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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균(溫庭筠) 8수그대가 내 애간장을 끊어놓던 곳인데살구꽃이 그대를굳게 닫힌 붉은 문에육궁의 미인들은돌아가고픈 간절함이탕자를 보고픈 마음에단장한 얼굴에는떠난 그대를황보송(皇甫松) 5수구슬 같은 눈물이 흐르는데꾀꼬리가 텅 빈 규방 곁에서흥청이던 어느 날 밤에강남의 매실이 무르익던 때를 떠올리고늦도록 물놀이하여위장(韋莊) 15수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고향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네취해서 아름다운 여인과인생이 얼마나 되겠는가응어리진 원망을 품고만나기는 어렵지만 헤어지기는 쉬운데서로 만나기가 더욱 어렵다네우리의 사랑이 끝나고 나면소식을 전할 방법이 없네여인이 근심에 잠겨 있네인생이 얼마나천자를 알현하러 간다네이별가 한 곡에그대와 이별했네깨어 보니 꿈이어서설소온(薛昭蘊) 3수아득한 감정과 깊은 원망을 누구에게그녀에게 편지를 쓰려니이미 그리움으로우교(牛嶠) 7수그대를 원망하며좋은 인연을 부러워할 만하다네모두 매정한 그대보다는 낫네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그대와 내 마음이 같기를그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네지난해를 생각하니장필(張泌) 5수이별의 아픔을 감당하는데그를 찾아 헤맨다네결국에는 소식이 끊기었네오동나무 꽃이 떨어져창가에 기대어 그대를 그려보네모문석(毛文錫) 5수몽롱하게 생각에 잠기어봄날의 원망이 절절한데말의 피가 말굽을 적시지만그 사람만을 자꾸 생각하지만사랑의 감정이 깊어지네우희제(牛希濟) 3수서로 만날 길이 없네그리워했던 일을 다 말하니감정이 다하지 않아구양형(歐陽烱) 5수술이 오르자 다시 기쁨을 나누었네서로 돌아보다원망에 싸인 채물결 소리 따라 사라져갔네꿈속에서 그대를 보고 나니화응(和凝) 3수이별을 원망하며소녀가 구애를 거절하니푸른 버들은고경(顧?) 10수그를 더 이상 찾기 어려우니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네주색에 빠진 것을 근심하는데거침없이 눈물이 흐른다네그대와 헤어진 후그대를 생각하니눈살을 찌푸리고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이 그리운 마음의 끝은 어디인가내 앞에 그대가 없으니손광헌(孫光憲) 10수그리움도 흐르는 물을 따라 멀리 가는데남방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다네맑은 밤이 고요하고하루 종일 그리워하네양관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네문밖에는 봄물이 흐른다네말없이 쓸쓸한 그대를 마주하니그리움이 더 쌓여가네버들 솜이 이리저리이별에 근심하는데위승반(魏承斑) 3수오래도록 그를 만날 수 없네수천 번을 돌아보았네원망과 그리움이 섞여녹건의(鹿虔?) 2수세상에서 그를 찾을 곳이 없다네침상에서 근심하네염선(閻選) 2수슬며시 처량해지네규방의 원한을 감당할 수 없어윤악(尹?) 2수이별의 한은 많고내일이면 또 떠날 것이라네모희진(毛熙震) 5수봄이 저물어 가는데흰나비는 짝을 지어적막한 가운데 원망이 많아그대는 소식이 없으니그대를 생각하니이순(李珣) 7수왜 석양을 바라보며저절로 수심이 쌓인다네이별이 원망스럽기만 하네연이 핀 못을 지난다네봄날의 근심에 잠겨 있네서로 만나도 다시 헤어지네그 사람은 오지 않네해설엮은이에 대해옮긴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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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庭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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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을만드는지식 원서발췌는 세계 모든 고전을 출간하는 고전 명가 지식을만드는지식만의 프리미엄 고전 읽기입니다. 축약, 해설, 리라이팅이 아닌 원전의 핵심 내용을 문장 그대로 가져와 작품의 오리지낼리티를 가감 없이 느낄 수 있습니다. 해당 작품을 연구한 전문가가 작품의 정수를 가려 뽑아내고 풍부한 해설과 주석으로 내용 파악을 돕습니다. 어렵고 부담스러웠던 고전을 정확한 번역, 적절한 윤문, 콤팩트한 분량으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발췌에서 완역, 더 나아가 원전으로 향하는 점진적 독서의 길로 안내합니다.사(詞)란 무엇인가?본래는 악곡의 가사로 쓰이던 것이 민간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곡자사(曲子詞)라고 불리다가 후에 점차 사라고 줄여 부르게 되었다. 초기의 작품은 중당(中唐)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시가 아닌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로 인식하게 된 것은 당말(唐末)부터 오대(五代) 후라고 본다. 작풍은 보통 완약, 호방, 전아, 영물 등 여러 파로 나뉘는데, 시에서 표현하기 곤란한 섬세한 미감(美感)이나 감정을 독백 형식으로 진술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주요 사집으로는 ≪화간집≫, ≪존전집≫, ≪절묘호사≫ 등이 있다.최초의 문인사집 ≪화간집≫사는 민간에서 출발해 문인이 그 창작을 주도하게 되면서 점차 발전했고, 송(宋)에 이르러 극성을 이루며 송대(宋代)를 대표하는 문학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민간사(民間詞)와 초기의 문인사(文人詞)를 거쳐 극성의 단계에 진입하기 이전, 초기 문인사와 전문 문인사의 점이적인 형태를 보이며 극성 단계로 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만당과 오대의 문인사를 간과할 수는 없다. 특히 최초의 문인사집인 ≪화간집≫은 사라는 문학 형식이 문인의 모색 단계에 머물렀던 초기 문인사 형태가 진정한 총체성을 구비해 가는 데 변화와 정리를 단행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화간집≫은 사의 문학 단계를 고찰하는 데 있어 반드시 궁구해야 하는 작품집이다.화간사는 온정균과 위장을 중심으로 작품 모습을 구분하지만 화간사 속에는 화간이라는 명칭에 부합하지 않는 작품도 적지 않다. 그러나 화간이라는 서명을 통해 당시의 사작 특징을 대변하고 있으며, 화간과 거리가 있는 작품 역시 사의 극성기를 준비하는 다양성 전개의 전초가 됨을 알 수 있다.화간사의 이와 같은 가치를 고려해, 온정균과 위장만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며 ≪화간집≫을 운운하는 현실에서 한발 나아가 ≪화간집≫ 작가 18명의 작품을 수록된 비율에 따라 고루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온정균(溫庭筠)은 본명이 기(岐)이고 자(字)가 비경(飛卿)으로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사람이다. 재능이 뛰어났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음률에 정통하고 사조(詞調)에 능숙해 사문학(詞文學) 초기에 사의 격률을 규범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온정균 사의 예술적인 성취는 당시 사인(詞人)들의 선두가 되었다. 그의 사는 대부분이 여성의 요염한 모습과 자태를 묘사하고 있어 제재 면에서 비교적 협소하지만, 호색적이고 선정적인 화간사의 특징을 개시했다.황보송(皇甫松)은 본명이 숭(嵩)이고 자가 자기(子奇)로 절강성(浙江省) 목주(睦州) 신안(新安) 사람이다. 시사(詩詞)에 뛰어났으며 신성(新聲)을 제작했다.위장(韋莊)은 자가 단기(端己)로 섬서성(陝西省)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재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소탈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당소종(唐昭宗) 건령 원년(乾寧元年)에 진사(進士)에 합격해 교서랑(校書郞)이 되었고, 오대 때 촉(蜀)에 들어가 왕건(王建)의 휘하에서 장서기(掌書記)를 맡아 전촉(前蜀)의 건국을 보좌해 승상(丞相)에 이르렀다. 화간사인으로 온정균과 이름을 같이해 맑고 아름다운 사를 썼다.설소온(薛昭蘊)은 자가 징주(澄州)로 산서성 하중(河中) 보정(寶鼎) 사람이다. 왕연(王衍) 때 관직이 시랑(侍郞)에까지 이르렀다. 시와 사에 뛰어났고 재능이 출중했다.우교(牛嶠)는 자가 송경(松卿) 또는 연봉(延峰)으로 감숙성(甘肅省) 농서(?西) 사람이다. 희종(僖宗) 건부(乾符) 5년에 진사에 급제해 습유(拾遺) 등의 관직을 지냈다. 시와 사에 재능이 뛰어났다. 장필(張泌)은 자가 자징(子澄)으로 회남(淮南) 사람이다. 남당의 후주(後主)가 그를 불러 감찰어사(監察御使)로 등용했다. 이후에 후주를 따라 송(宋)에 투항했다. 사 풍격이 온정균과 위장의 작품과 유사하다.모문석(毛文錫)은 자가 평규(平珪)로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 사람이다. 14세에 과거에 급제해 전촉(前蜀)에서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왕연을 따라 당(唐)에 항복했으며, 후에는 후촉(後蜀)을 섬겼다. 사(詞)를 잘 지었다. 우희제(牛希濟)는 감숙성 농서 사람으로 우교의 조카다. 촉에서 벼슬을 했고 왕연 시기에 한림학사를 지냈다. 후에 당에서 옹주절도부사(雍州節度副使)를 임명받았다. 재능이 민첩하고 시와 사에 뛰어났으며, 사의 풍격은 우교와 비슷하다.구양형(歐陽烱)은 사천성(四川省) 익주(益州) 화양(華陽) 사람이다. 전촉에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냈고, 전촉이 망하자 후촉에서 한림학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또한 후촉이 망한 후에는 송을 섬겼다. 조숭조가 편찬한 『화간집』의 서문을 써서 『화간집』의 편집 의도를 설명했다. 화응(和凝)은 자가 성적(成績)으로 산동성(山東省) 수창(須昌) 사람이다. 19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처음에는 후당(後唐)을 섬겼고, 후에는 후진(後晋)에서 재상(宰相)을 지냈다. 평생 문장을 지었는데, 특히 단가(短歌)와 염곡(艶曲)에 뛰어나 곡자상공(曲子相公)으로 불리었다.고경(顧?)은 본적이 상세하지 않다. 전촉에서 왕건 시기에 급사내정(給事內庭)과 무주자사(茂州刺史)를 지냈다. 이후에 후촉에서 태위(太尉)에 올랐다. 시와 사에 뛰어났는데, 그의 사는 진지하고 열렬해 완곡한 아름다움이 감동적이다.손광헌(孫光憲)은 자가 맹문(孟文)이다. 사천성 능주(陵州) 귀평(貴平) 사람이다. 후당에서 능주판관(陵州判官)을 지냈고, 송에 투항한 이후에는 황주자사(黃州刺史)를 역임했다. 오대의 사인 중 작품 수량이 가장 많다.위승반(魏承斑)은 부친 위굉부(魏宏夫)가 전촉 왕건의 양자였다. 때문에 위승반 역시 왕종필(王宗弼)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제왕(齊王)에 봉해졌으며 관직이 태위에 이르렀다. 그의 사는 대부분이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녹건의(鹿虔?)는 후촉 때 급제해 관직이 검교태위(檢校太尉)에 이르렀지만 후촉이 망하자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사를 통해 개탄의 정서를 표출했다. 염선(閻選)은 평민이었으나 남당의 후주에게 사를 지어 바쳤다. 이에 염 처사(閻處士)로 불렸다. 사의 풍격이 모문석과 비슷하다. 윤악(尹?)은 사천성 성도(成都) 사람이다. 전촉의 왕연을 섬겼고 한림교서(翰林校書)를 거쳐 참경(參卿)에까지 이르렀다. 시와 사에 능했는데 특히 사가 맑고 간결하다. 모희진(毛熙震)은 후촉 맹창(孟昶) 시기에 관직이 비서감(秘書監)에 이르렀다. 음률에 정통해 사의 대부분이 신성(新聲)이다.이순(李珣)은 자가 덕윤(德潤)이고 사천성 재주(梓州) 사람이다. 오대 시기 전촉의 수재로 왕연을 섬기다가 나라가 망하자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사의 풍격이 청신하고 우아하며 소박함 속에 아름다움이 드러나 있어 위장의 작품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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