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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5
1부-중얼거리는 사람 다중인격·15 우이독경·17 중얼거리는 사람·18 혼자 웃는 사람·20 이해하는 사람·22 되새기는 사람·24 두리번거리는 사람·25 페이스 북·26 자귀나무 여자·28 칼 몸·30 고구마 줄기를 벗기는 여자·32 꽃차·34 염소는 어긋난다·36 통화·38 나비와 휠체어·40 칼집·42 말의 신사·44 비석은 자란다·46 예언의 방식·48 2부-나를 만났다 머릿속에서 전철 돌리기·51 사이비를 위한 시·52 사랑의 거지·54 다른 말이 있다·56 발·58 골몰하는 동안·60 돌아와서 눕는다·62 공중의 창·64 나를 만났다 2·66 나는 명랑하고·68 나는 해롭다·70 12월의 굴뚝·72 1mm의 고독·74 건망·76 누가·78 공부·80 이달의 명언·82 3부-공중의 이사 귤·87 외면·88 인생·90 숙주론·92 공중의 이사·94 매미 2·95 창에는 행운목·96 참을 수 없는 忍·98 비우거나 버리거나·100 등받이·102 아내의 살림·104 목 없는 소파·106 월요일의 백화점·108 뉴트리아를 먹는 밤·110 목련 나무·112 긁는다·114 4부-너는 너를 모르고 비 끝·117 꽃과 별·118 거울 앞·119 부뚜막 위의 히아신스·120 빛나는 방식·122 너라서·124 너는 예쁘다·126 듯이·128 해후·130 냄새·131 하루 종일 비가 오면 나는·132 발치(拔齒)·134 해설 | 오민석(문학평론가) 파열의 언어와 분열된 주체·145 |
정병근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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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음(浮游音) 한 소절이 종일 뇌리에 붙어 다닌다
그것은 끓고 있는 죽 같고 뚜껑 없는 냄비 같다 다 퍼낸 바닥에 고이는 물처럼 사람을 만나면 안녕하세요가 툭 튀어나온다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다음을 기약하는 말끝에 속말이 따라붙는다 쳐다보는 표정 뒤로 눈이 숨는다 너의 말을 내놔라 말이 있어요 할 말이 있어요 몸 안에 말이 있다고 눈을 껌벅이며 울먹이던 사람을 보았다 가지가 몽땅 잘린 나무둥치의 옆구리를 뚫고 툭 튀어나오는 꽃처럼 목구멍을 기어 나오는 선충들처럼 잘린 곳에 실가지가 무수히 뻗어 나온다 다 게우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는 말의 뒤통수에 미운 말이 들끓는다 곡을 끝낸 상주는 한 번씩 음, 음, 하고 자신의 목청을 확인한다 말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 죽은 몸에서 나온 벌레들이사방으로 빠르게 흩어지며 사라진다 그 많던 말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는 동안 다시 말이 고이기 시작한다 ---「중얼거리는 사람」중에서 천애고아를 받았다 어머니는 잎의 뒷면에 알들을 슬어놓고 숨을 놓았다 그늘을 다니는 피는 고독사한 아버지의 피 환한 창 안의 온기를 그리며 지붕 없는 날들을 풍찬노숙했다 하루 세 번, 쌓인 말을 부정하고 안온에 깃든 다짐을 털어내고 언제나 발바닥 시린 겨울 마당 같은 맨발을 촉구하는 말의 선생은 누구인가 비애를 자긍하는 벌거숭이를 받았다 걱정 없이 따뜻해지고 싶어요 가는 곳마다 다른 곳이었고 길은 늘 새로 시작되었다 비바람 눈보라는 소용되는 법이 없고 쌓이지 않는 걸음은 나비처럼 팔랑댔다 명랑의 풍습을 섬기며 가벼워졌다 그들보다 먼저 웃고 모르는 척했다 무엇을 숭배하는 이들이 부러웠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 속말을 받으며 뒷목이 벌겋게 걸어갔다 하루아침의 남루와 급전직하의 풍문이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떠돌았다 ---「사이비를 위한 시」중에서 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어서 나는 얼마나 벅찬지 모를수록 너는 내 눈에 낯설고 그 설레는 미지 너는 더없이 순정하고 달콤한 오해 나날이 기뻐서 기약하는 말은 야속한 이별의 내막이 될 테니까 대답을 조심해야지 백 번의 마음으로 어제와 오늘을 순순히 고백한다 목을 젖히며 웃는 너를 볼 때 계시처럼 무엇을 알고 있는 내가 두려워 아무 일 아닌 듯 안경에 티나 닦으면서 그것은 먼 일일 테니까 너와 있는 날은 기쁘고 서러워서 나는 한순간에 다 살고 돌아온 마음으로 너를 자꾸만 모르려고 애쓴다 총명한 눈의 표정으로 너는 내게 말을 던지고 말을 채근하고 다른 곳을 쳐다보며 나는네가 너라서 얼마나 좋은지 ---「너라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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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구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언어의 장인
말하기를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은 말로 말 이전 혹은 말 너머의 것을 붙잡으려는 사람이다. 말이 직업인 시인들은 말 때문에 무수한 고초를 겪는다. 그들에겐 말이 축복이고, ‘웬수’이며, 저주이고, 절망이다. 시인은 말에 매혹당한 말의 노예이다. 시인은 말에 진저리를 치면서 말의 주술에 사로잡힌 자이다. 시인에게 말은 가학과 피학의 채찍이다. 그는 말을 때리고 말에게 얻어맞으며, 말이 없이 살 수 없으면서도 언제든 말을 떠나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많은 시인은 말과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을 짐짓 모른 체한다. 어떤 시인은 말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럴 때 말은 소통과 재현의 가장 훌륭한 기제로 격상된다. 말의 신전에서 말에게 무릎 꿇고 말의 제사장이 될 때, 시인은 말의 나팔이 된다. 말은 시인의 소리통을 울려 자신을 온전히 성취한다. 아무도 말을 의심하지 않을 때, 말은 세계의 주인이 되고, 세상을 ‘만든다’. 플라톤 이래 근 이천 년 동안 시인과 철학자들은 말의 궁전에서 말의 시녀 역할을 했다. 그들에게 말은 실재(reality)를 실어 나르는 편리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니체는 무법천지의 말에게 망치를 들이대고 이렇게 말했다. “실재란 언어의 범주적 그물망에 포착되지만, 그것은 오로지 치명적인 왜곡을 통해서 그럴 뿐이다.” 니체의 안테나는 언어가 범주적 사유와 결합하면서 실재를 포착하되 그것을 치명적으로 왜곡함을 감지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발견인가. 모든 언어가 그러므로 가짜를 생산한다니. 자신의 ‘서정’에 빠져 언어를 의식하지 못하는 시인들이 가끔 언어의 이 수상한 짓거리를 눈치채지만, 그럴수록 시인들은 언어보다 자신들의 언어 능력을 더 의심한다. 그러나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이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직무 유기인가. 자고로 언어의 끝장까지 가본 자만이 언어를 의심한다. 그렇다면 정병근은 정확히 그런 시인이다. 그는 언어가 서정을 담는 훌륭한 그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가 서정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거나 왜곡하므로, 그에게 당면 과제는 서정의 전달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언어에 대한 사유이고, 사상의 배포가 아니라 그 이전의 말에 대한 궁구이다. 그는 언어의 알리바이를 믿지 않으며, 언어의 재현 능력을 의심하고, 그것의 혐의를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는 시를 쓰기 전에 시의 재료를 따지는 시인이고, 시의 제전(祭典)에 한판 놀아보겠다고 나온 언어-무당을 삐딱하게 째려보는 검열관이다. 그는 마술의 지긋지긋한 속임수와 거짓말에 더 이상 속지 않겠다고 다짐한 불행한 마술사이다. 마술을 갖고 놀아야 할 마술사가 그것을 믿을 수 없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 말을 많이 한 날은 마음이 켕긴다 후환이라는 말 참 두렵다 말이 없는 사람은 분노를 감춘 사람 말을 쟁여두면 병이 온다 기괴와 기형으로 달변은 앙금을 남기지 거짓말을 복용한 날은 손톱을 깎는다 안경을 닦고 책갈피를 문지른다 나를 베어 문 웃음이 일생의 말들을 훑으며 지나간다 뻥 뚫린 폐점처럼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 중독자의 눈빛으로 말은 병든 난간에 앉아 지나가는 얼굴들을 쬔다 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아 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쓴다 - 「말의 신사」 전문(본문 44~45쪽) 정병근에게 말은 ‘요물’이다. 말을 많이 해도 문제가 되고 말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된다. 말은 많이 하면 거짓과 과잉-현실을 만들고, 하지 않으면 “분노”를 만든다. 말은 “기괴와 기형”의 기제이다. 말은 세계를 굴절하고 왜곡한다. 말은 그것 때문에 “병든 난간에 앉아/지나가는 얼굴들을 쬔다”. 말의 꼬심에 넘어가 “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온다. 그러므로 말의 기총소사 앞에서 시인은 말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쓰는 행위는 언어 앞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주저 행위이다. 한마디로 “근사한 말”은 없다. 근사한 말이란 대상을 왜곡하지 않는 말, 실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말이다. 시인이 볼 때, 그런 “말의 신사”는 없다. 노자의 말대로, “도를 도라 부르면 이미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존재와 재현은 일치하지 않는다. ‘새’라는 단어는 날거나 울지 않는다. 새라는 기호는 실물의 새와 어떤 필연적 연관도 없다. 실물의 나무는 ‘나무’라 불릴 수도 있고, ‘바움(Baum)’이라고 불릴 수도 있으며, ‘트리(tree)’라고 불릴 수도 있다. 그러나 기호인 나무, 바움, 트리, 그 어떤 것도 자라거나 죽지 않는다. 르네 마그리트(R. Magritte)가 〈단어의 사용 1〉에서 담뱃대를 그려놓고 “이것은 담뱃대가 아니다.”라고 말한 이유가 그것이다. 마그리트는 〈꿈의 열쇠〉라는 그림에서도 말의 이미지에 “문”이라는 단어를, 시계의 이미지에 “바람”이라는 단어를, 그리고 화병의 이미지엔 “새”라는 단어를 달아놓았다. 소쉬르(F. de Saussure)의 통찰대로 언어와 오브제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 그것들의 관계는 철저하게 자의적이다. 기호들은 오로지 언어 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와 차이에 의해 의미를 발생시킬 뿐이다. 기호가 언어 체계 밖의 오브제를 지배할 때 언어와 오브제 사이의 괴리, 굴절, 왜곡이 일어난다. 눈과 입을 가진 자들이 스스로 재갈을 물고 강철 귀로 들어야 하는 경전이 있다 쩔렁쩔렁 요령을 울리며 필생을 되새기는 말씀이 있다 듣지 않아야 들리는 동문서답이 있다 - 「우이독경」 부분(본문 17쪽) 정병근은 이 시집 전체에 ‘말’이란 단어를 흩뿌려놓은 후에 그것들 사이에 “우이독경”, “마이동풍”, “동문서답”같은 연결어를 부여한다. 시인이 볼 때, 말은 지시 대상을 왜곡하고 굴절시키므로 발화자들 사이의 모든 말은 우이독경, 마이동풍, 동문서답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말은 놀랍게도 소통이 아니라 불통의 기제이다. “동문서답에 몰두하는 대화들” 때문에 주체들은 “반목하는 결별의 디스플레이들”이 된다. 시인은 이런 관계 속에서 자신이 “질 것이고 잘못할 것이”고, “버려진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버려지는 나’는 기호의 옷을 입고 사라진 모든 오브제를 총칭한다. ‘도’라고 말하는 순간 도가 사라지는 것처럼, 언어적 발화의 순간 지시 대상은 사라진다. 「우이독경」에서 “듣지 않아야 들리는 동문서답”은 언어의 문법을 거꾸로 돌리는 전략을 보여준다. 굴절의 언어를 다시 한번 거꾸로 굴절시키면 사라진 오브제를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말을 가장 혐오하고, 말과 가장 어려운 싸움을 벌이며, 말의 주술을 푸는 자이다. 천만번쯤 말을 삼키고 나면 충직한 짐승 한 마리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을 갖기 위해 회심의 인내를 바쳤다 터무니없는 요지부동으로 불쑥 쏟은 동문서답 같은 무한한 귀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자만 이곳에 들 수 있다 되새기는 草食의 표정처럼 첩첩 침묵으로 다진 저 뻣뻣한 위안을 이런 짐승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일찍이 그것을 몸에 들이지 않았다면 내 말은 서까래 단청을 휩싸는 불이 되었거나 떠도는 소문이 되었을 것 …(중략)… 먼 곳의 긍지를 모아 비석은 자란다 모든 몰입과 유배를 소진하고 죽어서 우뚝 선 저 묵묵한 바윗덩어리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 「비석은 자란다」 부분(본문 46~47쪽) 오브제를 왜곡하는 말의 횡포를 막으려면 “천만번쯤 말을 삼”켜야 한다. 언어는 비상약(砒霜藥)처럼 사용해야 한다. 과도한 비상약은 생명을 죽인다. 독소인 언어는 “회심의 인내”로 최대한 억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첩첩 침묵”의 비석처럼 아주 천천히 자라야 한다. 그리하여 “요지부동”이었던 말이 어느 순간 “불쑥 쏟은 동문서답”처럼 튀어나올 때, 즉 왜곡을 왜곡하고, 굴절을 굴절할 때, “죽어서 우뚝 선” 언어가 나온다. 상징계의 언어가 실재계로 막 건너뛰는 그 파열의 순간, 그 영지적(靈知的) 죽음의 순간에 말은 말을 배반하고 실재에 가까이 간다. 실재계는 그 “먼 곳의 긍지”이다. 그것은 죽음 즉 “모든 몰입과 유배를 소진”한 후에야 순간적으로 다가온다. 시는 그런 긍지를 향하여 비석처럼 자란다. 시는 그런 무수한 말의 죽음 위에서 세워진다. 시인이 “서까래 단청을 휩싸는 불” 혹은 “떠도는 소문”에 불과한 말을 삼키거나 죽일 때, 비석의 언어가 자란다. 기호와 재현의 불일치는 오브제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주체 역시 언어의 오브제이므로, 그것은 주체에게도 일어난다. 상징계의 모든 주체는 언어적으로 구성된다. 마그리트의 시계 이미지가 ‘바람’이라는 기호로, 화병 이미지가 ‘새’라는 기호로 재현되듯, 모든 주체는 모든 기호로 재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체는 그것을 호명하는 기호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해진다. 하나의, 통합된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주체는 분열된 주체이다. 두더지게임처럼 아무 데나 내가 튀어나온다 망치가 있어야 때릴 텐데 고삐 풀린 장면들이 무시로 문을 넘나든다 망치는 어디 있나 끓는 거품 속에서 인과도 없이 무수한 내가 다발로 태어난다 내가 나를 이긴다 - 「나비와 휠체어」 부분(본문 40~41쪽) 나는 하나의 나를 이기는 무수한 다른 나들로 구성되어 있다. 주체의 속성은 그 안에서 “인과도 없이” “무수한 내가/다발로 태어난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과도 없이”라는 부사구이다. 정병근이 말하는 주체의 분열은, ‘인과’로 설명이 가능한, 욕망/이성 혹은 무의식/의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가 아니라 언어의, 말의 문제이다. 언어는 부글부글 “끓는 거품 속에서” 오브제를 호명하지만, 하나의 기호가 아닌 무수한 기호를 동원해서 그렇게 한다. 하나의 오브제가 무수한 기표로 분열되듯이, 주체도 무수한 기표로 분열된다. 말은 “무수한” 나를 만들어 “나를 이긴다”. 너무 많은 나는 기호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상징계의 아버지는 주체가 아니라 말이다. 전철 안 사람들의 표정도 어긋나 있다 술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자세도 어긋나 있다 어긋남은 언제든 등을 돌리고 단호하게 일어서는 힘이다 어긋나는 힘으로 누군가와 결별하고 돌아왔다 나는 줄기차게 어긋났다 나와 어긋났고 너와 어긋났고 그와 어긋났다 빛나는 오해처럼, 어긋난 사랑에만 몰두했다 그 누구로부터도 남이 되기 손색없는 자세로 - 「염소는 어긋난다」 부분(본문 36~37쪽) 상징계 안에서 존재와 재현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줄기차게” 어긋나며, 영원한 결별의 상태에 있다. 말의 제왕 아래에서 사물은 자신과 어긋나며 다른 사물과도 어긋난다. 사람도 자신과 어긋나며 다른 사람과 어긋난다. 어긋남과 불통과 결별은 상징계의 규칙이다. 그리하여 정병근은 언어로 재현된 현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가 그려내는 풍경은 아름다운 자연도 아니고 일상적인 삶의 공간도 아니다. 그의 시선은 늘 현실과 초현실 혹은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그에게는 그 중간적인 어딘가가 현실이다. 천애고아를 받았다 어머니는 잎의 뒷면에 알들을 슬어놓고 숨을 놓았다 그늘을 다니는 피는 고독사한 아버지의 피 환한 창 안의 온기를 그리며 지붕 없는 날들을 풍찬노숙했다 하루 세 번, 쌓인 말을 부정하고 안온에 깃든 다짐을 털어내고 언제나 발바닥 시린 겨울 마당 같은 맨발을 촉구하는 말의 선생은 누구인가 비애를 자긍하는 벌거숭이를 받았다 걱정 없이 따뜻해지고 싶어요 가는 곳마다 다른 곳이었고 길은 늘 새로 시작되었다 - 「사이비를 위한 시」 부분(본문 52~53쪽) 화자는 잎의 뒷면에 알을 낳고 죽은 어머니와 고독사한 “아버지의 피”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을 낳는 어머니가 초현실적 풍경이라면, 출산 직후 사망하는 여성은 있을 수 있는 현실의 풍경이다. 화자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독자에게 말을 건다. 부모를 잃은 후에 화자가 겪은 “지붕 없는 날들”의 “풍찬노숙”은 구체적 설명을 지운 채, 둘째 연에서 “말의 선생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왜 궁핍한 현실에서 다름 아닌 “말”이 문제가 되는가. 화자는 가난과 불행의 현실에서 빠져나와 현실도 초현실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말의 계보적 기원을 묻는다. 이 작품에서 출생의 서사가 현실이라면, 말에 관한 질문은 시 혹은 시 창작의 과정에 대한 물음인가 혹은 다른 세계에 관한 질문인가. 정병근은 이런 식으로 언어로 재현된 현실에 주저앉지 않으며 그것 너머의 현실, 혹은 “먼 곳의 긍지”를 쳐다본다. 그가 입을 여는 지점은 바로 이 두 극점 사이의 중간 지대이다. 그가 볼 때, 실재계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고, 파열의 언어가 상징계에서 그나마 실재의 징후를 포착하는 지점은 바로 말이 빗나가고 어긋나는, 그 중간 어디쯤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존재와 일치하지 않는다. 시는 그런 언어로 실재에 다가간다. 존재와 재현의 행복한 결합을 믿는 자들은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없다. 반면에 언어에 대하여 정병근처럼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시인들도 매우 드물다. 그는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서 파열하는 언어의 소리를 듣는다. 언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절정의 순간에 그의 시의 비석은 자란다. 자고로 언어에 대해 가장 절망한 사람이야말로 언어를 가장 잘 아는 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