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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죽음과 삶을 사유하며 밤길을 홀로 걷다
미망과 속죄에 관한 웅장한 대서사 | 『일리아스』, 강대진 고전에 길라잡이 책이 왜 필요한가 | 『오뒷세이아』, 강대진 슬프고 잔인한 이야기의 원형 | 그리스 비극 걸작선 죽음은 들어오고 삶은 물러나는 곳 | 전쟁은 속임수다 - 리링의 「손자」 강의 죽음의 도道, 불로장생 | 노자 도덕경 하상공장구 인생 여정과 함께 완성한 추사체 |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이만하면 내가 군자가 아니었겠느냐?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빼앗긴 들에 가려진 역작 「역천」 | 이상화 환상의 접시 위에 올려놓은 부조리와 실존 | 필경사 바틀비 파우스트를 천상계로 이끈 힘은? | 파우스트 1~2 헤세가 만난 니체와 융 | 데미안 무심하게 피고 지는 대자연 속 전쟁의 비참 | 고요한 돈강 1~2 자유와 신을 향해 올라가는 천 개의 봉우리 | 영혼의 자서전 상?하 중국 문화대혁명의 파노라마 | 민주 수업 읽을 수 없지만 또한 읽지 않을 수 없는 노래 | 초사 무시무시한 공空의 경전 |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 일리야 레핀을 읽다가 죽은 동지를 생각하다 | 일리야 레핀 -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관하여 | 아주, 기묘한 날씨 제2장 의심하고 불화하며 답을 찾아가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런 위험을 무릅써야 하나 | 침묵의 봄 잎, 돌, 물, 이 작은 사색의 창을 열고 | 숲에서 우주를 보다 현생인류는 침입종인가 | 침입종 인간 동서 문명 교류의 흔적 찾기 예술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가 | 다른 방식으로 보기 전 인류가 거쳐 가야 할 성장통 | 풀꽃도 꽃이다 1~2 외모 강박의 늪 |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기 감시와 복종, 그 어두운 세계 | 파놉티콘: 제러미 벤담 먹고 싸려고 사는 게 아니라고? | 밥보다 더 큰 슬픔 불안과 수치심에 바치는 레퀴엠 | 무엇이든 가능하다 악은 정말 나쁜가 | 거대한 후퇴 - 불신과 공포,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잡힌 시대의 길찾기 모호함으로 세상을 휘어잡은 글쟁이 | 백 년 동안의 고독 스페인 내전의 초상 | 카탈로니아 찬가 광기 어린 베트남전, 그 소용돌이 속으로 | 전쟁의 슬픔 우리의 월남전 |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세세하게 기억하기 | 친일과 망각 허구가 만든 힘, 희망 |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에게 극단적 편향성은 없을 것이다 제3장 실사구시, 그 양날의 검을 어루만지다 종교는 윤리와 도덕을 초월하는가 | 신 없는 사회 무엇을 비르투로 삼을 것인가 |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 군주론 너머 진짜 마키아벨리를 만나다 공자가 꿈꾼 세상 |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죽은 고전, 그 흰 목을 어루만지며 |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 김영민 논어 에세이 기획자만이 살아남는다 | 지적 자본론 한 발은 현실에, 한 발은 미래에 | 12가지 인생의 법칙 - 혼돈의 해독제 텅 빈 군중 속에 사는 생기, 그러나… | 부족의 시대 -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개인주의의 쇠퇴 존재는 허무하고, 허무는 내적 혁명을 추동한다 |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금융, 지옥문을 열다 | 근시사회 모든 성장을 즉시 멈추라고? | 이것이 생물학이다 모호하고 짜증나는 묘한 마력 | 칠레의 밤 똥 누며 독립 투쟁하기 | 구원의 미술관 전태일 평전을 읽고 이소선 여사를 만나다 | 전태일 평전 건축의 완성은 소멸이다 | 풍화에 대하여 - 건축에 새겨놓은 흔적 다시 가보고픈 그리운 유리창琉璃廠 |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대중 예술인과 온갖 술 이야기 | 열정적 위로, 우아한 탐닉 미국과 러시아 농촌문학의 선동성 찾아보기 | 개척되는 처녀지 상?중?하 마술적 리얼리즘이 쓴 자서전 |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제4장 침잠과 사색, 읽고 쓰는 즐거움에 매료되다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 |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단편소설이 지닌 맛 | 대성당 삐딱선을 탄 달관의 문장가 |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 연암 박지원 문학 선집 질기고 모질게 순응하기 | 외람된 희망 근현대사를 꿰뚫는 자전소설 | 관촌수필 장어와 소신공양燒身供養 - 『동다송東茶頌』을 읽다가 착각에 빠지다 조명발 받는 맞춤 양복 | 임헌영의 유럽문학기행 흥미진진한 총합본 | 찰스 디킨스, 런던의 열정 슬픔에 빠져 내 하루를 다 바친 책 | 숨결이 바람 될 때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 | 마르케스의 서재에서 다섯 번을 읽어도 다 다르게 읽힌다는 책 | 페터 카멘친트 내 맘대로 책 읽기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라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와 소설의 재미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글 | 악령, 학대받은 사람들, 백치를 중심으로 점성술이 만든 여백, 그 위에 수놓은 욕망 | 루미너리스 1~2 빛도 없고 영광도 없는 길 위에서 | 배를 엮다 돌연변이가 악이 아닌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 종의 기원 글쓰기의 어려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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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진도를 못 나가게 하다가 끝내는 포기하게 만들던 악질적인 책. 질리다 못해 아주 발작을 하게 만들던 미친 책. 이게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가졌던 호메로스에 대한 인상이고 트라우마다. 그 트라우마가 이 책을 통해서 실로 반세기 만에 깨졌다. 고전에 길라잡이 책이 왜 필요한가를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슬프게도 그는 본인이 가진 자유의지를 많이 상실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 p.31 죽고 사는 일은 사람만 겪는 게 아닙니다. 온 세상 삼라만상이 저마다 겪는 일입니다. 온 우주가 이런 일을 매일 매시간 매초마다 겪습니다. 그래도 한강은 유유히, 저 혼자 흘러갑니다. --- p.186~187 나는 견딜 수 없이 허무하고 외로웠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이 다 불쌍해 보이고 살고 죽는 것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인적 끊긴 한강 백사장에 자주 나가 끝없이 걸었다. 그러다 깊고 큰 모래 구덩이를 만나면 그 속에 들어가 시체처럼 몇 시간씩 누워있기도 했다. 잠을 잘 못 잤고 밥을 먹으면서도 내가 한심하고 처참했다. 살겠다고 밥을 씹고 있는 내가 환멸스러웠다. 성적은 점점 떨어졌다. 부모님은 걱정하셨지만, 이런 고통에 빠진 나를 잡아 줄 사람은 내 곁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 객관화되었다. 나는 그 책만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고, 살아있었으며 점점 어른이 되어갔다. 어둡고 광막한 우주, 거기서 옮겨붙은 ‘중2병’이 나를 평생 지배했지만, 오히려 그 병이 나를 더 빨리 어른으로 키웠다. --- p.239 지금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짜증난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면 그때마다 희한하게도 묘한 매력이 일었다. 마치 침묵하는 아타카마 사막을 보며 홀로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어떤 때는 사막의 빈 골짜기에 쏟아지는 빗소리가 온 세상을 더욱 깊은 정적 속으로 끌고 가는 듯한 환상이 머리와 가슴속에서 한꺼번에 올라오기도 했다. --- p.384 자식새끼가 제 품 안에서 죽어도 산 놈은 먹고 싸야 한다. 누구나 태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짓들을 한다. 주린 배를 움켜쥐거나 밀려 나오는 똥오줌을 제 의지로 막으면서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나를 배부르게 해준 사람이 하는 말은 오늘 죽은 제 새끼마저 잊어버릴 만큼 경청하고 수긍한다(「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게 바로 인간의 숙명이고 이중구조의 표피에서만 바라보는 ‘더러운 리얼리티’다. --- p.459 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뭐니 뭐니 해도 ‘내 맘대로 읽기’다.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그렇다. 그러니 당신 마음대로 읽어라. 대신 맹렬하게 읽어라. 그렇게 읽다 보면 길이 생기고 방법에 눈을 뜬다. --- p.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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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을 헤쳐나가는 불화의 항해에서
돛이 되고 닻이 되어준 책 읽기 공영 방송국의 엔지니어로 정년을 마치고 시인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저자가 그간 읽고 쓴 글을 엮어 묵직한 서평집을 펴냈다. 그의 화두인 죽음과 불화에 관한 사색이 주제 도서의 목록을 따라 강물처럼 흐르는 가운데, 활자를 읽는 눈길과 책장을 넘기는 손길, 읽고 쓰는 시인의 사유와 숨결이 곳곳에 물결친다. 때론 숨 가쁘게 몰아치는 번뇌로, 때론 암중모색의 더듬거림으로, 때론 통렬한 일침과 사자 후로 말이다. 죽음과 삶, 불화를 생의 화두로 삼아온 저자는 『일리아스』를 선두로 오뒷세우스의 모험과 같은 대장정을 시작한다. 파리스의 사과로부터 비롯된 트로이아 전쟁은 10년이 넘게 이어지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참혹한 전쟁의 비극이 끝나고 나면 마치 새 생명이 태동하듯 이전과 다른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고, 이는 또다시 훗날 벌어질 살육과 죽음의 예고가 된다. 삶과 죽음이 잇달아 전복되며 나아가는 『일리아스』이야기를 저자는 미망과 속죄의 서사로 읽어내며, 이 책의 부제가 된 문장 ‘삶은 명징하고 죽음은 위대하다.’를 읊조린다. 이어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서양 정신의 뿌리였던 ‘아레테(Arete)’ 또는 ‘비르투(Virtu)’에 대응하는 지금 우리의 정신적 가치는 무엇인지 묻는다. 이러한 물음은 동서양과 시공간, 분야와 장르를 뛰어넘어 종횡무진 오가는 저자의 독서 여정에 계속 등장한다. 손자의 전쟁터에서, 노자의 무위자연에서 죽음의 도를 응시하는 저자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헤세의 『데미안』을 거치며 선과 악, 삶과 죽음의 변증법에 골몰한다. 그리고 『고요한 돈강』에서 묘사된 전쟁의 비참을 바라보며 자유와 신을 향해 나아간다. 무시무시한 공空의 경전『달라이 라마 반야심경』에 이르러서는 생과 사, 존재와 무를 나누던 둑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하듯, 하나의 생이 품을 수 있는 모든 응어리를 토해내듯 처절한 독백을 쏟아낸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바람처럼 파도처럼 유랑하는 전방위적 독서가 저자의 책 읽기는 동서양과 시공간, 분야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이 책은 일반적인 도서 분류 방식이 아닌 저자의 마음 가는 대로 목차를 구성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 또한 전방위적인 독서와 자유로운 생각의 흐름을 타게 된다. 『침묵의 봄』, 『숲에서 우주를 보다』, 『침입종 인간』을 읽으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하는가 하면, 『다른 방식으로 보기』, 『파놉티콘』, 『거대한 후퇴』를 통과하며 개인과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찾기도 한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의 모호함을 즐기고 나서는 『카탈로니아 찬가』, 『전쟁의 슬픔』, 『베트남 전쟁』을 통해 역사 속에서 벌어진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몰아쳐 들어간다. 그는 다시 『호모 데우스』의 유발 하라리를 거쳐 우리 시대의 종교와 윤리(『신 없는 사회』,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나아가 우리의 현실 속 이데올로기와 금융 경제, 노동과 인권, 문학과 예술의 세계를 바람처럼 유랑한다. ‘네게서 떨어져 살아라. 분노를 삭이고 더 고독해져라. 그러면 세상은 그저 연민의 대상일 뿐 아름답지도 사악하지도 않다. 모든 것이 다 허무하고 그냥 헛될 뿐이다.’ - 369쪽 10대 이후로 줄곧 이러한 생각을 품고 살아왔던 저자는 허무와 헛됨의 섭리에 침잠한다. 『호모 데우스』 편의 말미에서도 그는 「전도서」의 말을 인용해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문구로 글을 맺고 있으며, 조정래의 『풀꽃도 꽃이다』 편에서는 저자가 중학생 때 광활한 우주에 비해 모래알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자기 존재를 깨달으면서 일생 허무에 천착하게 된 성장 담을 들려준다. 이따금 실밥처럼 튀어나오는 저자의 개인사를 실타래처럼 감아올리다 보면 그의 삶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과 녹록치 않았던 삶의 궤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단지 허공에 붕 뜬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체계를 두지 않는 그의 전방위적 책 읽기는 세계와 존재의 허무를 받아들이면서도 현실에 발을 디딘 채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탐색하려는 노력이다. 그러한 침잠과 사색 끝에 그는 읽고 쓰는 즐거움에 매료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심오하고 무서운 뜻을 어찌 내 글이 받아낼 수 있으리 주제 도서 외에도 이 책에는 수많은 책의 이름이 언급되고 배경지식이 상술되며 저자의 방대한 독서량과 학구열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작품 자체에 관한 설명과 함께 작품 외적인 사실들까지 다양한 각도에서 흡수하며 저자의 해설에 접근할 수 있다. 문학작품의 감상 또한 작가 연보나 문예사조, 시대적 배경 등과 함께 저자의 소탈한 언어로 쓰인 해설을 읽으며, 그야말로 종횡무진의 책 읽기에 따른 자유분방한 감상의 세계를 즐길 수 있다. 누구나 읽고 쓰면 생각이 깊어진다. 삶의 목적은 번식이나 쾌락에도 있지만 평등이나 다양성에도 있고 이타적 삶의 성찰이나 통찰에도 있다. 이런 것들이 삶의 질을 끌어 올리고 인식의 층위를 고양한다. 문화는 장구한 세월에서 나오고 교육으로 전승되어 새로움을 창조한다. 이 책은 마르케스가 쓴 자서전이다. 이 책 한 권에 그가 살아온 인생과 그가 쓴 책이 다 모여 있다. 읽다 보니 나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 446쪽 저자는 문장과 글을 탐닉하다 깊이 매료되어 직접 글을 쓰게 되었다. 깊이 있고 방대한 독서 경험은 그가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는 겸허의 태도로 글쓰기에 임하도록 해주었다. 성인과 대가들의 수많은 저서를 읽어온 그의 마음 안에는 어쩌면 최고 경지의 문장과 사상 들이 항상 그를 노려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때로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자세로 혹여 있을지 모를 곡해를 막기 위해 절절한 주석을 달며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다. 독자들은 책장을 넘기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깨우침이란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행간에서 목격하게 된다. 세네카는 문장을 사상의 옷이라고 했고, 정몽주는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을 말해야 하고 써야 할 것을 써야 하는 게 문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이라고 해서 꼭 말해야 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써야 할 것이라고 해서 꼭 써야 하는 것이 아닌 것 또한 문장이라고 했다. 이 말은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천예天倪를 말함이니, 문장이란 무심의 경지요 희구하거나 치우침이 없는 절대 순수의 상태라야 함을 말한다고나 할까. 이러니 이 심오하고 무서운 뜻을 어찌 내 글이 받아낼 수 있단 말인가. - 543쪽 고전부터 현대까지, 철학, 인문, 사회, 과학 교양서부터 시와 소설, 수필 등 문학작품까지 68편의 독서 감상을 담은 『내 맘대로 읽은 책』 속에는 저자의 삶과 철학, 우리 사회와 시대를 관망하고 통찰하는 시선이 녹아 있다. 이 책은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독서 버킷리스트로 삼아도 손색없을 훌륭한 양서들의 목록과 주해로 꽉꽉 눌러 채워져 있다. 책 읽기를 통해 어렵고도 즐거운 글쓰기의 세계로 빠져든 저자가 가장 좋은 것을 남김없이 주기 위해 모든 공력을 쏟아부은 이 책은, 독서의 즐거움뿐 아니라 읽고 쓰는 삶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방향타를 제공한다. 머리말 장, 하는 말이지만 고매한 불화不和는 세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창조는 불화의 결과물이고 불화는 의심과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역사를 배우고 익히는 목적은 지나간 불화를 자꾸 반추해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으려 함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고매함을 지향하는 역사와 불화는 변증적이다. 여기 쓴 글에 일정한 형식은 없다. 그저 남 눈치 안 보고 내 맘대로 읽고 내 맘대로 썼다. 따라서 같은 책을 보았지만, 남들과 생각이 아주 다를 수 있다. 내가 의역한 한시도 그중 하나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논지가 없어 횡설수설한다거나 앞뒤 글이 충돌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건 내 생각의 기본이 불화라서 그렇고,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생각을 내 아픈 눈이 본 대로만 썼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내 글이 어찌 졸렬하지 않을 수 있으리. 따라서 이 책이 엉터리이거나 미숙하기 짝이 없다고 흉볼 수 있다. 당연하고 또 당연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읽고 느낀 바가 그렇고 내 식견이 그만해서 그러니 어찌하랴. 부디 읽는 이들의 해량海諒을 바랄 뿐이다. 다만 한 가지, 글을 쓰는 이들과 문장이 가야 할 길은 어때야 좋을까 하는 생각만은 자주 들었다. 평상시처럼, 이 글을 쓸 때도 외래어보다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했다. 어떻게든 조사 ‘~의’를 줄여보려고 했다. ‘~왜라는 이유들로’, ‘~왜라는 이유들이 모여서’, ‘고려받는다는’, ‘느낌들이 모여서’, ‘~되어지는’ 같은 엉터리 표현도 안 쓰려고 노력했다. ‘~적인’이나, ‘~와의(또는 과의)’, ‘~에서의’ ‘~로서의(또는 ~에로서의)’ 따위는 하나도 안 썼다. 작가나 출판사가 쓴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경우는 빼고 하는 말이다. 이런 같잖은 말이 유행하고 사전에까지 올라간 것은 일본어를 무분별하게 번역한 번역자의 폐해가 온 나라를 뒤덮다시피 해서 그렇다. 우리말에 영어를 섞어 쓰는 폐해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위에서 보듯 비문투성이인 서양 번역 어투가 우리 말과 글을 마구 훼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울화통이 터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 외래어를 찾아보면 그 설명은 있되 단어로 번역이 안 된 경우가 허다했다. 번역은 돼 있으나 언중言衆이 외면해서 어색하고 생소한 경우도 많았다. 외국어 사전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마다 방송언론기관과 어문정책을 다루는 정부 부처나 학자들에게 푸념과 쌍욕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내 멋대로 조어造語를 하기는 주제넘은 짓이라 어쩔 수 없이 외래어를 그냥 쓴 적도 있다. 그에 비하면 한자 사전은 편차는 있지만, 상당히 잘 된 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다음이나 네이버 한자 사전에서 ‘서로 상相’ 자를 찾아보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인 설문해자가 설명한 내용을 지금 쓰는 뜻과 함께 적어 놓았다. 또 이게 상형문자인지 회의문자會意文字인지 구분해서 그 뜻과 획수도 잘 정리해 놓았다. 거기에 덧붙여서 ‘상’이라는 글자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지금까지 글자의 뜻과 모양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변천 과정까지 자세하게 써 놓았다. 하지만 국어사전은 이만 못 하다. 도쿄는 나와 있으나 그 명사가 동경에서 도꾜, 토오쿄를 거쳐 토오쿄오로 변하다가 도쿄로 바뀐 과정은 하나도 안 나와 있다. 뉴욕이 뉴욬에서 뉴요크, 뉴우요오크로 변하다가 뉴욕이 된 과정도 마찬가지다. 국어사전에 부르주아는 있지만 시트로앵은 없다. 부르주아를 설명은 해놓았지만 번역한 우리말 단어는 없다. 외국어 사전으로 가야 찾을 수 있다. 외국어 사전도 우리말로 설명만 해 놓고 제대로 번역한 단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사전에서 설명한 내용이 그 말이 지닌 뜻과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예도 많다. 단어는 만들어 놓았으나 보급에 실패한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과학이나 컴퓨터 같은 신기술 관련 용어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대체 지금 어느 누가 USB를 ‘정보막대’라 부르겠는가. 메타버스나 게이미피케이션도 그런 경우다. 인플레이션이나 스테그플레이션이 뭐냐고 물어보면 설명은 할 수 있으나 단어 한마디로 대답은 못 한다. 번역한 단어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자주 쓰는 범용汎用이라는 단어도 우리말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그 대신 ‘새롱거리다, 민틋하다, 바장대다, 지저깨비, 대살지다, 깃고대, 나삼, 우기작우기작’ 같은 우리말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언중에서 사라졌다. 우기작우기작은 국어사전에도 없다. 그렇게 우리말은 죽어가고 있다. 사투리가 사라지는 속도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한글을 전용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교과서와 신문잡지에서 한자를 내쫓은 사람들은 왜 한글조차 살리지 못하는가. 나를 교조적이라 할지 모르겠다. 사전의 근본조차 모른다거나, 세계화도 넘어선 시대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고 있다고 욕할 수도 있다. 그렇게 안 해도 경제력은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간다고 핀잔할 수도 있다. 근대 유럽 문명 용어 가운데 일본이 번역한 말이 아닌 게 대체 몇이나 있느냐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그게 새로 생긴 남의 나라말을 언제까지나 그대로 들여다 쓰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한자가 국어냐고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자를 함께 쓴다는 이유로 일본을 중국에 복속된 나라라거나 중국 사대주의에 빠진 나라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본인에게 한자는 그냥 일본어일 뿐이다. 수천 년 동안 한자를 써온 우리도 마찬가지다. 한자도 한글처럼 그냥 우리 국어일 뿐이다. 베트남이나 싱가포르가 한자를 쓴다고 해서 중국의 속국이라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지금부터 약 11년 전인 2011년 7월 1일자 세계일보에 「한자 알아야 한글 살린다」라는 제목으로 이런 기사가 나왔다. (국립국어원이) 개원 20주년을 맞아 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를 분석했더니 한자어가 58.5%, 고유어가 25.5%, 혼용어가 10.6%, 외래어가 5.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표제어의 69.1%가 한자라는 뜻이다. 국어에서 한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이 해는 한글전용을 전면 시행한 지 41년이 되던 해이고 올해는 52년이 되는 해이다. 한자는 폐지했지만 동음이어同音異語 문제는 해결할 길이 없다. 표의문자와 표음문자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간극 때문이다. 낱말은 전부 한자인데 겉 표기만 한글로 해서 생기는 문제는 어학이나 문학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 천문, 지리, 해양, 역사, 철학은 물론 우리네 생활사 전반에 걸쳐 있다. 그러니 독해력과 문해력, 어휘력은 점점 엉망이 되고 꼴같잖은 외래어 섞어 쓰기나 따라 하기가 사방에서 난무한다. 이런 현상은 역대 정부가 앞장서고 각종 언론 매체가 부추기고 언중이 따라가면서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 자주독립 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대한민국 정부 부처와 그 산하 기관 이름이나 각종 공문서에도 영어가 거침없이 들어간다. 이러니 어문정책을 다루는 정부와 학자, 각종 방송과 언론, 기관에 욕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다. 일석一石 이희승 선생은 시인이자 큰 국어학자였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내 방에서 녹음을 한 적이 있다. 사회자가 물었다. “요즘 우리말 정책이 어떤 상태라고 보십니까?” “한 마디로 개판이지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라면서 베이징, 광저우, 푸저우, 쑤저우, 난징, 창사, 시진핑, 리커창, 저우언라이, 리콴유라고 부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중국은 중궈라고 안 하고 중국이라고 부르는가. 왜 아메리카는 미국이라고 부르며 일본은 니폰이라고 안 부르는가. 런던은 런던이라고 하면서 왜 잉글랜드는 영국이라고 부르는가. 당뇨병을 발음할 때 ‘당뇨병’이라고 해야 맞는가 ‘당뇨뼝’이라고 해야 맞는가. 밟고는 ‘밥고’가 맞나 ‘밥꼬’가 맞나. 발전은 ‘발전’인가 ‘발쩐’인가. 공권력은 ‘공권력, 공꿘녁, 공꿜력’ 가운데 어느 쪽이 맞나. ‘시낻가’인가 ‘시낻까’인가. 방송은 무슨 이유로 된 발음은 모조리 빼려 들며 고저장단高低長短마저 제멋대로 무시하려 드는가. 감독기관은 왜 이런 걸 그냥 두는가. 왜 멀쩡하게 쓰던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고쳐 놓고 이제는 둘 다 쓰라는 짓을 하는가. 헷갈리다라고 쓰던 것을 헛갈리다라고 써야 한다고 눈을 부라리다가 왜 이제는 둘 다 써도 된다는 건가. 이토록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헛갈리게 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참으로 가소롭다. 외래어를 남용하고 국어가 마구 흐트러지면 자국의 정체성과 주체성은 남에게 그냥 넘어가 버리기 쉽다. 내가 이렇게 된소리를 하는 뜻은 이런 우려 때문이다. 세대 간 계층 간에 벌어지는 소통단절을 걱정하는 뜻도 있다. 국가 사회의 분절이나 통합, 또는 흥망성쇠는 모두 언어에서 비롯된다.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그걸 몸소 겪은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가 아닌가. 빼앗긴 우리 말과 글을 되찾고 지키려고 선대들은 목숨을 바쳤건만, 어째서 채 40년도 안 돼 말과 글이 이렇게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단 말인가. 왜 우리 언어를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이자 최소한의 경계선이 할 국어기본법조차 모두가 무시하고 방관한단 말인가. 그저 장탄식만 나올 뿐이다. 돌이켜보면 1970년에 한글 전용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 중간에 한자와 한글을 병기倂記하는 형태로 한자 교육이 잠시 부활한 적도 있다. 신문과 잡지는 1990년대까지도 한자를 함께 썼다. 사라지는 우리말 가운데 몇 가지 사례를 든 윗글은 1980년대 중반에도 쓰던 말이다. 엉터리 영어 혼용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기는 영어권 어학연수가 본격화하면서부터다. 또 광고와 대중가요에 영어가 들어가고 방송이 이를 대량 전파하면서 부추긴 측면도 있다. 한자 혼용이나 병기를 폐지한 시기는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고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대량 보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모든 일은 시차를 두고 하나씩 일어난 게 아니라 거의 한꺼번에 일어났다. 국제화, 과학화, 민주화로 사회가 한 단계 도약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다. 이런 현상은 다양성이나 다양화를 존중하는 후기 근대사회(포스트모던 사회)로 이행하면서 벌어진 역기능이라고 볼 수도 있고, 역대 정부가 경제에만 매달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소홀히 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 깊이 성찰해야 할 일이다. 이 책 가운데 일부는 촛불 혁명 이전에 쓴 글이다. 전태일과 이소선 여사를 쓴 글은 그보다도 훨씬 전에 KBS 노보勞報에 실었던 글을 첨삭해서 재수록했다. 인터넷으로 발간하던 ‘젊은 신문 피플트리’에 잠시 연재했던 것을 조금씩 수정해서 실은 글도 있다. 지금은 폐쇄한 내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던 글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독서 모임 ‘느리게 읽기’에서 함께 읽었던 책에 대한 소감이다. 그걸 여기저기서 그러모은 것이 이 책이다. 내가 쓰던 컴퓨터와 USB가 복원이 안 될 정도로 손상을 입어서 5년 넘게 남몰래 써놨던 글을 거의 다 상실했다. 아깝고 속상하고 화가 났다. 그러나 어쩌랴, 그 또한 내 한계인 것을. 책을 묶는 데도 한계가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식견이 짧아 외국 원서는 단 한 권도 읽지 못한 채 번역본만으로 저변을 삼았다. 또 기술이나 자연과학보다는 인문이나 문학 분야에 치중했다. 음악이나 미술, 건축 분야도 제대로 읽은 책이 없다. 번역에 대한 신뢰 때문에 유명 출판사의 책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출판계 악순환의 고리에 내 스스로 부역했다는 자괴감 또한 감출 수 없다. 사실인지 몰라도 미국에 있는 어느 유명 대학은 4년 내내 독서와 토론, 감상문과 서평 쓰기만 하다가 졸업한다고 들었다. 전공과목이 있는데도 그런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회에 진출해도 모두가 출중한 실력으로 우뚝 서는 인물이 되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왜 아니겠는가. 읽기와 쓰기의 힘은 세상을 좌우하고 인생을 좌우한다. 물질문명은 정신문명을 이길 수 없고 문명은 문화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천과 현실이라는 세속적 주제와 불교적 사유와 참선參禪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연작시 형태로 쓴 게 내 두 번째 시집이다(첫 시집에서 그 일단을 조금 보이긴 했지만). 이 시집이 나오면서 시단詩壇에는 한동안 불교적 사유를 시의 소재나 주제로 삼는 바람이 불었다. 말하자면 시단의 유행이나 역사에 잠시나마 한 획을 그은 셈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한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에 내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두는 게 그나마 좀 위안이 될 것 같아, 잠시 내 얘기를 했다(결코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의도가 아님을 독자들께서 꼭 헤아려주시면 좋겠다). ‘느리게 읽기’에서 함께한 사람들과 이제는 사라진 인터넷 신문 ‘피플트리’를 만들던 관계자들에게 노년의 우정을 보낸다. SK 그룹 김유석 본부장의 전폭적 응원이 없었다면 나는 책을 지금보다 훨씬 덜 읽었을 것이다. 또 후배 방송인 이금희 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출판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두 분께 감사하다. 글의 순서를 정하고 난삽함을 정리해준 편집진과 출판사,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오류를 교정해준 이계진 선배님께 감사드린다. 이 선배님이 교정을 끝낸 원고를 받은 후, 필자 임의로 다른 문장으로 또 고쳤거나 새로 추가한 원고의 분량이 상당히 많다. 그러니 이 책에 오류가 나온다면 그 잘못은 오직 필자에게 있다. 여기에 오르고 싶어 그토록 애태우던 내 글아, 고개 꺾고 서 있는 너희에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구나. 병이 깊어도 모르는 척 혹사한 내 눈아, 망가진 허리야. 너희에게 참 미안하구나. 눈에 좋은 약발운산撥雲散을 찾느라 허둥대는 사이에 우리는 벌써 헤어질 때가 되었다. 자, 이제 그럼 가벼운 마음으로 모두들 안녕히. 2022년 5월, 어느 볕 좋은 날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