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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시(北征詩)
1. 내가 중주로 가려고 하는데 송덕중이 시로 전별하니, 그 운에 따라 시를 지어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2. 이태규가 북정서시를 준 데 대해 감사하며 3. 마산항에서 기차를 타다 4. 대구 5. 한양가 6. 송경가 7. 평양을 지나며 8. 용만을 바라보며 9. 안동현 10. 맹보순·권병하와 함께 원보산에 올라 ?11. 권병하에게 주다 12. 맹보순에게 주다 13. 맹(孟)·권(權) 두 벗과 이별하며 14. 봉황성을 지나며 15. 봉천으로 가는 길에서 16. 봉천부 17. 신민부로 가는 길에서 18. 심양을 지나며 19. 산해관에 올라 20. 천진행 21. 천진 천화잔(天和棧)에서 고향의 벗들을 생각하며 22. 연태 23. 이종예(李鐘豫)에게 드리다 24. 이종예에게 주다 25. 고숙(高塾)에게 답하다 26. 유채년(劉采年)에게 답하다 27. 유채년의 시에 부쳐 28. 국자감 29. 중화문 30. 신무문 31. 풍주 32. 만수산 33. 해전도 34. 만생원 35. 대종사 36. 고려빈 37. 두 벗을 전송하며 회포를 읊다 38. 요동관에서 이양래를 만나다 39. 조용훈에게 답하다 40. 공태보에서 성종호(成鐘頀)를 방문하다 41. 곡부로 가려던 때, 산리(山裏)의 앞산을 오르며 이승희, 이광룡, 이문주 제공과 족손 경래와 함께 읊다 42. 곡부에 간 날 동반자가 없음을 한탄하며 43. 황하가 44. 태산가 45. 주공묘(周孔廟)를 알현하다 46. 제학(提學) 공상림(孔祥霖)에게 드리다 3수 47. 북지 48. 봉천관에서 이승희에게 주다 49. 곽종석(郭鐘錫)의 파리 장서를 듣고 기뻐 읊다 50. 방가 북정일록(北征日錄) 4월 5월 6월 필담 이종예(李鐘豫)와의 필담 서(書) 제학(提學) 공상림(孔祥霖)에게 드리다 곡부 성탄일(聖誕日) 여러 선비[章甫]들에게 주다 제문(祭文) 공자묘에 드리는 제문 이승희에게 드리는 제문 부록 행장 해설 옮긴이에 대해 |
趙貞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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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차 안에서 밖을 보니
달리는 것이 모두 번개 같구나 낮에는 날마다 만 리를 달리니 누가 서행하는 자의 고통을 알겠는가 我觀汽車上 走者皆電物 白日日萬里 誰知徐者疾 ---「마산항에서 기차를 타다(馬山港登汽車)」중에서 압록강 물은 넓기가 바다와 같고 원보산의 빛은 따뜻하기가 봄과 같네 중국에는 안동이라는 큰 현이 하나 있는데 현령과 도태(道台) 여러 관직을 겸했네 양국 상인들의 서로 소통하는 곳 누가 알았으리, 옛날의 황량한 만(灣)이었던 것을 러일 전쟁이 일찍이 언제였던가 만 리의 백골이 들판의 봄풀 속에 가득하네 상세(上世)의 어진 이들은 전쟁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앉아서 사해(四海)의 백성을 내 백성으로 여겼던 것을 鴨江之水大如海 元寶山光暖似春 中有安東一大縣 縣尉道台兼雜官 兩國商人通貨處 孰知在昔爲荒灣 俄日戰場曾幾日 萬里白骨春草原 上世仁人不貴戰 坐令四海民吾民 ---「안동현(安東縣)」중에서 2467년 을묘(1915) 8월 27일에 후학 조선인 조정규(趙貞奎)·이광룡(李光龍)은 심의(深衣)와 고관(古冠)에 목욕재계를 하고 지성(至聖) 선사(先師)이신 공부자(孔夫子) 앞에 재배하고 경건하게 고하옵니다. 오호라! 부자께서는 천지(天地)이시며 일월(日月)이시옵니다. 천지가 보존되면 부자님의 도(道) 역시 더불어 존재하고, 일월이 밝으면 부자님의 도 역시 함께 밝아집니다. 지금 공자님의 도가 어두워지고 또 장차 없어지려 하니, 또한 천지일월(天地日月)이 천지일월이 되지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천지는 천지이고 일월은 일월이듯이, 부자의 도 또한 장차 만세의 문명이며, 그 책임은 후인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정규 등은 평생토록 책 속에서 공자님의 교훈을 친히 듣고, 스스로 무거운 책임을 느꼈습니다. 몸소 국가가 무너지고 어지러운 때를 만나, 우리의 문화가 장차 타락하고, 천하가 오랑캐와 금수가 될 것이 두렵습니다. 한 부의 춘추마저도 강명할 곳이 없어서, 만 리 바다를 건너와 성묘(聖廟)에 배알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에서 음덕(陰德)으로 은밀히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아! 감히 아룁니다. ---「공자묘에 드리는 제문(곡부)」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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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나라 잃은 유학자의 고뇌 서천(西川) 조정규(趙貞奎, 1853∼1920)의 자(字)는 태문(泰文)이고, 본관은 함안이다. 서천(西川)은 그의 별호다. 조정규가 살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 사회는 계속되는 외세의 침범과 함께 서양 문물의 유입, 사상의 주입 등으로 변화가 컸던 시기였다. 특히 국권 피탈이라는 전대미문의 황당한 사건을 겪으며, 조선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그는 “종묘와 사직이 무너지고, 백성의 삶이 짓밟혔다”라고 통곡하고, 자고산으로 들어가 『춘추』를 강론해 『주역』의 이치를 완색했다. 그러다가 오랑캐가 어지럽힌 땅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거라 여기고, 만주에 들어갈 뜻을 세웠다. 중국 체험의 시적 구현 그는 1913년과 1915년,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다녀온다. 『서천선생문집』에 수록된 그의 <북정시>와 <북정일록>은 이 중국 여행의 산물이다. 그는 1913년 4월 16일 마산항을 출발해 6월 29일 집으로 돌아와 한천재에 들어가기까지 총 74일간의 여정을 자세히 글로 남기고, 특기할 만한 경험을 시로 기록했다. 특히 일기에는 다녀갔던 장소와 인물에 대해서만 기록했던 반면, 한시에서는 다녀간 장소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그 공간과 한반도와의 연관성도 연상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만났던 인물들에 대한 기대 등도 한시로 표현했다. 이는 그가 평소 산문보다는 시를 선호하고, 또 시교설(詩敎說)의 입장에서 그가 체험한 것들을 남겨 후대의 교훈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현실과 유가 문명 재건의 필요성 서천의 중국 체험은 중국에 대한 그의 동경과 자손들을 안주시킬 수 있는 곳이라는 기대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목격한 중국의 현실은 달랐다. 공맹의 학문이 면면(綿綿)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상업을 우선으로 여기고 있는가 하면 서양의 학문을 더욱 숭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은 내적인 혼란을 겪으면서 강상이 무너지고, 한 중국 안에서도 남과 북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조정규는 이러한 중국의 현실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바라보고 시를 통해 중국의 ‘민낯’을 폭로한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실망을 딛고 유가 문명 재건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것이 근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시기, 외세에 의해 국권을 상실해 가는 위기에서 유학자로서 그가 선택한 국권 회복의 방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