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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제1장 여주의 인문 지리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인 여주 4대강 사업으로 국가 예산 1조 901억 원이 투입된 여주 [참고] 4대강 사업 여주군 관련 일화 118년 만에 군에서 시로 승격한 여주 [참고] 여주시 승격 추진 주요 일지 [참고] 여주시 승격 관련 일화 36년 만에 제 생일을 찾은 여주 시민의 날 100년 만에 돌아온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 비 [참고] 원종대사혜진탑 비 비신의 귀환 일화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역적이 많았으나 읍호가 강등되지 않았던 여주 감세 혜택 폐지와 세금 과징에 일어난 여주 농민항쟁 여주 시내를 배를 타고 다녔던 1972년 대홍수 여주 시내 가옥 1,000여 호를 불태운 1856년 대화재 수학여행 온 49명이 익사한 조포나루의 나룻배 침몰 사고 승객 30명 중 26명이 사망한 섬강교 버스 추락 사고 제2장 여주 관련 인물 남북한 첫 축구대회를 열고 여주대학교를 설립한 정동성 대하 역사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분야를 개척한 유주현 퍼펙트 골드란 용어를 탄생시킨 올림픽 명궁 김경욱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10년간 역임한 조성환 부인, 딸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김구의 최측근 엄항섭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홍병기 여주 3.1운동을 시작한 조병하와 뒤이은 독립운동가들 병자호란 시 김화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홍명구 임진왜란 시 고래산 전투에서 순절한 열녀 청풍김씨 강물에 빠진 아버지를 구하려다 함께 죽은 효자 길수익 장희빈 때문에 폐, 서인 되었다가 복위된 인현왕후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를 연 순원왕후 소현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해 공주가 되지 못한 경순군주 실학의 선구자로 우리나라 최초 역사 지리서를 쓴 한백겸 왕후의 청탁을 거절한 북벌 추진 훈련대장 이완 당쟁으로 아버지부터 손자까지 4대가 죽임을 당한 김창집 우리나라 최초 외국인 신부 주문모를 입국시킨 윤유일 한국화의 대가로 월전미술관을 세운 장우성 헌종 앞에서 소리를 한 판소리 명창 염계달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가 장원급제한 민진장 법 위반을 처벌하면서도 정리와 의리를 지킨 민진후 살인 강도범이 역모 죄인으로 조작되어 처형된 강변칠우 5.16 군사 정변 이후 정치범으로 사형당한 임화수 부록 1. 4대강 살리기 사업 관련 자료 필자의 조선일보 독자 투고란 기고 기사(조선일보 2010.6.22.) 4대강 사업 관련 사진 부록 2. 여주시 승격 관련 신문 기사 이범관 전 국회의원의 기고(경인일보, 2012.7.17.) 백연택 여주시승격특별추진위원회위원장 관련 기사(중부일보, 2012.7.24.) 이인순 여주 시승격특별추진위원회 부위원장 기고(여주신문, 2012.7.13.) 노성형 전 육군대학 육군종합군수학교 교수 기고(여주시민신문, 2012.6.20.) 임영헌 여주군 인재육성장학재단 이사장 기고(경기일보, 2012.6.11.) 방광업 전 경기도시공사 경영관리본부장 기고(경기일보, 2013.9.23.) 정용진 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기고(여주신문, 2013.9.9.) 여주시 승격 신문 기사(조선일보, 2013.9.23.) 여주시 승격 신문 기사(중부일보, 2013.9.23.) 부록 3. 여주 3.1운동 관련 자료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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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가 신라 진흥왕 11년(550)에는 신라 영토가 되었다. 진흥왕 17년(556)에는 여주에 군사기지로 골내근정(骨乃斤停)을 설치하였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을 구주오소경(九州五小京)으로 개편할 때에도 골내근정을 한산주(漢山州)에 속한 군사기지로 유지하였다. 이 골내근정은 북성산(北城山)의 신지리성지(新池里城址)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여주는 임진왜란 때 여러 번 등장한다.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조선군과 싸웠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은 여주와 양근(양평), 용진(양평 양수리)을 거쳐 동대문을 통하여 한양으로 입성하였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인 여주」중에서 9월 13일 경기도 의회에서 “여주시 설치(안)”을 찬성 의견으로 의결하고 경기도는 동 건의서를 행정안전부에 제출하였다. 행정안전부의 여주시 설치(안) 업무 담당자들은 여주 시민들의 시 설치 찬성 비율(61.1%)이 상대적으로 낮은 점, 연말에 있을 제18대 대통령 선거(12.19)와 그 이후 정권 교체기인 점 등을 고려해서인지 시 승격을 위한 후속 조치에 소극적이었다. 그래도 주위에서 여주시 승격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분들이 있어 시 승격은 예정대로 추진될 수 있었다. 행정안전부에서 여주시 설치 요건 현지실사(3회), 여주시 설치 법률(안)의 입법 예고(2013.1.16~2.25,), 국무회의 의결(2013.3.26) 등을 거친 후 동 법률(안)은 국회에 송부되어 국회 본회의 의결(5.7)을 거쳤다. 2013년 6월 4일 공포된 “경기도 여주시 도농 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제 11,850호)” 부칙(제1조)에 따라 9월 23일 여주시가 출범하였다. ---「118년 만에 군에서 시로 승격한 여주」중에서 1457년(세조 3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 역모 사건으로 경상도 순흥 도호부가 폐지되고 그 영역은 인근의 군현으로 분산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무신년(戊申年)인 1728년(영조 4년)에 이인좌, 박필현, 심유현 등 소론 강경파와 남인 정희량 등이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경종(1720~1724)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련되어 있다며 영조를 제거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자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 난(亂)은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난(戊申亂) 또는 반란 주동자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역적이 많았으나 읍호가 강등되지 않았던 여주」중에서 북내면 천송리에서는 신륵사 승려 김용식 주도로 200여 명이 모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향하다가 남한강 변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김용식은 선두에 서서 무명천으로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선창하는 등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여주 3.1운동 주도자 중 가장 오랜 기간인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신면 윤촌리에서는 황재옥 주도로 40~50명이 횟불 봉화 시위를 하였다. 4월 3일 오후 9시경에는 여주 읍내 1,000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청을 습격하였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4월 7일에는 북내면 만세운동 주도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현암리 주민 등 200여 명이 항의하자 헌병이 총을 발사하여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하였다.4월 11일에도 개군면 주읍리(당시 여주군)에서도 만세운동 시위자 검거에 50여 명이 저항하자 총을 발사하여 1명이 피살되었다. ---「여주 3.1운동을 시작한 조병하와 뒤이은 독립운동가들」중에서 인현왕후가 죽은 직후 장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어 장희빈도 같은 해에 사약을 받고 42세에 죽임을 당하였다. 인현왕후가 안국동 본가에서 생활할 때 시중에서는 백성들이 그녀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노랫가락을 만들어 불렀다고 한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 /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니느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여기서 미나리는 민 씨(인현왕후)를, 장다리는 희빈장씨를, 호랑나비는 숙종을 가리키는 말로 장희빈은 한때이지만 인현왕후는 영원하다는 뜻이다. ---「장희빈 때문에 폐, 서인 되었다가 복위된 인현왕후」중에서 민진장은 1686년(숙종 12년) 38세로 과거시험(科擧試驗) 별시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는데 그 아버지 민정중(閔鼎重)은 1649년(효종 1년) 식년시에, 할아버지 민광훈(閔光勳)은 1628(인조 6년) 알성시에 각각 장원급제하였다. 이와같이 3대가 계속 장원급제하여 영광을 누렸는바, 세상에서는 삼세문장(三世文壯)이라 일컬었다. 조선 시대 삼세문장을 배출한 가문은 두 집안이 있었는데 다른 한 가문은 경주김씨 가문으로 김경원(金慶元)이 1553년(명종 8년) 별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그 아버지 김만균(金萬鈞)은 1528년(중종 23년) 별시에, 할아버지 김천령(金千齡)은 1495년(연산군 1년) 식년시에 각각 장원급제하였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가 장원급제한 민진장」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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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고장, 살아서도 여주! 죽어서도 여주!
왕비와 명당의 고장 여주에는 ‘세종대왕면’이 있다 우리는 살기 좋은 지역을 말할 때 흔히 “살아서는 여주, 죽어서도 용인”이라는 말한다. 그러나 여주는 땅도 비옥하여 농사도 잘 되며 도자기를 굽는 흙이 좋아 가마터가 많이 있어서 진상 도자기를 많아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능을 예종 때 여주의 현재 자리로 옮겼는데, 이 자리가 천하의 대 명당으로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대단한 자리이다. 태조의?건원릉, 단종의 장릉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손꼽히는 자리로, 일설에는 세종 같은 성인을 이러한 명당자리로 모셨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수명이 최소 100여 년은 연장되었다는 소위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의 고장이며 정승이나 대신들의 묘도 다수 있다. 또한 명성왕후를 비롯한 조선왕조의 8명의 왕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 김춘석은 ‘550년 여주 이야기’를 쓰게 된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고장이 “여주”라는 이름을 얻은 지 553년이 지났습니다. 1469년(예종 1년) 세종의 영릉을 서울 대모산에서 북성산 자락으로 이장하기 전까지는 “여흥”이라 불리었습니다. 5년 전에 『550년 여주 이야기』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계기는 2012년 경찰서장으로 부임한 분의 요청에 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근무지에 대해 알고 싶다고 여주를 소개한 책자를 군청에서 받아보기를 원하였으나 당시 적당한 책자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2005년 발간한 『여주군사(전 7권, 4,799쪽)』 한 질(帙)을 보내드렸는데 미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여주를 간략히 소개하는 책이 한 권은 있어야겠다는 생각과 이 책이 여주 시민들의 애향심을 고취시키길 기대하며 책을 냈었습니다. 그런데 첫 출간한 책은 여흥에서 여주로 지역 명칭이 바뀐 후 550년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여주의 위상이 높았던 조선 시대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이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근현대의 주요 사항이나 인물, 특히 여주시 승격에 도와주신 분들을 추가로 알릴 필요가 있어 두 번째 550년 여주 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의 대부분을 제공해 준 여주시청 시민소통담당관실 홍보팀 이영숙 주무관과 여주박물관 조원기 학예연구사께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이번에 두 번째 출간한 책에 여주 관련 주요 사항이나 인물인데도 게재되지 못하였거나 수록 내용 중에도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