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부커브 카페인 누군가 들락거리고 있다 오, 칸나 훌라후프 발코니 유령 고동의 길 버블 스토리오후 1시의 빨랫줄 튤립 어머니의 계절 고장 난 트렁크 무한 화서 제2부옹이의 독백 이별에 대처하는 세 가지 방식 시소의 감정 모르기 때문에 은밀한 상자 붕대염소와 말뚝 불면 길의 잠적 두더지 카푸치노 카푸치노 카푸치노간절기 병을 앓다자물쇠를 열다 제3부잠이 환하다 알레르기구성을 위한 구성 매미의 간증 엉겅퀴, 잠시 불러보면 뜬구름 하루 모과 향이 둥글어질 때 나의 큐브 봄의 오류 이방인 삵 봄, 지평선 그 위의 애벌레 라쇼몽의 시간 탱자 제4부셰이크 멍의 소용돌이 1인 극장 냉동 인간 산딸기 랩소디 솜털 집중 깃을 세워요 그런데 여름이 와요 말 백신 하울링 미라 아이 불안한 공중 팝콘이거나 풍선이거나 분장법 해설 황치복
|
|
1. 어둠, 혹은 불협화음의 세계 시인이 지닌 특장점은 바로 현대인들의 미묘한 심리적 구도를 적절한 이미지를 통해서 구축하는 데에 있는데, 불안과 소외라는 이른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의 내면 풍경을 날카로운 이미지를 통해서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은 대체로 어둠에 덮여 있거나 그늘에 휩싸여 있으며, 불안과 불협화음이 지배하는 음울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때, 그의 밖은 그렇게 유폐되었다이제 밖은 바깥의 소관그러니까 그는 스스로 유형지가 되었다유형지의 방식은 미래를 미래답게 하는 것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지금영하의 기온보다 더 차가운 그늘 속에 있다자꾸만 깊어가는 그곳은어둠의 간절기어둠의 구간을 견디는 계절이 창백하다―「냉동인간」, 부분2. 분열된 자아와 낯선 자아, 혹은 분장법으로 살아가기시인이 상정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 또한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다.시인은 문득 자아를 대하면서 친밀한 대상에게서 느끼는 낯설고 두려운 감정인 운하임리히(unheimlich)를 체험하는 것이다. 어둠이 상정하고 있는 무지와 무정형, 무규정 등의 함의가 자아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욕조가 몸을 삼켰다누군가 내 몸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지금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알몸으로 걸어 나가는 이는 누구일까그림자보다 다정하게기억보다 명확하게나를 나보다 먼저 증명하는 이 누구인가바닥까지 침수된 나는 껍데기만 남았다(중략)붉은빛에 에워싸인 나한바탕 춤곡이 나를 붙잡고 흔든다누군가 내 머릿속 마개를 뽑는다물속의 퉁퉁 분 여자와나를 버리고 빠져나간 여자와여자를 보고 있던 여자가 모두 사라진다아파트가 스티로폼처럼 가볍다 ―「누군가 들락거리고 있다」, 부분이 시에는 욕조에 몸을 담그자 욕조에 잠긴 육신의 주체는 그대로 있지만, “누군가 내 몸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자아의 분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3. 면, 각, 모서리의 인간관계, 혹은 경계와 울타리 시인의 이번 시집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직선, 곡선, 각, 면, 모서리 등의 수학적, 혹은 기하학적 상상력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기하학적 개념과 도형들은 주로 인간관계,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는 너와 나의 관계를 설명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국 상자라든가 큐브, 혹은 울타리나 경계라는 입체나 도형의 형상으로 연결되어 인간관계의 종합적인 구도를 설정하는 데에 이르고 있다.주춤주춤 나타난 커브가 나를 삼킨다직진하려는 나의 관성이 휘어진다 액셀을 밟고 있는데자꾸 브레이크를 밟으라 한다 나는 다시 액셀, 너는 브레이크횡단보도에 부서진 감정들이 쌓인다 방지 턱을 넘으며방지 턱을 지우며 나는 방향을 핸들에게 맡기고 구부러진태도를 펴는 일에 몰두한다곡선으로 사라진 네가 처음으로 보였다 내가 내뱉은 비난이 등 뒤에 들러붙어 있었다 너는 떠도는 어둠이었다가가까워지는 빛이었다가 지금 다시 내게 커브의 속성을 건네고 있다너는 매일 커브 속에서 커브를 반복하고 있다반경이 긴 후유증이 나를 길들인다―「커브」, 전문4. 안과 밖, 혹은 시소 위의 우리당신은 안에 있나요 밖에 있나요안에 있는 당신과 밖에 있는 당신은 같은 목소리인가요트렁크처럼 놓여 있는 당신은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긍정도 부정도 아닌 신호음만 냅니다그런 당신과 나는 날마다 안부를 주고 받습니다나는 말을 걸고 당신은 내 손을 잡습니다당신은 왜 내내 지퍼를 꽉 물고 고장 난 트렁크 흉내를 내나요나는 안쪽을 기웃거리는데 당신은 이미 여행을 떠나고 없습니다경쾌한 저녁을 연주하던 도마소리가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돌고만 있습니다안쪽엔 내가 모르는 이정표가, 아니 어떤 목적지가 있는 걸까요기억을 빨리 닫아버리는 당신, 나만 그 언저리를 내내 맵돕니다 ―「고장난 트렁크」, 부분 위의 시에 그려진 나와 당신의 관계란 서로 소통이 안되고 단절되어 있는 안과 밖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적 주체는 “당신은 안에 있나요 밖에 있나요”라고 묻고 있지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신은 철저히 내면의 풍경을 고장 난 트렁크 안에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자폐적인 자아상을 대변해주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안을 확인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자기만의 구조물, 혹은 입방체를 형성하고 거기에 갇힌 기계 문명화된 현대인들의 인간 관계의 한 모습일 것이다.너는 풍선을 불고나는 풍선을 터트리고너는 하늘공원으로 날아오르고나는 풀밭으로 내려오고우리는 교대로올라가는 추락내려오는 상승하늘로 솟는 풀밭풀밭으로 착지하는 하늘순간, 호흡을 가다듬고 서로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고우리는 다시 거품을 만들고 거품을 빼고너는 이륙하는 말들을 허공에 띄우고―「시소의 감정」, 부분 위의 시에서 시소에 올라탄 두 사람의 관계는 안과 밖의 관계와는 또 다른 점에서 현대인들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특징을 보여준다. 안과 밖의 관계란 어떤 울타리를 경계로 한시적으로 분리되어 고립과 분열을 경험하는 관계를 상징한다면, 시소의 관계란 영원히 상대방을 상쇄하고 억제하는 작용으로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이라든가 구조 등을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어느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거나 동일한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로섬게임 (zero-sum game)처럼 한쪽의 이익은 다른 쪽의 손실로 이어지고, 한쪽의 손실은 다른 쪽의 이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영원히 화해 불가능한 대립적 관계의 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하나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저자의 말나를 떠난 말들이야생의 발자국을 가졌기에,이제내 것이 아니다회오리를 가진울음들이내가 모를 방향으로흩어질 것이다난다시 처음이다 2020년 1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