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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해운대
우리들의 낙원 다시 만난 세계 후원명세서 지진주의보 도서관 적응기 바람벽 해설 | 박혜진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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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산 하고 싶다, 인부산.”
민우가 부산시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을 보고 와서 말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고, 부산에서 살고 있는 민우는 앞으로도 부산에서 쭉 살고 싶어 했다. ‘인서울’ ‘인수도권’을 외치며 다른 지역으로 취업을 꿈꾸는 이도 많았지만 지방에 사는 이십대가 모두 똑같은 희망사항을 지닌 건 아니었다. 민우에게 ‘인서울’은 ‘아웃부산’의 다른 말이었다. 부산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살아온 터전에서 추방됨을 뜻했다.--- p.24 「호텔 해운대」 가만히 있지. 꼭 그렇게 나대는 사람들이 있어요. 콘돔은 필요한 애들이 알아서 사겠지, 그걸 꼭 길에서 나눠줄 필요가 있나. 신여성들이 어디서 서울 애들 하는 걸 보고 따라 했는가배. 이야기를 들은 다른 동기들이 말을 덧붙였다. 적당한 비속어를 섞어가면서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렸다.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언니의 마음과 의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언니에 대해서 함부로 떠드는 것도 듣기 싫었다. 언니를 욕하는 이들을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그러다 정문 앞에서 나를 부르던 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언니는 나를 왜 불렀을까. 나를 부르기는 했던 걸까. 언니를 욕하는 동기들과 언니를 외면한 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화를 낼 자격이 있는 걸까. 나는 필통만 만지작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p.89 「다시 만난 세계」 그중 가장 중요한 율법은 절대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진 게 없음을, 무엇이 결핍되었는지를 공공연하게 떠벌리는 일이었다. 결핍은 벗기고 벗겨도 계속해서 껍질이 나타나는 양파와 같았다. 한겹만 벗기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또다시 얇은 껍질이 나타났다. 두 눈이 새빨갛게 되도록 나의 결핍을 벗기고 나면, 그 자리엔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양파의 씨앗, 열매 따위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 p.107 「후원명세서」 주의, 밟지 마시오! 나는 안내경고를 무시하고 구멍 위에 섰다. 제자리에서 걸었다. 걷다가 뛰었다. 두 발로 힘껏 뛰었다. 마르지 않은 시멘트 위에 내 신발 자국이 선명하게 생겼다. 구멍이 다 메워진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안전한지 알고 싶었다. 어느 순간, 땅이 푹 꺼지지 않을지, 조금이라도 틈이 남은 건 아닌지 나는 알아야만 했다. 아아아. 뛰다가 구멍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지면 위로 내 목소리가 부딪쳤다 다시 돌아왔다. 아아아. 다시 소리를 질렀다. 동서남북으로 지면이 흔들리면서 다시 땅이 꺼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고 깊은 구멍 속으로 쑥,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 장갑차가 지나가도 안전할 정도로 지반이 튼튼하고 단단하기를 바랐다. --- p.149 「지진주의보」 자비출판으로 소설집 천권을 찍어 오백권을 우리 집으로 배달시켰다. 택배 상자를 가져온 기사는 이사 비용을 받아야겠다고 대놓고 화를 냈다. 누런 종이 상자 열개에 든 오백권의 책 무게란, 얼추 소형냉장고 한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상자 하나하나를 실어 나른 택배기사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 역시 폐품처럼 쌓인 내 책들을 불태우고 싶었으니 말이다. (…) 내가 책을 냈다는 사실을 가족과 출판기념회에 온 문우들 외에 누가 알까. 그 생각을 하니 가슴 한쪽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 p.190~191 「바람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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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도시 부산, 쌉싸래하면서도 달달한 젊음의 이야기
예리한 감각과 활력 있는 문장으로 빛나는 오선영 두번째 소설집 201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제9회 평사리토지문학대상, 제10회 요산김정한창작지원금 등을 받으며 입지를 다져온 소설가 오선영의 두번째 소설집 『호텔 해운대』가 출간되었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발표한 일곱편의 작품을 엮은 이번 소설집은 부산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서울’이 아닌 ‘인부산’을 하고 싶어 하는 공시생, 지역작가로 불리며 자비출판의 씁쓸함을 견디는 소설가, 부산에 살면서도 해운대 한번 놀러 가기 어려운 사회초년생, 지방대학 출신 시간강사까지. 오선영은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풀어내는 동시에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삶 속에 스민 아픔을 짚으며 우리 사회 보편의 문제를 다룬다.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었던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는 있다는 점에서 공감대와 위로”를 주는 한편 “문제가 여전히 지속된다는 점에서 그 변화 없음에 대한 한계를 직면”(해설 박혜진)하게 하는 이번 작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를 주는 동시에 각자가 서 있는 곳의 위치와 그 위치를 만드는 구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할 것이다. "부산이 고향이라니까, 창문만 열면 바다 보이는 줄 안다니까. 그니까 니도 그딴 거 묻지 말라꼬." 『호텔 해운대』 속 소설들은 대부분 부산을 배경으로 한다. 오선영은 근래 어느 작가들에 견주어 보아도 지역의 숨결을 작품 안에 생생하게 담아낸다. ‘인서울’을 꿈꾸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뿌리 내리고 있는 부산에 정착하고 싶다며 ‘인부산’을 말하는 고시생, 부산 사람에게 돼지국밥 먹어봤냐고 묻는 것은 실례이자 진부한 표현이라고 말하면서도 비싼 레스토랑의 메뉴판을 접고 “누가 뭐라캐도 부산 사람한텐 국빱이 최고제”를 외치며 돌아서는 사회초년생(「호텔 해운대」), 사업을 접고 서울의 집값에 밀려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어도 서울깍쟁이인 척하는 부모와 롯데월드나 63빌딩과 같은 서울의 화려한 단어들로 학교에서 권력을 갖게 되는 딸(「우리들의 낙원」), 유명작가가 되고 싶으면 부산을 벗어나 서울에서 작가활동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또다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싣는 소설가(「바람벽」) 등등. 부산 사투리를 맛깔나게 구사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생활의 중심이 어디든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낄 만한 삶의 고민을 실감나게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와 직장에서 대중교통으로 한시간이 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 가끔은 고급호텔로 호캉스를 떠나고 싶다는 푸념, 떨어질 줄 모르는 전셋값 속에서 자꾸만 도심에서 멀어지는 거주지, 화려한 단어들로 채워지는 친구의 인스타그램 속 해시태그를 볼 때면 불쑥 솟아오르는 경멸과 부러움은 대다수의 삶에 익숙함으로 스며 있다. 오선영은 한발 더 나아가 시간강사, 저소득층 아동 후원, 비정규직, 산업재해, 부동산, 실업, 대학 내 성폭력, 인터넷 커뮤니티 등의 다양한 문제를 세심하면서도 재치 있게 소설 곳곳에 녹여낸다.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해 피해자와 연대하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시간강사 희정은 ‘반대’ 세력의 타깃이 되어 ‘다음 학기 피해야 할 명단’에 오르고 만다. 같은 성명서에 서명을 했어도 남성인 정규직 교수는 명단에서 제외된다. 자신의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희정은 문득 이십대 초반에 만났던 유리 언니를 떠올린다. 유리 언니는 여성운동 동아리 활동 중 교문에서 콘돔을 나누어주다가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되며 잠적한다(「다시 만난 세계」). 한편 「후원명세서」의 윤미는 어릴 적 우연히 저소득층 아동 후원 TV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경험으로 특별전형으로 사회복지학과에 가게 되고 이후 자연스럽게 아동후원 단체에 취업하게 된다.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늘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타인의 시선이 요구하는 것을 따랐던 윤미는, 후원자에게 자신이 가지고 싶던 한정판 운동화의 이름을 말한 후원아동의 사연을 듣고 자신이 흘려보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가 하면 「지진주의보」는 무심코 지나쳤던 흔들림과 지진 경보가 마트에서 판매직으로 근무하던 엄마의 죽음을 불러오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듯 오선영의 소설들은 부산 특유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그려내면서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오래도록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언니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당연히 지켜져야 할 안전수칙이 지켜지지 않아 허망하게 잃은 존재들을 호명하며, 쉽게 훼손되고 조롱되는 가치들을 돌려놓으며 그것들의 자리를 지켜낸다. 그 이름과 자리는 멀지 않다. 오선영의 작품은 언젠가 잃어버렸던 각자의 이름 혹은 그리운 누군가의 빈자리를 불러내며 뭉근하게 오래도록 힘 있는 여운을 전한다. 부산 앞바다가 물씬 떠오르는 이 소설이 남기는 ‘짠맛’은 언제고 우리의 입안을 맴돌았던 삶의 비린맛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말 두번째 소설집을 엮기 위해 그동안 쓴 소설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무심히 지나는 일상들이, 그 도시의 공기와 온도와 햇빛이 소설 곳곳에 녹아 있었다. 모든 것이 허구라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믿었는데. 소설 여기저기에 묻어나는 도시의 색깔들을 보면서 놀랐다. 내게 이곳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는 걸까, 하고 자문해보기도 했다. 내겐 일상이자 보통의 날들인 이곳의 이야기가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도 보통의 이야기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어느 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발걸음이 머무는 모든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로 말이다.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로 이 글들이 읽힐 때,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의 공기와 온도, 햇빛의 농도가 더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어느 곳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지, 그곳의 안부도 넌지시 물어본다. 2021년 겨울 부산에서 오선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