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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사이로 벽시계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은수는 얌전히 눈을 내리깐 채로 힐끔힐끔 명순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은수의 심장 박동도 점점 빨라졌다. 명순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힌 걸 보니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채용 여부를 저울질해보고 있는 걸까. 아니야, 그러기엔 질문이 너무 빨리 끝났어. 간병에 관한 건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잖아. 하긴 경험이 전혀 없으니 딱히 물어볼 것도 없지만. 혹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적당히 거절할 말을 찾고 있는 건가? 저렇게 오래 망설이는 건 결과가 좋지 않다는 얘긴데……. “성적도 좋고 성실한 학생인 것 같은데, 간병 경험이 없어서 그게 좀 걸려.” 명순의 말에 은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놀이기구를 타고서 공중으로 한껏 높이 올라갔다가 갑작스럽게 아래로 질주할 때처럼 심장이 밑으로 쿵 떨어졌다. --- p.17 “이거, 우리 사이 비밀이에요.” 은수가 노인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언젠가 여진이에게도 이 얘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언제 그날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때까지는 자신의 꿈을 아는 사람은 이 노인밖에 없을 것이다. 노인의 입이 꽉 잠긴 금고처럼 어지간해선 열리지 않는다는 걸 은수는 잘 알고 있었다. 조용히 병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노인은 여전히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어쩌면 노인은 이제 뒤처리조차 혼자 할 수 없다는 사실로 자존감에 적잖게 흠집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노인에겐 홀로 상처를 다스릴 시간이 절실히 필요할 것 같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등을 돌리고 누운 노인이 보였다. 은수는 미동도 하지 않는 노인의 여윈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안개가 낀 것처럼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런 제 모습을 들킬까, 은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 p.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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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하지 않은
간병인 노인은, 제 인생을 출발점부터 나락으로 끌어내린 명백한 원인이었다. 그래서 은수는 그의 곁에 머물며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의 간병인을 자처한다. 하지만 소설 속 ‘수상한’ 간병인 은수는 사실 단 한 순간도 수상하지 않다. 친구의 신분을 빌렸다는 게 들통날까 봐 육십 넘은 집사 앞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물 밖에서 헐떡이는 물고기처럼 호흡까지 가빠온다. 보육원에는 얼마나 있었냐는 시덥잖은 질문에도 불안한 듯 눈동자가 굴러가고 몸이 절로 움츠러든다. 복수의 대상인 노인에게는 어떨까. 어쩌면 노인에게 해를 가할 작정도 해야 하는 은수는, 그의 매서운 눈초리와 ‘누구냐’는 파킨슨병 환자라면 숨 쉬듯 입에 달고 사는 말 하나에도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마냥 등골이 오싹하고 그야말로 제 발을 저리곤 한다. 은수는 소설 내내 애틋하다. 무작정 노인의 집에 들어와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은수의 모습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복수를 성공함으로써 쟁취하는 카타르시스나 선과 악의 대립 혹은 악을 처단했다는 정의 같은 것이 아니다. 대신, 사회적 약자의 신분으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은수의 과거와, 복수의 대상을 눈앞에 두고도 그의 굽은 등과 다 새어버린 흰 머리칼에 마음이 움직이고 마는 연약한 은수를 보며, 노인과 결핍을 공유하고 함께 같은 길로 나아가고자 마음먹는 진정한 성장을 응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은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삶에서 진정으로 좇아야 할 가치는 어떤 것인가 생각한다. 나에게 등 돌린 상대를 향한 ‘복수’일까, 아니면 그들과 결핍을 나누고 동행하고자 하는 ‘연대’일까. 불안한 존재를 향한 오윤희의 다독임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 다닐 무렵 보육원에 버려진 은수. 그곳에서 만난 은수와 다를 것 없는 처지의 친구들. 한때 대한민국 판사직을 지내며 광영을 누렸지만 거짓말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결국 공허한 상태로 남아버린 노인. 이들의 공통점은 ‘결핍’이다. 과거와는 관계 없이, 모두 불안한 상태로 머무르고 있는 존재들. 그리고 이는 곧 오늘날의 우리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형태의 결핍을 맞닥뜨리며 산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하루하루가 살아지기보다는 살아내야 하는 버거운 것이 되어버린 요즘,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고 또 그것에 무감해져 있다. 『수상한 간병인』 소설은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수상한’ 희망을 던진다. 결코 싹이 돋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틈에서 여지없이 초록빛이 머리를 내밀고,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서로의 아픔의 크기를 재는 것보다는 서로 위로하며 치유하는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다고. 세상의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의 절박함, 좌절 그리고 연대를 만나며, 우리는 또 다시 지난한 날들을 견뎌낼 희망을 맛본다. 정말로 혼자 남아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이 순간에도 주변에는 나의 손을 잡아줄 특별한 누군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