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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에 대한 예의
김제숙
여우난골 202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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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5

1부 | 내 생의 숱한 의문들 어디쯤 묻혀 있나
나물을 무치며·15
행복·16
미치지 않을 자유·17
함정·18
툰드라의 꿈 - 하당에르 고원·19
무궁화호·20
늦게라도 오는 것·21
회복·22
길항·23
11월의 맨드라미·24
다도해·25
저녁의 말[言]·26
예문에 대한 예의·28

2부 | 수만의 언어보다도 더 뜨거운 행간을 읽는다
그믐에서 보름 사이·31
동지여, 동지여·32
공존의 방식·34
용의 행방·35
로켓 배송·36
전면 통제 중에도·37
시의 온도·38
위대한 유산·39
고독한 인텔리겐차 - 월북작가 박승극·40
개망초꽃·42
후회·43
배꼽·44
결핍·46

3부 | 비로소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묻는다
손을 얹는 일·49
늑간통을 읽는 방법·50
백자 달항아리·52
숨은 꽃·53
칼바도스의 어둠 - 레마르크 『개선문』을 다시 읽으며·54
속수무책·56
평화·57
또다시 봄·58
사랑도 이런 사랑·59
동락(同樂)·60
사루비아·61
보름달·62
받아쓰기·63

4부 | 왔던 길 돌아가는 지금 낯익은 길 환하다
차선의 미덕·67
즐거운 본능·68
빅뱅 체험·69
역설·70
월척에의 꿈·71
오래된 착각·72
랜덤 낚시질·74
종전(終戰)으로 가는 길·75
확인·76
리셋(reset)하다·77
오십견·78
아보하·79
조각보·80

5부 | 잊혀진 노래를 찾아서 가만히 불러줄까
감염 - 詩作·83
청매, 오다·84
맹목의 출처·86
시 쓰는 책상·87
시인 본색·88
배롱나무·89
숨은 행복 찾기·90
종말의 날·91
11월의 숲·92
신화(神話)·93
끙·94
시인의 일·95
시집·96

해설 | 황정산(시인 · 문학평론가)
현실을 건너는 정형의 힘·97
-김제숙 시조의 내재적 초월과 현대시조의 가능성

저자 소개 1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첫 시집 『홀가분해서 오히려 충분한』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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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6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127쪽 | 178g | 125*198*8mm
ISBN13
9791192651484

책 속으로

나물을 무치며
어김없이 돌아오는 식욕을 세워두고
텃밭에 자라고 있는 시간을 훑어다가
날것의 숨을 죽여서 저녁 찬을 만든다
잎사귀로 위장한 모호한 욕망이나
웃자란 가지 끝의 잡념을 떼어내고
한 자밤 생의 자락을 오늘도 데쳐낸다
한 술의 허기를 묵묵히 다독이는
하루치 노동으로 또 하루를 덧대며
온전한 직립을 향해 무릎을 일으킨다
--- 「나물을 무치며 전문」 중에서

의도하진 않았지만 길을 헤매곤 하는데요
사람 숲에 갇혀서 허둥대곤 하는데요
난해한 말의 바다에서 덤벙대곤 하는데요

한 생을 산다는 건 하루를 사는 거죠
청춘의 성급한 걸음 중년의 맹렬한 걸음
잠시만 멈춰주세요 호흡을 다독여요

오늘은 내일의 전조, 친절한 예문이죠
건성 대충 말아요 다정하게 대해줘요
예문에 정성을 쏟아요 본문이 잘 읽혀요
--- 「예문에 대한 예의 전문」 중에서

서너 뼘 길가 땅에 누가 심어놓았나
습지의 토란과 사막의 선인장을
오가며 들여다보니 불평 없이 잘 자란다
장마의 시간엔 토란이 몸을 열고
가뭄의 시간엔 선인장이 몸을 말린다
공존은 이런 것이야 몸으로 말을 건넨다
힘겨운 밥벌이 그만 엎어버릴까
불편한 인연의 끈 그만 끊어버릴까
갈등이 무색해지는 저 단순한 공존 비법
--- 「공존의 방식 전문」 중에서

꽃이 핀 바이올렛 잎사귀 들춰보니
차례를 기다리는 다정한 봉오리들
내 생에
아직 못다 핀 꽃
얼마나 더 있을까
잡고 있는 숨의 줄을 그만 놓아버릴까
환한 꽃만 꽃일 건가 어둔 상처도 꽃인 걸
두 마음
흔들리면서
청춘은 이미 졌네
주저앉은 자리에서 보란 듯 피어나는
신의 전언 눈물꽃 읽어내며 걸어왔네
숱한 날
피고 지던 꽃
노을꽃 되어 찬란하네
--- 「숨은 꽃 전문」 중에서

온몸을 바닥으로 내려놓는 소리
온몸을 바닥에서 일으키는 소리
한 생애 비밀 병기였다
저 찬란한
안간힘

--- 「끙 전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 시인의 말

말[言]들이

저마다의

생을

살고

돌아오고 있다

그 말들을

받아적는다

2026년 6월
김제숙

들어가며: 정형의 기억과 현대시조의 새로운 가능성

시조는 우리의 오래된 정형시 형식이다. 정형이라는 말 속에는 일정한 음수율과 장 구성, 율격적 질서만 들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 삶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자세, 무질서한 현실을 일정한 언어의 틀 속에서 다스리고자 하는 미학적 의지가 함께 들어 있다. 전통 시조가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해온 힘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것은 감정을 무작정 풀어놓는 양식과는 거리가 먼, 감정을 절제하고, 흩어진 생각과 정서를 압축하며, 삶의 균열을 언어의 질서 안으로 끌어들이는 양식이었다.

전통 시조의 세계에는 대체로 조화와 균형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자연과 인간, 개인과 세계, 감정과 이념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물론 모든 시조가 평온하고 안정된 세계만을 노래한 것은 아니다. 사대부 시조에는 정치적 좌절과 유배 생활의 어려움이 있고, 사설시조에는 욕망과 생활의 거친 활력이 있으며, 기녀 시조에는 사랑과 이별의 애절한 감정이 있다. 그러나 그 다양한 변주 속에서도 시조는 대체로 마지막 순간에 어떤 수렴의 형식을 지향한다. 종장의 전환과 마무리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하나의 깨달음, 탄식, 해학, 결의로 거두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시조의 정형은 바로 이 수렴의 힘을 통해 삶의 무질서를 견디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삶은 전통 시조가 기대했던 조화로운 세계상과 상응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기보다 도시와 자본, 노동과 기술, 소외와 경쟁의 장 속에 놓인 존재다. 삶의 속도는 빨라졌고, 공동체의 감각은 약화되었으며, 재난과 참사와 사회적 불평등은 일상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시조가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질문은 피할 수 없다. 정형은 오늘의 복잡한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 오래된 율격은 현대인의 불안과 상처, 사회적 고통과 몸의 감각을 담아낼 수 있는가? 현대시조의 한계와 가능성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응답 속에 놓여 있다.

김제숙의 이번 시조집 『예문에 대한 예의』는 이 질문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답을 보여준다. 그의 시조는 전통 시조의 정형성을 의식하면서도 그것을 박제된 형식으로 보존하지 않는다. 김제숙은 시조의 절제와 압축 그리고 배경과 사물에 대한 간결한 묘사의 힘을 받아들이되, 그 안에 오늘의 구체적 현실을 끌어들인다. 그의 시에는 나물, 맨드라미, 바이올렛, 보름달, 고무신 같은 생활 사물들이 등장한다. 동시에 봉화 광산 매몰 사고,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의 투쟁, 복개된 도시의 개천, 실향민의 상처 같은 사회적 현실도 들어온다. 이처럼 작고 낮은 사물과 크고 아픈 현실이 한 권의 시조집 안에서 함께 그려져 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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