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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비교인물
제1장 외교와 독립 1. 연구의 동기 2. 연구의 방법 3. 연구의 범위 4. 인물의 선택 1) 독립정신 2) 평화주의 3) 문필가 4) 실학 5) 독선 6) 세계관 7) 약소국 8) 외교방략 9) 한국과 체코 10) 건국대통령 11) 민주주의 12) 정치사상 제2장 선전과 외교 1. 시대와 인물 2. 선전 3. 외교 제2부 이승만 제1장 왕가의 후예 1. 서세동점(西勢東漸) 2. 유년시절 3. 배재학당 제2장 개혁자 1. 언론인 2. 중추원 의관 3. 대역죄인 4. 감옥학교 5. 감옥교회 6. 출옥 제3장 교육자 1. 상동청년학원 2. 밀사 3. 존 헤이 4. 루즈벨트 5. 한국 선전 6. 박사 7. 헤이스팅스 대학 8. 기독교청년회 9. 망명 10. 한인기독학원 제4장 이승만의 사상 1. 배경 2. 가설 3. 실학사상 1) 실천실학 2) 자유주의 3) 일민주의 4) 실학의 재발견 5) 기독교청년회 6) 기독교 7) 반일 4. 독립사상 1) 통상 (1) 선교와 통상 (2) 통상과 평화 (3) 문호개방 (4) 우호통상과 영구평화 (5) 프린스턴 (6) 권리 대 무력(7) 미국 (8) 독립의 권리 (9) 독립의 조건(10) 통상과 위임통치 2) 교육 3) 외교 (1) 영구평화와 외교 (2) 중립통상 = 자유통상 4) 민주주의 (1) 조약위반 시대 (2) 민주주의 위기 5) 자유 5. 맺는말 제5장 외교독립 1. 삼일운동 2. 동경유학생 독립선언 3. 서울 기미독립선언 4. 필라델피아 독립선언 5. 대통령 6. 워싱턴회의 7. 하와이 8. 만주사변 9. 중일전쟁 10. 태평양전쟁 11. 한인자유대회 12. 국무성 제6장 국가건설 1. 제2의 독립운동 2. 건국 3.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부 마사리크 제1장 마부의 아들 1. 체코 약사 2. 절대주의와 자유주의 3. 유년시절 4. 견습공 5. 김나지움 6. 비엔나 대학생 7. 철학박사 8. 비엔나대학 강사 제2장 개혁자 1. 대학교수 2. 언론인 3. 문서사건 4. 평화주의자 5. 국회의원 6. 민족자결주의자 제3장 교육자 1. 비판적 문필가 2. 국제주의자 3. 유대인의 친구 4. 정당의 개혁자 5. 제1차 미국강연 6. 종교자유 옹호자 7. 다시 국회로 8. 제2차 미국강연 9. 학문자유 옹호 10. 발칸의 합병 11. 세튼-와트슨 12. 외교정책 비판 13. 발칸의 친구 14. 사실추구 제4장 마사리크의 정치사상 1. 철학과 기독교 1) 역사철학 2) 기독교민주주의 3) 도덕주의 4) 인본주의 2. 평화사상 제5장 외교독립 1. 제1차 세계대전 2. 마사리크의 비결 3. 마사리크 비망록 4. 마사리크의 유럽지도 5. 마사리크의 망명 6. “마피아” 7. “환상적 방략” 8. 도덕과 인본주의 9. 킹스 칼리지 10. 선전포고 11. 파리 공동성명12.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 13. 아들의 사망 14. 반 오스트리아 정서 15. 독립운동자금 16. 선전 17. 전쟁목적 18. “빛나는 성공” 19. 페트로그라드 20. 체코슬로바키아 포로 21. 암투 22. 러시아 3월 혁명 23. “독재자” 마사리크 24. 영국 정보원 25. 케렌스키와 체코포로군대 26. 체코포로군대의 승전27. 체코군단 28. 루트 사절단 29. 마사리크와 볼셰비키 30. 러시아 11월 혁명 31. 연합군 32. 대장정33. 체코군단의 불개입 34. 로마의 피압박민족대회 35. 마사리크와 마트 36. 마사리크의 도미 37. 피츠버그 합의 38. 체코군단의 동진 39. 체코군단의 반란 40. 식스투스 사건 41. 국내의 변화 42. 마사리크와 윌슨 43. 미국의 출병 44. 독립선언 45. 중부유럽연합 46. 두 개의 정부 47. 프라하 혁명 48. “마지막 순간” 49. 마사리크의 귀국 50.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탄생 51. 외교와 무력 제6장 국가건설 1. 마사리크 신화 2. “민주주의 챔피언” 3. 유럽정치의 변화 4. 국내문제 5. 프라하 “궁성” 6. 대통령청 7. 외무성 8. 금요인사 9. 마사리크 전설 이승만 연보 토마스 거리그 마사리크 연보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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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시대를 만드는가 아니면 시대가 사람을 만드는가. 이 질문은 진부하고 상투적이기는 하지만 그 대답에 앞서서 사람과 시대가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어서 한 사람의 전기는 반드시 시대상황이 뒷받침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약소국가 출신인 이승만과 마사리크의 외교독립론은 식민주의·제국주의 말기의 산물이다.--- p.69
이승만은 휴전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는 한민족과 함께 벼랑 끝에서 다 함께 죽을 정도의 결의를 보였다. 마지막 수단으로 그는 반공포로를 연합국과 상의도 없이 석방하였다. 공산권은 분노하여 휴전회담이 결렬될 위험이 생겼다. 미국은 비로소 이승만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으면 휴전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이승만이 원한 것은 한미상호방위동맹, 군사원조, 경제원조였다. 군사동맹은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 소련, 일본, 그 어느 국가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다. 이승만의 뇌리에는 일본의 재침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승만은 말했다. “이제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우리의 후손들은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체결을 직접 지켜 본 현장에서 그는 아마 70년 전 조미우호통상조약을 둘러싼 조국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 조약으로써 그가 평생 고집하던 외교방략의 화룡점정이 되었다.--- p.404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하는 가운데 수많은 강의를 듣고 독서 삼매경에 빠지면서 마사리크는 청년기 특유의 신체적 유혹의 위기를 경험할 새가 없었다. 체력유지를 위한 운동도 할 시간이 없었지만 대신 소콜 운동(Sokol movement)에 참여하였다. 그것은 1862년에 창립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을 내걸은 체육 운동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합스부르크 지배하에 구심점 없었던 체코 청년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회운동이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체육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운동으로 체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체코 이민사회에까지 퍼져나갔다. 이것이 후일 그의 독립운동에 크나큰 힘이 된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으리라.--- p.428 마사리크는 1936년까지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이 되었다.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모르는 외국인들도 마사리크는 알았다. 마사리크는 하나의 원칙이 되었다. 민주정치의 화신이다. “우리는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보다 더 민주적이다. 우리는 서양 민주주의 요새이다. 이것을 지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또는 역사의 의미이다.” 차페크는 강조했다. “마사리크는 영원하다. 그 안에서 용기, 지혜, 미, 위대, 인간과 정신의 고전적 모범을 본다. 그는 신의 손의 도구였다. 마사리크가 건설한 국가 기초에서 신 그 자신이었다.” --- p.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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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마사리크의 삶과 사상 조명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넬슨(Lord Horatio Nelson 1758-1805) 제독을 이순신(汝諧 李舜臣 1545-1598) 장군에 대조하는 것이 가능하듯이 이승만을 외국인물과 비교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Syngman Rhee 1875-1965)은 세계 최초의 외교독립 주창자이자 이를 실천한 인물이며, 여기에 필적할만한 사람이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 대통령 토마스 게리그 마사리크(Thomas Garrigue Masaryk 1850-1937)이다. 두 사람 모두 강대국에 주권을 빼앗긴 약소국의 건국 대통령으로서, 무력이 아닌 외교를 통해 조국의 독립을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의 유사점을 보이고 있어, 큰 주목을 끌고 있다. 미국을 주된 외교의 대상으로 삼았고, 외국어에 능통했다는 점도 놀랄 정도로 같다. 두 사람 모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정치사상에 크게 기대를 걸었고,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신봉한 점에서도 같은 길을 걸었다. 이승만은 일본의 멸망을, 마사리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멸망을 각각 예언했다는 점 역시 같다. 한국과 체코의 외교독립투쟁 과정 역시 상당히 유사하다. 예를 들면 이승만과 마사리크의 외교독립운동을 도와준 사람들이 중복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허버트 밀러(Herbert Miller 1875-1951) 교수다. 그는 한국의 독립과 건국을 도운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1919년 4월 열린 ‘제1차 한인회의’와 이보다 6개월 앞서 열린 체코의 ‘중부유럽선언 회의’가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것도 유사하다.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민족은 1620년 이래 1918년까지 거의 삼백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식민지였다. 마사리크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서 1918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불과 4년 만에 선전외교방략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민족을 묶어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시킨 ‘전설적인’ 인물이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복잡다기한 다민족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 (Austro-Hungary Dual Monarchy)의 신분제 사회에서 식민지 슬로바키아 농노 출신 마부와 [체코] 모라비아 하녀 출신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지극히’ 어려운 가운데 스스로 몸을 일으켜 프라하 대학 철학교수가 되었음도 범상치 않거늘, 일개 교수의 신분에서 4년 만에 건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에 더하여, ‘거의 혼자의 힘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필설에 의지한 선전외교방략으로 실현시켰다는 역사가 동 시대 유럽인들에게 ‘동화 (fairy tale)’ 또는 ‘신화(myth)’가 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마사리크는 민주주의 정치가로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업적은 하루 밤 사이에 절대주의 중부유럽 한복판에 민주주의 국가를 창설했다는 점이다. 고대 로마제국과 신성 로마제국을 천년 동안 계승하여 유럽역사를 좌지우지하였던 절대주의 삼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호엔촐레른 왕조, 로마노프 왕조- 의 붕괴를 논리적으로 예견하고 그 실현에 앞장섰으며 그 가운데 합스부르크를 민주공화제로 대체한 것은 마사리크 교수의 작품이다. 터키의 오스만 왕조도 이 목록에 추가된다. 고대 로마에서 시작한 시저, 카이저, 자르, 술탄의 칭호도 여기에서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 수상은 “제1차 대전의 진정한 승리자는 마사리크 교수”라고 말했다. 절대주의 대 민주주의. 이것이 마사리크 교수 필생의 투쟁이었다. 당연히 전체주의에 맞서서 민주주의의 첨병이 되었던 이승만을 마사리크와 비교할 수 있다. 마사리크에 있어서 민주주의란 귀족주의[절대주의]의 반대어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이승만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전체주의의 반대어였을 것이다. 마사리크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내전에 휩쓸린 체코슬로바키아 반공포로를 이용하여 연합국, 특히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협상을 벌인 것으로 그의 외교독립에 대미를 장식한 것과, 이승만이 한국전쟁의 반공포로를 이용하여 마침내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Dwight D. Eisenhower 1890-1969)에게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내어 그의 외교정책의 백미가 된 것도 마사리크에게서 암암리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제1차 대전 때 러시아전선에 갇힌 체코슬로바키아 반공포로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미국을 위시하여 11개국이 3년간 개입하였으며, 한국전쟁에서도 미국의 선도 하에 16개국이 3년간 참전하였다는 점도 흥미로운 비교이다. 이승만과 마사리크가, 비록 한 사람은 몰락한 왕가의 후예였고 다른 한 사람은 농노의 아들이었다는 점은 다르지만, 비슷한 점이 허다하다는 데에 있다. 일찍이 정한경(Henry Chung 1891-1985) 박사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토마스 마사리크처럼 이[승만] 박사는 정치가이며 학자이다”라고 말했다. 이 유사점을 더욱 확장해 보면, 국내에 가족을 남겨두고 해외에 거점을 두었던 망명 독립지사, 개혁가, 언론인, 박사, 교수, 학자, 대의원, 저술가, 외교가, 웅변가, 선전/선동가, 평화주의자였다. 그리고 마사리크와 이승만은 모두 높은 이상을 지닌 현실주의자였다. 두 사람 모두 한 때 동지였으며 동시에 정적이었던 인물들의 의문스런 사망과 암살 미수를 둘러싼 ‘세간’의 소문에 휘말렸다. 두 사람 모두 독립운동 자금 유용의 구설수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독립운동 기여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도전 받았다. 부인도 모두 외국인이었으며 독립운동 과정에서 전염병으로 아들을 잃었다는 점도 같다. 마사리크의 남은 아들이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커다란 실망이 되었고 이승만에게 첫 번째 양자가 비극이 되었던 사생활까지 닮았다니! 사적으로 어머니의 종교를 버리고 ‘개신교 입국론’을 주장한 점도 공통적이다. 마사리크가 독립국가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68세였고 이승만 역시 그 자리에 올랐을 때 73세였다.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 자리는 평생을 대의에 바친 노 독립투사들에게 어울리는 자리였는지 모른다. 이승만은 책임감이 강한 업적지향의 노력가였고 마사리크 역시 그에 못지않게 절제와 도덕을 강조한 인물이었던 만큼 모두 금욕(금연과 금주)주의자에 높은 뜻을 간직하였으면서도 생활은 소박하였다. 그럼에도 지성만큼 청결과 외모를 중시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국제적 외교무대를 항상 의식하며 조국을 대표하는데 손색없는 국제신사가 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말 한국 독립군의 청산리전투 승리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군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스러운 일이다. “[제정]러시아 정부에 의해 무장한 3만 명의 한국인이 린 장군 지휘 하에 [제1차 대전의 러시아] 동부전선에서 싸우고 있으며 러시아 정부가 해체되자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들과 함께 시베리아로 이동하면서 볼셰비키와 싸우고 있다. 동부전선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또는 다른 민족만큼 많은 한국인이 싸움터에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사실이다”라는 서재필(松齋 徐載弼, 1864~1951)의 발언에 비추어 볼 때 더욱 이상스럽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할 때 체코슬로바키아의 헌법을 참고했던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다. 배민수(1896~1968)가 이승만에게 마사리크의 최측근이었던 외무상 베네시(Edvard Benes, 1884~1948)를 소개하려 한 일화도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