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기의 시에는 ‘선비 정신’이 깃들어 있다. 뼈 말 같은 것인데, 다단한 세파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는 대신 아물고 단단해질 때까지 되새긴 자문자답으로 원상처의 정곡을 찌른다. “언젠가 몸이 떠돌던 곳을, 그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언제나 떠도는 것은 상처였으나,/ 그것은 중심이었다.”(「시인의 말」). 시인은 첫 시집 『식물의 시간』에서 인내하는 상처들에 무한한 경배를 보낸 바 있다. 이번 시집이 나오기까지 18년 동안 묵혀 온 세월도 ‘식물의 시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시인은 오래된 처마 아래서 “저 빗방울이 파놓은 단단한 파문들/ 저 빗방울이 파놓은 단단한 울림들”(「오래된 처마 아래서」)을 불러내어 그 사연과 내력들을 껴안고자 한다. 시인은 ‘모르는 것에 대해 묻지 말고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몰운대」),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져 있는 멸치’의 존재를 감각하며 어떤 대답을 슬쩍 내놓는다.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누군가 다시 돌아와 서로 뉘우칠 때까지”(「멸치」). 시의 궁극은 헤어진 그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일 테다. 그래서 화해와 대동의 세상이 오기를 갈망한다. 이명기 시인은 돌올한 선비의 자세로 자신을 성찰하고 모든 지나간 것들의 상처를 위무한다. 시인은, 시는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