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특이하다. 전쟁과 학살이라는 참혹한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성찰과 치유의 따뜻함이 읽는 이의 마음에 스며든다. 아픈 기억은 빨리 잊어버림이 상책일 터. 그러나 한이 맺혀 잊으려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벗어나고 싶어도 연좌제로 인해 친족의 죽음이 자신의 삶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각인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권헌익은 죽은 자의 존엄함이 회복될 때 비로소 산 자들의 존엄함도 회복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깊으면서도 넓다. 안동과 제주의 마을을 담은 인류학적 분석은 문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과 만나 전지구적 분쟁의 최전선에서 벌어진 냉전적 근대성의 본질을 묻는 서사시로 확장된다. 전통과 근대, 서구와 동양의 이분법은 종횡무진하는 그의 학문적 웅대함 속에서 철저히 해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