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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안중근 자서전
일제의 심장을 쏘다
안중근 원저
푸른나무출판 202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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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엮은이의 말

제1부 안응칠 역사
내 이름은 안응칠
죽을 고비를 겪다
세례를 받다
해결사 안응칠
봉변을 당하다
나라를 위해 결심하다
빼앗긴 나라를 찾아서
대한의 의군, 안응칠
벼랑 끝에 몰리다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다
총성이 울리기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제2부 안중근 의사의 삶 엿보기
역사로 보는 안중근 의사의 생애
·안중근 의사의 삶
사진으로 보는 안중근 의사의 생애

책속의 책, 업그레이드 역사 상식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흥선대원군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명성황후의 죽음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아관파천 후 빼앗긴 조선의 이권들
러일전쟁
을사조약과 의병 운동
일진회
국채보상운동
간도와 연해주의 항일 투쟁

저자 소개 1

원저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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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안응칠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이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6세 때 가족이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했으며, 학문보다 사냥에 뜻이 있어 명사수로 성장했다. 16세 때인 1896년 김아려와 결혼해 이후 2남1녀를 두었고, 이듬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세례를 받고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27세 때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들을 모아 국권회복을 도모했다. 이때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평양에서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안응칠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이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6세 때 가족이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했으며, 학문보다 사냥에 뜻이 있어 명사수로 성장했다. 16세 때인 1896년 김아려와 결혼해 이후 2남1녀를 두었고, 이듬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세례를 받고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27세 때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들을 모아 국권회복을 도모했다. 이때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평양에서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이후 연해주로 가서 의병대열에 참가해 대한의군을 조직하고 무장 항일투쟁에 나셨다. 1909년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동의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는데, 이때 이들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태극기에 붉은 피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을 새겼다. 그해 10월 26일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통감부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1910년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그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옥중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으며, 이 중 『동양평화론』은 형이 집행되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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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288g | 153*225*10mm
ISBN13
9788992008969
KC인증
kc마크 인증유형 : 적합성확인

책 속으로

3월의 봄날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올라간 나는 험한 바위가 쌓인 낭떠러지 끝에 이르렀다. 그 벼랑 끝에는 탐스러운 꽃이 피어 있었고, 그것을 꺾으려던 나는 그만 발을 헛디뎌 한참을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내 눈에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나무에 의지해 몸을 추스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만일 두서너 척(약 30. 3센티미터의 길이 단위)만 더 아래로 굴렀으면 벼랑 아래로 떨어져 몸이 가루가 될 뻔했다.
놀라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친구들이 나를 밧줄로 끌어 올려 주었다. 다행히 몸에는 별다른 상처 없이 등만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기뻐했다.
이것이 내가 죽을 고비를 면한 첫 번째 사건이다.
--- p.15

철종이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죽자, 궁궐에서는 왕족 중 한 사람을 골라 급히 왕위에 앉혔다. 그가 바로 1863년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고종이었다. 왕은 아니었지만 왕을 아들로 둔 흥선 이하응은 대원군(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왕을 아들로 둔 왕족의 명칭)으로 뛰어올라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랏일을 다스렸다.
그는 오랫동안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인재를 등용하려 했다. 또 농민들에게 부당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양반이 농민을 괴롭히는 데 이용되어 온 서원을 철폐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은 한때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오로지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경복궁을 화려하게 짓고, 바닥난 나랏돈을 채우려고 각종 세금을 새로 만들어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 pp.37~38

그다음 해인 1909년, 나는 엔치야로 돌아와 동지들과 함께 상의하였다.
“이제까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비웃음을 면하기 힘들 것이오. 그러니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하고, 단체를 만듭시다. 그런 다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우리의 뜻을 이루도록 합시다.”
그러자 모두가 내 말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열두 사람이 모두 왼손 약지를 잘라 그 흘러나오는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大韓 獨立(대한 독립)’이란 네 글자를 크게 적었다. 그리고 ‘대한 독립 만세’를 큰 소리로 세 번 외치고는 흩어졌다.
우리는 여러 곳을 다니며 동포들을 모으고, 신문을 꾸준히 읽으며 나라 안팎의 소식을 알아 가는 것으로 대한의 독립을 준비하였다.

--- pp.92~93

출판사 리뷰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 갇혀 사형 선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죽음을 코앞에 둔 그 시점에서도 안중근 의사는 결코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탄생한 책이 바로 『안응칠 역사』이다.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쓴 이 자서전은 한글이 아니라 한문으로 쓰여졌는데, 이 글이 발견되어 우리말로 번역됨으로써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삶을 보다 가까이에서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어린 시절 가볍고 급한 성격 때문에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자주 들었고, 그래서 이름도 ‘무거울 중(重)’ 자를 써서 ‘중근’이라 지었다고 한다. 왠지 모르게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안중근 의사의 인간적인 모습이 재미있게 다가오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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