스 이후 그 어떤 사람도 내게 더 호감이 가는 사람은 없다. 그는 순수하고 고귀하고 위대하며 쾌활하다. 현존하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몇 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몇 편의 작품일지라도 이 작품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좋게 느껴진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4
소포클레스는 『시학』의 저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어느 작가보다도 높이 평가했던 그리스 극작가다. 『시학』의 비극론은 바로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토대로 해 집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괴테는 소포클레스를 다음과 같이 칭찬하고 있다. “소포클레스 이후 그 어떤 사람도 내게 더 호감이 가는 사람은 없다. 그는 순수하고 고귀하고 위대하며 쾌활하다. 현존하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몇 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몇 편의 작품일지라도 이 작품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 좋게 느껴진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496년 그리스 아테네 근교에 자리 잡은 콜로노스에서 태어난 소포클레스는 아테네가 문화적으로 가장 성숙했던 시기에 배우인 동시에 극작가로 활동했다. 수려한 용모와 배우로서 손색이 없는 신체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처음에는 배우로서 명성을 날렸다. 기원전 468년, 28세에 첫 작품을 발표했고 이는 경연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았다. 이후 123편의 작품을 썼고 24회나 일등상을 받았다.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식견을 지녔던 소포클레스는 기원 전 445년, 델로스(Delos) 동맹이 결성되었을 때, 아테네 동맹국의 재정을 통괄하는 재정관에 선출되었다. 또한 기원전 443년에 페리클레스와 더불어 10명의 지휘관 직에 선출되었으며, 기원전 440년에는 사모스(Samos) 섬 원정에 출전할 장군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평생을 아테네에 살면서 그가 보여준 애국심과 진지한 인품은 시민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일생동안123편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다음 7편뿐이다. 〈아이아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필록테테스〉, 〈엘렉트라〉, 〈트라키스의 여인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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馮夢龍

명나라 때의 문인이자 관리로 자는 유룡猶龍, 호는 용자유龍子猶, 고곡산인顧曲散人 등이다. 형인 몽계夢桂, 아우인 몽웅夢熊과 더불어 뛰어난 문학적 재주로 이름을 날렸다. 스물한 살에 생원이 되었으나 과거를 볼 경제적 여력이 없어 다른 과거 지망생을 가르치거나 수험서를 쓰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교사이자 출판인, 문학가로 살면서 각각 40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한 대표작 ‘삼언’, 즉 『유세명언』(1621), 『경세통언』(1624), 『성세항언』(1627)을 출간했다. 소설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던 명나라 시대에 설화와 민요, 역사 기록 등을 소재로 쓴 백화소설 모음집인 삼언과 장편
명나라 때의 문인이자 관리로 자는 유룡猶龍, 호는 용자유龍子猶, 고곡산인顧曲散人 등이다. 형인 몽계夢桂, 아우인 몽웅夢熊과 더불어 뛰어난 문학적 재주로 이름을 날렸다. 스물한 살에 생원이 되었으나 과거를 볼 경제적 여력이 없어 다른 과거 지망생을 가르치거나 수험서를 쓰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교사이자 출판인, 문학가로 살면서 각각 40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한 대표작 ‘삼언’, 즉 『유세명언』(1621), 『경세통언』(1624), 『성세항언』(1627)을 출간했다. 소설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던 명나라 시대에 설화와 민요, 역사 기록 등을 소재로 쓴 백화소설 모음집인 삼언과 장편소설인 『평요전』, 『열국지』 등을 펴냄으로써 중국 소설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8세의 늦은 나이에 관직을 얻어 명왕조의 쇠락을 지켜보았고,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에 명나라의 몰락을 기록한 『중흥실록』을 편찬하고 2년 후 그 자신도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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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라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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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aois Rabelais

프랑스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꼽히는 작가. 서프랑스 쉬농 근처 라드니비에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변호사인 앙투안 라블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10년경 프란체스코수도회 소속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보수 교단이어서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에 맞지 않았고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에도 미흡했다. 지식욕이 강했던 라블레는 법률과 신학을 공부한 다음 의학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성직을 떠나 몽펠리에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졸업 후 의사로 활동하면서 의학에 관한 고전 번역서를 여러 권 출간했다.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
프랑스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꼽히는 작가. 서프랑스 쉬농 근처 라드니비에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변호사인 앙투안 라블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10년경 프란체스코수도회 소속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보수 교단이어서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에 맞지 않았고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에도 미흡했다. 지식욕이 강했던 라블레는 법률과 신학을 공부한 다음 의학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성직을 떠나 몽펠리에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졸업 후 의사로 활동하면서 의학에 관한 고전 번역서를 여러 권 출간했다.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은 1532년 리옹에서 『팡타그뤼엘』을 출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작자 미상의 대중소설 『팡타그뤼엘 대연대기』에 착안해서 이 작품을 썼다. 첫 작품이 대성공을 거두자 1534년에 『가르강튀아』를 발표했다. 팡타그뤼엘이 가르강튀아의 아들이므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작품을 쓴 셈이다. 이어서 1546년 『제3서』,1552년 『제4서』까지 『가르강튀아』 연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가 죽은 뒤인 1562년 『제5서』가 출간되지만 진짜 그의 작품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제4서』를 제외하고 모두 이단이며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금서 처분을 받는다. 그는 1553년 4월 파리의 자르댕 거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1483년 또는 1494년
프랑스 중서부 투렌의 쉬농 근처, 라 드비니에르에서 변호사인 앙투안 라블레의 막내아들로 태어남

1510년~1526년
1510년 앙제 근처의 프란체스코파의 라 보메트 수도원에 수도사가 되기 위해 들어감
1524년 청년기를 방데 지역에 있는 퐁트네 르 콩트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와 마유제 근처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회에서 수도사로 생활함
이 지방 출신인 앙드레 티라코와 아모리 부샤르 등, 시인과 법률가들이 모이는 문예 살롱에서 고대문화에 관심을 두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연구함
기욤 뷔데, 장 부셰와 서신을 주고받음

1526년~1528년
수도원 생활을 청산하고 부르주, 오를레앙, 파리, 몽펠리에, 보르도, 툴르주 등, 여러 대학 도시들을 방문함

1528년~1530년
환속 신부가 되어 파리에 체류함
파리의 어느 미망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프랑수아와 쥐니가 출생함

1530년
9월 17일 유럽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몽펠리에 의과대학에 등록함

1531년
4월 17일부터 6월 24일까지 몽펠리에 의과대학에서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그리스어 원전을 강의함

1532년
2월부터 4월까지 장 뒤 벨레 추기경의 주치의로 로마를 방문함
10월 알코프리바스 나지에 필명으로 리옹의 클로드 누리 출판사에서 처녀작 『팡타그뤼엘』을 출간함
11월 30일 에라스뮈스에게 라틴어로 쓴 편지를 보냄. 이 편지는 현재 옥스퍼드 대학에서 소장함

1532년~1534년
장 뒤 벨레 추기경의 수행 비서로 리옹에 체류함
리옹시립병원 의사로 근무하면서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 문집주석판을 발행함

1533년
소르본대학 신학부가 『팡타그뤼엘』을 외설을 이유로 금서 처분을 내림

1534년 5월 또는 1535년 5월
『가르강튀아』를 출간함

1535년
1월 작가의 부친 앙투안 라블레가 사망함

1535년
8월부터 1536년 5월까지 장 뒤 벨레 추기경의 주치의로 로마를 두 번째 방문함
장 뒤 벨레 추기경이 로마교황 바울 3세에게 라블레의 배교 사죄와 세속 신부 허가를 간청함

1536년
사생아 테오뒬이 두 살 때 사망함
장 뒤 벨레의 도움으로 파리 근교에 있는 생 모르 데 포세 수도원에서 사제직을 수행함

1537년
5월 22일 몽펠리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함
여름 리옹에서 의료활동을 하면서 인체 해부 실험함
10월 18일부터 1538년 4월 14일까지 몽펠리에 의과대학에서 히포크라테스를 강의함

1541년
3월 라블레는 장 뒤 벨레 추기경의 친형인 기욤 뒤 벨레 외교관이자 장군의 주치의 겸 비서로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토리노)에 체류함
11월 기욤 뒤 벨레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옴

1542년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 개정판을 파리에서 출간함
5월 기욤 뒤 벨레 장군이 있던 피에몬테(토리노)에 체류함

1543년
보호자인 기욤 뒤 벨레 장군과 조프루아 데스틱삭의 죽음 이후,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의 발행 및 발매금지 처분이 내려짐

1545년
생 크리스토프 뒤 장베(르망)의 사제직을 수행함

1546년
『제3서』의 출간과 동시에 발매금지처분이 내려지자, 그 당시 황제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던 메스(프랑스 동북부)로 피신함

1547년
장 뒤 벨레 추기경에게 망명지 메스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적은 편지를 보냄

1547년~1549년
장 뒤 벨레 추기경과 함께 세 번째로 로마를 방문함

1548년
8월 1일 리옹에서 『제4서』(서론과 제1장~제11장)의 일부분을 출판함

1550년
장 칼뱅이 『파렴치한 죄』에서 라블레를 무신론자라고 비판함
장 뒤 벨레가 거주하고 있는 파리 근교 생 모르 데 포세 수도원에 체류함

1551년
1월 18일 생 마르탱 드 뫼동(파리 근교)과 생 크리스토프 뒤 장베(르망)의 두 사제직을 수행함

1552년
『제4서』를 출간했으나 소르본대학 신학부의 고발로 금서로 지정됨
10월 라블레가 쇠사슬에 묶인 채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리옹에 퍼졌으나 그 진위는 불확실한 것으로 밝혀짐

1553년
뫼동과 생 크리스토프 뒤 장베의 사제직을 사임함
3월 초 혹은 4월 9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생폴 교회 묘지에 묻힘

1562년
유작 『종이 울리는 섬』이 16장 부분 출판됨

1564년
유작 『제5서』가 출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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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데 세르반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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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uel de Cervantes Saavedra

스페인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극작가이자 시인이라 불린다. 1547년 9월 29일 성 미겔의 날에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의 대학도시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일곱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로드리고 데 세르반테스는 가난한 외과의사 겸 접골사였으며 어머니 레오노르 데 코르티나스는 코르도바 출신이었다. 아버지의 빚 때문에 몇 달간 투옥되었던 세르반테스는 19세가 되던 해 유명한 에라스무스주의자 후안 로페스 데 오요스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 들어가고, 1568년 펠리페 2세의 왕비인 이사벨 데 발부아가 사망하자 오요스가 발간한 문집에 시 네 편을 수록한다. 이는 세르반테스의
스페인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극작가이자 시인이라 불린다. 1547년 9월 29일 성 미겔의 날에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의 대학도시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일곱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로드리고 데 세르반테스는 가난한 외과의사 겸 접골사였으며 어머니 레오노르 데 코르티나스는 코르도바 출신이었다. 아버지의 빚 때문에 몇 달간 투옥되었던 세르반테스는 19세가 되던 해 유명한 에라스무스주의자 후안 로페스 데 오요스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 들어가고, 1568년 펠리페 2세의 왕비인 이사벨 데 발부아가 사망하자 오요스가 발간한 문집에 시 네 편을 수록한다. 이는 세르반테스의 문학적 작업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문건으로 알려져 있다.

1569년 로마로 떠난 세르반테스는 교황청 소속 신부의 시종으로 일하다 이듬해 나폴리에서 스페인군에 입대한다. 스페인이 주도하는 기독교 연합군과 터키 사이에 벌어진 레판토 해전에서 그는 왼쪽 가슴과 팔에 총상을 입어 왼팔을 쓸 수 없게 된다. 레판토 해전에 참가한 후 이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르네상스 말기의 문화에 심취했으며, 1575년 에스파냐 해군 총사령관이며 왕제(王弟)인 돈 후안의 표창장을 받고 동생과 함께 스페인으로 귀환하는 갤리선에 오르지만 터키 해적의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알제리로 끌려간다. 1576년 세르반테스의 주도로 포로 13명이 탈출을 시도하지만 길잡이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이후 세 번이나 더 탈출에 실패한다. 1580년 마침내 5년이라는 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된 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에서 가족과 재회한다. 그때부터 희곡 집필에 전념하기 시작한 그는 1583년 배우와 극작가들이 자주 다니는 타베르나에서 유부녀인 아나 비야프랑카와 사랑에 빠진다.1585년 9월 아나 비야프랑카는 딸 이사벨을 낳고, 그해 12월 37세의 세르반테스는 19세의 카탈리나 데 팔라시오스와 결혼한다. 첫 작품인 목가소설 『라 갈라테아』를 출판한 것도 이때였다. 이후 1587년까지 20∼30편의 희곡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1592년 징수된 곡물을 허가 없이 판매한 혐의로 세비야 감방에 투옥된 세르반테스는 옥중에서 『라만차의 비범한 이달고 돈키호테』를 구상한다. 1605년 출간한 『돈키호테』 1편으로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불후의 명작 『돈키호테』는 이상주의적 인물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적 인물 산초를 통해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을 냉철하고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 『돈 키호테』의 정식명칭은 『재치 발랄한 향사(鄕士) 돈 키호테 데 라 만차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로, 작가 자신이 “유행하고 있는 기사(騎士)이야기의 인기를 타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당시 에스파냐에서 유행한 기사 이야기의 패러디에서 출발되었다.

이 작품의 중심은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의 두 성격의 창조로, 기사의 고매한 이상은 산초 판자의 실제적이고 비속한 물질주의와는 대조적이다. 21세기 먼 타국에서조차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돈키호테는 독자들 나름대로의 잣대로 인해 현실감각 없는 인물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주위의 시선과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상을 향해 뜻을 굽히지 않고 다가서는 인물로 재탄생되고 있다. 세르반테스는 그 시대까지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소설의 다양한 형식을 집결하여 문체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개방식에서도 참신함이 돋보이는 훌륭한 걸작을 만들어냄으로써 유럽 현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 이후 『돈키호테』 2편, 『모범소설집』(1613), 『파르나소에의 여행』(1614), 『여덟 편의 희극과 여덟 편의 막간극』(1615)을 출간하였다. 만년에는 종교적인 결사에 가담하고, 1611년 프란시스코 데 실바가 창립한 아카데미아 셀바헤라는 작가 단체에 가입하였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인 1616년 4월 23일, 마드리드에서 수종으로 69세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마드리드의 트리니타리아스 이 데스칼사스 수도원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지나 무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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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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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Shakespeare

영국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1564년 4월 23일 존(John) 셰익스피어와 메리 아든(Mary Arden) 사이에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인구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영국 잉글랜드 워릭셔주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존 부부의 첫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경과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 셰익스피어는 11살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경과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셰익스피어에게 상상
영국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1564년 4월 23일 존(John) 셰익스피어와 메리 아든(Mary Arden) 사이에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인구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영국 잉글랜드 워릭셔주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존 부부의 첫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경과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

셰익스피어는 11살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경과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셰익스피어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그리스어도 배웠지만 그리 신통하지는 않았다. 이 당시에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식 있는 작가들을 ‘대학재사’라고 불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들과는 달리 대학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다양한 경험,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력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는 못했지만, 자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운 자연의 아들이자 천재였다.

1582년 앤 해서웨이와 결혼하여 딸과 쌍둥이 남매를 낳았다. 이후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겨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극작가로 성공했으며 희극 배우로도 활동했다. 후원자 사우샘프턴 백작의 도움으로 궁정에도 출입하며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1세에게 후대를 받아 1594년에는 궁내부장관 극단의 전속 극작가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사업적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재산 관리에도 능숙해 상당한 부동산을 구입하여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다.

수많은 희곡 중 셰익스피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무어인 장군 오셀로가 이아고의 간계에 빠져 사랑하는 아내를 질투하고 살해하는 비극을 다룬 『오셀로』, 자신에 대한 딸들의 충성을 시험하다 비극을 맞는 『리어왕』,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비극을 초래하는 『맥베스』, 그리고 마지막이 이 4대 비극 중 가장 앞서 쓰였다는 『햄릿』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그렸다. 인간을 들여다보는 깊이 있는 시선은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들에 길고긴 생명을 부여한다. 끊임없는 재해석이 그 방증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인물들을 파고들고 해석하는데, 문학에서 찾아낼 수 있는 모든 가치를 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1590년 대 초반에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6세』, 『리처드 3세』 등이 런던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다. 특히 『헨리 6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에 대한 악의에 찬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작가 셰익스피어 작품의 인기는 더해갔다. 1623년 벤 존슨은 그리스와 로마의 극작가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셰익스피어뿐이라고 호평하며, 그는 “어느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1668년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은 셰익스피어를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고 극찬했다. 1610년경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셰익스피어는 대저택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다, 1616년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서거하여 성트리니티 교회에 안장되었다.

셰익스피어는 1590년에서 1613년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의 극작가로서, 대표 작품으로는 『공연한 소동』, 『12야(夜)』, 『자(尺)에는 자로』, 등의 희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 왕』,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등의 비극을 비롯해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헨리 4세』, 등 10편의 비극(로마극 포함), 17편의 희극, 10편의 역사극, 『비너스와 아도니스』, 등의 시집 및 『소네트집』도 남겼다. 대부분의 작품이 살아생전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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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베르길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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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us Vergilius Maro

베르길리우스는 기원전 70년 북부 이탈리아의 안데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베르길리우스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가난한 농부 혹은 옹기장이였던 아버지는 베르길리우스가 성인식을 치른 기원전 55년에 그를 로마 대도시의 상급 학교에 보내 수사학을 익히도록 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홀로 로마로 이주한 그는 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 안토니우스 등과 같은 학교를 다녔고, 서정시 「카타렙톤」으로 열일곱 살부터 시인의 면모를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물아홉에는 이미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을 받으며 옥타비아누스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기원전 37년
베르길리우스는 기원전 70년 북부 이탈리아의 안데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베르길리우스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가난한 농부 혹은 옹기장이였던 아버지는 베르길리우스가 성인식을 치른 기원전 55년에 그를 로마 대도시의 상급 학교에 보내 수사학을 익히도록 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홀로 로마로 이주한 그는 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 안토니우스 등과 같은 학교를 다녔고, 서정시 「카타렙톤」으로 열일곱 살부터 시인의 면모를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물아홉에는 이미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을 받으며 옥타비아누스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기원전 37년 서른셋의 나이에 마이케나스의 식객이 되며 이 무렵부터 호라티우스와 투카, 바리우스 등의 시인과 교류했고, 기원전 29년 『농경가』를 발표할 즈음에는 로마 인민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인물로 아우구스투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아이네이스』는 베르길리우스의 대표작이자 마지막 작품으로, 그가 죽기 전까지 11년간 매달린 로마 건국 서사시이다. 희랍군에 멸망한 트로이아의 영웅 아이네아스가 새 나라를 건국하라는 신탁을 받고 파란만장한 모험 끝에 로마의 기초를 세우게 된다는 내용으로, 오늘날까지 라티움어로 쓰인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아이네이스』의 완성을 위해 희랍 여행을 떠난 베르길리우스는 귀향길에 열병에 걸려, 기원전 19년 이탈리아에 도착한 후 곧 숨을 거두었다. 사망 직전 미완성 원고를 불태우고자 했으나 그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우구스투스의 뜻에 따라 세상에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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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홍익대학교 문과대학장, 세계상상력센터 한국 지회장, 한국상상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 그리고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으로서 한국이 주빈국이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성공적으로 주관하며 한국문학과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이런 활동의 연장선에서 생각하는 힘: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시리즈를 기획하여 출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프리메이슨 비밀의 역사』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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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미정
쪽수, 무게, 크기
1424쪽 | 3628g | 152*230*8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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