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미술사는 자명한 존재가 아니다. 일본의 ‘화단’을 통해 질서화된 ‘미술’이라는 제도에서 보면 주변적이고 단편적일지도 모른다. 백름은 그들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화단’에서 인정받기 위해 ‘주류’의 가치관에 따라 평가하는 방식의 연구 태도를 거부했다. 그렇게 미리 ‘주어진’ 미술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전후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며 표현 활동을 펼쳤던 미술가들의 삶의 현장에서 출발했다.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백름은 계속 움직였다. 재일조선인이 그린 작품을 보기 위해. 미술가와 그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삶과 투쟁 속에서 창출된 작품과 그 흔적을 찾기 위해. 거기서 빚어진 역사는 풍요롭다. 그 표현의 형태는 액자에 담긴 작품뿐만 아니라 삽화, 표지화, 만화 등 실로 다양하다. 미술가들은 문학가, 음악가, 영화감독 등과 교류하며, 일본 미술가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냉전의 분단을 극복하고 연대하며 표현해 나갔다.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으로부터 출발한 까닭에 역사 서술은 폐쇄적이지 않고 모든 방향을 향해 열려 있다. 그것은 생활의 역사이고 투쟁의 역사, 유대의 역사이며 무엇보다도 표현의 역사이다. 또한 백름이 계속 살아 나간 현대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번역본의 출판은 또 다른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더욱 풍요로운 재일조선인미술사 구축에, 그리고 분단을 극복한 인간적 관계 형성에 기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