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말을 키우는 목자, 관청의 땅을 경작 해 주었던 답한, 진상품을 한양을 운반하는 성격, 감귤을 재배하던 과직, 미역을 캐던 잠녀, 전복을 잡는 포작 이라는 6가지 힘든 일 (육고역)이 있었는데 보재기는 바로 전복을 잡는 해남이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보자기가 사공의 일을 돕는 성격이나 해군 역할까지 맡게 되면서 해상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일이 너무나 과중한 나머지
고려 충렬왕 2년 (1276), 삼별초 진압을 위해 제주로 쳐들어왔던 원 나라가 일본과 남송의 징벌을 위해 제주에서 배를 만들고 말을 키우 기 시작했다. 원은 160필의 말과 함께 목장을 운영할 목호들을 제주로 보냈다. 100년이 흘러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다. 명나라는 고려 공민왕에게 제주 말 2 천 필을 바치도록 요구 했고 공민왕은 제주에서 몽골의 목호들이 기른 말 2천
부역신과 축 간신의 애증관계는 '먹는 것'과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부억에서 만들어진 음식이 남으면 동시에 버려지고, 버려진 음식은 돼지가 먹고 기름으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거름은 집 한편의 자그마한 우영팟(텃밭)에 뿌려저 각종 채소를 쑥쑥 키운다. 이는 제주의 전통적인 자원순환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경조사에서도 빠져서는 안
흑돼지(1) 흑돼지는 대개 구이로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제주에서는 예 로부터 돼지를 잡으면 구이보다 수육 형태로 조리하는 경우가 많았 다. 삶는 방식이 구이보다 자원을 절약하고, 고기의 모든 부위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옛 제주 사람들은 돼지를 잡으면 솥에 넣어 삶은 후 고기는 건져 먹고, 내장으로는 순대를 만들고, 남은 육수에는 해초나 야채를 넣어 국을 끊었다. 그야말
귀했던 과거 제주에서는 젓갈을 담그는 일 역시 쉽지 않았다. 제주풍토록에서는 "서해처럼 소금밭을 만들려고 해도 만들 땅이 없다'고 했고, 탐라지에도 "해안가는 모두 암초로소 금밭을 만들 만한 해변의 땅이 매우 적다. 또한 무쇠가 나지 않아서 가마솔을 가지고 있는 자가 적어 소금이 매우 귀하다'고 기록돼 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소금을 구해 멜젓을 담근 것일까? 제주
사람들은 믿을 주로 젓갈로 담가 먹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멜것은 쉽게 부패하는 멜을 오래 보관하고자 고안해본 전통 방식이라 하겠다. 보통 가정에서 한 번 담으면 1년 동안 먹는다. 멸치는 젓갈로 담그면 무르지만 꽃멜은 살이 단단해 젓갈로 담가도 육질이 남아있다. 그래서 고기 육자를 써서 육젓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과거 어촌에서 멜 후리 기를 통해 잡은 대량의 꽃멜을 단번에 소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제주 어촌에서는 멜을 중산간 마을로 팔러 다니기도 했다. 함덕 지역에서도 멜을 팔러 이웃 마을로 많이 다녔다는데, 중간에 멜이 부패하여 썩 은 냄새가 나는 바람에 '함덕 썩은 멜장시'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