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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 미안하다
# 1 무궁화꽃이 피었습니까 1 | 대마도 무궁화 | 술래 윤순이 | 성기훈 씨 | 탕 탕탕!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까 6 # 2 거짓말이야 | 총과 칼 | 나가 줘 | 홍반장에게 부탁하자 | 개돼지가 개돼지에게 | 이해할 수 없는 블록버스터 | 시인들에게 | 시 해체 | 시인은 시를 쓴다 | 위해서 | 세종로 광화문 | 장군이 왜 여기서 나와요 | 장기표 선생 | 미얀마여, 미얀마의 지식인들이여, 미얀마의 시인들이여 | 동물론 # 3 국수주의자 1 | 국수주의자 2 | 제비 | 새우깡 | 두통약 | 출근에서 퇴근까지 | 병원에서 | 삐뚤삐뚤한 길 | 삶은 계란이란 진부한 표현 | 왕따 나무 1 | 왕따 나무 2 | 나이가 들다 | 내가 책을 읽는 방법 | 길 |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 무명초 | 만약에 | 허홍구의 시 한 편 | 용종 | 내 취향을 말씀드리자면 # 4 절벽의 도시 | 서울, 지하철 2021 1 | 서울, 지하철 2021 2 | 서울, 지하철 2021 3 | 레밍스 | 최후의 통화 | 아들아,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서울, 지하철 2021 7 | 과면증 시작詩作 이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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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골목으로
유년 시절의 그 골목으로 역주행 시간열차를 타고 가면 만날 수 있을까 날이 저물어 구슬치기도 땅따먹기도 가이상*도 시들해지면 누구랄 것도 없이 가위 바위 보! 술래잡기가 시작되는데 술래를 도맡았던 윤순이를 만날 수 있을까 윤순이는 서쪽하늘에 뜬 초승달처럼 눈을 반쯤 뜨고 외쳤겠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우리는 도둑고양이처럼 흔적도 없는 도깨비처럼 형체를 볼 수 없는 그림자처럼 술래가 보지 못하는 틈을 노려 살금살금 한 발짝 두 발짝 앞으로 가 야도!하고 소리질렀겠다 그 골목에 가면 술래잡기하던 유년 시절의 윤순이를 만날 수 있을까 술래가 되어도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고 술래잡이인 내게 언제나 누깔사탕을 쥐어주던 윤순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 p.16~17, 「술래 윤순이-무궁화꽃이 피었습니까 3」 중에서 탕탕 탕!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유유유유유유유유유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유유유유유유유유유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유유유유유유유유유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탕! --- p.20, 「탕 탕탕!-무궁화꽃이 피었습니까 5」 중에서 당신의 것은 장총長銃이 아니라 권총입니다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큼 당신은 행복해집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나를 깨끗이 사용하시면 오늘 본 것을 평생 비밀로 하겠습니다 경부선 하행 휴게소에서 읽은 경고문입니다 당신의 것은 청룡언월도가 아니라 망나니의 칼입니다 그 칼에 당신 목이 잘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피만이 아닙니다 저를 계속 더럽게 사용하시면 오늘까지 본 것을 평생 광고하겠습니다 저를 가까이 하는 것만큼 당신은 불행해집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청와대 바라보며 적습니다 --- p.26, 「총과 칼」 중에서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나타난다는 홍반장에게 부탁하자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 주세요 서울 종각 옆에도, 광화문에도, 왕십리 광장에도 몇 년 째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십 년째 딸을 찾는 아버지가 내 건 현수막이다 혜희 아버지는 단 하루도 딸을 잊은 적이 없다 몇 년 전 현수막 걸다가 추락하는 바람에 허리를 크게 다쳐 큰 수술을 한 아버지다 이십 년 전 대전시 도일동에 살던 혜희가 실종되었었다 마지막 목격자는 마을버스 기사 아저씨다 경찰 수사가 시작됐지만 딸을 찾지 못한 아버지는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 주세요 전국 방방곡곡 전단지를 돌리고 현수막을 내걸고 딸을 찾아 나섰다 딸을 찾지 못한 아내는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실종 사건 공소 시효는 끝났지만 아버지는 오늘도 전단지를 돌리고 있다 홍반장에게 부탁하자 혜희를 찾아달라는 마지막 부탁과 함께 찾아 주는 김에 하나만 더 찾아달라고 부탁하자 실종한 대한민국 민주주의다 그녀를 어디로 납치해 갔는지 꽁꽁 묶인 그녀가 지금 어떻게 죽어 가는지 --- p.28, 「홍반장에게 부탁하자」 중에서 시대의 허리는 동강 나고 정의의 입은 한쪽으로 돌아가고 자유는 꽁꽁 묶여 버릴지도 모르고 정치의 똥구멍은 시도 때도 없이 더러워지는데 고상한 시인들은 꽃이며 노을이며 영혼 같은 말의 사막 위에 모래성이나 쌓겠다고 --- p.31, 「시인들에게」 중에서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 는 분들에게 묻는다 밥 대신 언제 한 번 국수나 먹자고 하면 어디 덧나나 격이 떨어지나 떨어지기는커녕 국수는 밥보다 훨씬 품격 높은 음식이다 배 고플 때 밥은 숟가락으로 마구 퍼먹어대지만 국수야 아무리 급해도 무사가 진검 승부하듯 차근차근 젓가락 키 재 본 후라야 먹기 시작한다 밥 짓고 파는 집은 흔하다 식당이라 부른다 그러나 국수 파는 집은 제면소 또는 면사무소라고 부른다 국수들은 또 얼마나 예쁘고 친근한 별명을 가졌나 국수가 피곤해 침대에 누우면 메밀국수 국수가 꼬불꼬불 아줌마 파마를 하면 라면 국수가 파티를 하면 잔치국수 마음껏 때려라 수타국수 어마무시 무서워요 할매손 칼국수 거친 세상 쫄지 말라고 쫄면 힘껏 밀어 주세요 밀면 눈치 채셨겠지만, 그래서 나는 국수주의자가 되려고 한다 국수國手는 아니고 국시國詩는 절대 아니고 밀가리로 만든 국시가 아니라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즐기는 국수주의자 말이다 --- p.42, 「국수주의자 1」 중에서 삐뚤삐뚤한 길만을 걸어왔다 골목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사지도 않을 거면서 진열된 상품들을 들었다 들여다보거나 흔들어 보기도 하였다 나는 왠지 곧장 난 대로가 나타나면 겁부터 났다 겁은 나를 보호해 주곤 하였다 아니다 나를 보호한다고 잘못 믿고 있다 한참을 걷다가 아차 지나쳤구나 깨달았을 때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이 왔다 내가 골목을 기웃거리는 이유는 혹시 재수가 좋아서 덤으로 물건을 주는 상점이나 경품을 타게 될 수도 있는 행운의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서 다 그건 헛된 꿈이었지만 로또처럼 꽝이어서 비록 휴지가 되더라도 발표 때까지 기대를 품을 수 있다 풍선처럼 터져 갈가리 찢어져도 풍선을 들고 있을 땐 풍선과 함께 높이 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거 말이다 --- p.49, 「삐뚤삐뚤한 길」 중에서 고마우신 대통령 우리 대통령이라고 초등학교 학예회 때 합창을 했던 내가, 한일회담 절대 반대 데모 시위 교문을 뛰쳐나가 겁이 많아 스크램 앞에는 서지 못하고 뒷꽁무니를 따라갔던 내가, 황토현에서 만경강까지 동학군 전적지 찾아다니며 전봉준 장시長詩를 쓰던 내가, 베트남 전쟁터 고보이 너른 들판 판초 우의 쓰고 매복을 하면서도 나는 그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다며 반전시反戰詩를 쓰던 내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지만 말고 탈옥해야만 진정한 시인이라고 주장하던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내가 도대체 구경꾼이 되어 이 시국을 바라만 보고 있나 바라보면서 뒷다마나 칠 궁리를 하고 있나 삐딱선이라도 올라타야 할 텐데 상어는 뼈가 없다고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고 항변이라도 하며 --- p.57,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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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여, 미안하다’는 제목의 머리말에서, 시인은 이 시집을 ‘플랜B’라고 밝혔다. 건방진 표현이다. 시에 플랜A가 어디 있으며 플랜B가 어디 있나. 용감한 게 아니면 생뚱맞은 거다. 그러나 시인이 굳이 ‘플랜B’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시들이 이전에 보아 왔던 시들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 시집의 제목은 원래 『냉소적』 『냉소적 또는 삐딱하게』였었다. 그러다가 마무리 작업을 할 무렵, 갑자기 “오징어 게임”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공개되자마자 온 세계를 폭풍과 같은 화제로 휩쓰는 것을 보면서 저자는 제목을 아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까』로 바꾸었다. ‘피었습니다’ 긍정이 아니라 ‘피었습니까’로 질문하는 것이다. ■ 이 시집의 작품들은,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박인환의 「자본가에게」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김남조의 「조국」, 정공채의 「미팔군의 차」, 김수영의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리고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 「한난계」 같은 작품들 연장선상에 있거나 수원水源을 함께 한다고 저자는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