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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서언 / 구름 같은 벼슬 따윈 급급할 바 아니라서… 4

만남 9
현금보 20
탄생 30
왕금, 피눈물에 젖다 42
소개장 67
금슬의 노래 105
고려사 134
단금지교 159
보물 사냥 171
역모의 씨앗 185
재회 192
매화 그림의 비밀 212
하늘가 검은 구름은 비를 머금고 219
경오자를 살려라 236
붓놀림은 봉황이 몸을 뒤채는 듯하다 246
검은 학의 춤 273
돌아오지 않는 강 286
금객, 마지막 탄주에 지다 294

저자 소개 1

李浩澈

창녕(昌寧) 출생 전쟁터에서 중·단편소설 3편 완성 ; [에세이문학] 수필등단, [월간문학] 소설등단. 동아일보 [신동아] 논픽션 [좌표 140319] 당선 호국보훈문예상 3회 수상 서울이야기문예상 2회 수상 세아뜨문학상 2회 수상 짚신문학상·시흥문학상·CJ문학상 외 수상 38문학상 중편소설 『붉은 밥상』 당선 해양문학상 중편소설 『바다를 넘다』 당선 직지소설문학상 대상大賞 장편소설 『빙허각』 당선 무예소설문학상 大賞 장편소설 『용천검명』 당선 한국해양문학상 大賞 장편소설 『어부일기』 당선 외 한국문인협회 서사문학연구위원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한국수
창녕(昌寧) 출생

전쟁터에서 중·단편소설 3편 완성 ; [에세이문학] 수필등단, [월간문학] 소설등단. 동아일보 [신동아] 논픽션 [좌표 140319] 당선
호국보훈문예상 3회 수상
서울이야기문예상 2회 수상
세아뜨문학상 2회 수상
짚신문학상·시흥문학상·CJ문학상 외 수상
38문학상 중편소설 『붉은 밥상』 당선
해양문학상 중편소설 『바다를 넘다』 당선
직지소설문학상 대상大賞 장편소설 『빙허각』 당선
무예소설문학상 大賞 장편소설 『용천검명』 당선
한국해양문학상 大賞 장편소설 『어부일기』 당선 외

한국문인협회 서사문학연구위원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대한민국국가유공자

- 저서
수필집 『소금으로 쓰는 편지』 외
장편소설 『빙허각』
장편소설 『용천검명』
장편소설 『금객』
장편소설 『어부일기』 발표(한국해양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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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446g | 148*210*30mm
ISBN13
9788974472696

책 속으로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숨지자 슬픔에 겨워해 석상자고동으로 거문고를 만들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죽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거문고에 매달려 위안 삼았다. 결국 왕조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고려의 마지막 군주였던 공양왕이 거문고를 끌어안고 혁명군에게 참살당한다. 나라가 바뀌자 피 묻은 거문고와 악보의 주인도 바뀌었다. 거문고는 이방원이 두문불출하던 맏형인 진안대군 이방우에게 보냈다가 퇴짜를 맞았다. 다시 회유책으로 동문수학한 고려인 야은 길재에게 보냈으나 속셈을 알아챈 벗은 선물을 미련 없이 돌려보냈다. 세종이 총애하던 박연에게 국악을 연구하라고 거문고를 주었으나 아들이 ‘단종복위거사’에 가담하자 연좌되어 세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거문고는 광해군과 인조를 거쳐 김자점에 이르렀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전리품으로 핏기 가시지 않은 거문고를 하사받은 것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문인들은 온통 동파(東坡) 소식(蘇軾)에 빠져 있었다. 19살의 이조묵은 추사 김정희의 소개장으로 청나라 대학자 담계 옹방강(翁方綱)을 만나기 위해 북경으로 험난한 여행길에 나섰다. 왕의 거문고도 동행했다. 옹방강은 박제가에게 글공부해서 시?서?화에 능하고 진적을 찾아내는 손자뻘인 감식안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금석문 따라 고증학으로 명분만 내세우는 허울은 벗고 실사구시 학문을 강론하였다. 옹방강은 이조묵에게 아끼던 ≪천제오운첩≫까지 손수 모사해 주면서 자신과 묵연의 증거로 삼게 하였다. 이조묵은 옹방강과 사제지간이 되고 아들 수곤과는 단금지교를 맺었다. 이로써 조선과 중국의 격의 없이 서로를 아끼고 예우해주는 동등한 학문적 민간외교의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조묵에 있어 시문집과 화첩은 차치하더라도 신라와 백제 나아가 고려의 금석문을 고증한 ≪나려임랑고≫는 다른 문장가와 비교된다. 청평사 중수기비문을 취재하고 ‘붓놀림은 봉황이 몸을 뒤채는 듯하다’고 묘사할 정도였다. 또한 탁본할 때 실전교재인 〈탁비비결〉은 아무도 계몽한 적이 없었던 가히 독보적이다.

헌종도 소동파의 지독한 마니아였다. 당호도 소동파를 보배로 삼는다는 보소당(寶蘇堂)으로 지었다. 사랑하는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건물의 ‘낙선재’ 편액은 옹방강의 제자 섭지선의 글씨다. 낙선재의 기둥에 주련 글씨는 옹방강의 친필이다. 사제지간은 서체가 빼닮았다. 이조묵의 시서화나 김정희의 추사체도 옹방강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조선과 중국을 아우르는 소동파에 빠진 문인들이었다. 훗날 고종은 퇴위 직전에 이조묵이 끔찍이도 멀리하던 벼슬을 내렸다. 비록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지만 통훈대부 장례원 장례를 추증받은 것이다.
---「구름 같은 벼슬 따윈 급급할 바 아니라서…」중에서

이방우는 도성에 발을 들여놓기 싫다고 하였다. 옛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철원으로 내려가 명성산(鳴聲山) 자락에 은둔하였다. 명성산은 이름대로 울음산이다. 궁예(弓裔)가 신라의 부흥을 꿈꾸며 세운 태봉국이 10년을 겨우 넘기고 왕건(王建)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궁예가 이곳에 몸을 숨겼다가 피살되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들어 온 산을 가득 메워 슬피 울었다. 그 후로 산 이름이 되었다. 이방우의 심사도 그랬다. 태조가 보낸 밀사도 만나주지 않았다. 어느 날 움막에 초립을 쓴 젊은이가 찾아왔다.
“나으리. 뵙기를 청합니다.”
“누구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이방우는 말방울 소리를 들었지만, 방문을 걸어 잠그며 대꾸를 했다.
“나으리께서 탄주를 즐기신다고 거문고를 가져왔습니다.”
“다 소용없다. 도로 가져가게나. 방원이에게 다신 이런 짓 하지 말라고 이르게. 다시 사람을 보내면 활을 쏘아 죽일 거라 전하게.”
“안 됩니다. 좀 전에 말씀 올린 대로 소인은 황천행입니다요. 나으리, 부디 이번만이라도 거두어 주십시오.”

대검은 한 식경이나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이방우는 보다 못해 움막의 뜰로 나왔다.
“이 사람 고집도 주인을 닮았구만. 그리하면 거문고만 두고 다른 물건들은 가져가게.”
“나으리, 소주는 어찌할까요?”
“허허, 이놈이 그래도. 그리 짐이 많으면 놓고 가거라.”
이방우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빈속에 마신 순도 좋은 소주가 취기를 올렸다. 호롱불에 심지를 돋우고 거문고를 눕혔다. 한눈에 명기임이 분명했다. 줄을 대략 당겨 매고 맨손으로 유현을 튕겼다. 칼날같이 높은 소리를 냈다.
당, 동, 징
술대를 잡았다. 대현 줄을 당겼다.
덩, 둥, 등
낮지만 굵은 음이 퍼졌다. 약간의 흥이 돌자 여섯 줄을 연타해 보았다.
싸랭, 뜰, 뜰
이방우는 산조보다 정악을 좋아했다. 한동안 거문고 타기에 빠져 세상을 잊을 수가 있었다. 비바람이 심한 날이었다. 도성의 이방원에게 서찰이 한 통 전해졌다.

방원아, 보아라.
각설하고, 아버님께서는 잘 계시느냐? 너는 사방팔방 바쁘단 소리는 간간이 듣고 있다. 네가 그래도 형을 위해 보내준 거문고 덕분에 큰 위안이 되었구나. 한데 얼마 전에 거문고를 뒤집어 보았더니 놀랄 일이 생겼다. 전 주인의 낙관을 보고 말이다. 이재라면 공민왕의 호가 아닌가. 아니라면 아니라고 답해보게. 왕조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애장품까지 강탈했다는 말인가. 또한 핏자국 같은 것이 오동나무에 배었구나. 아, 통탄할 일이로다. 저승에 가서 우리에게 녹봉을 주던 왕씨들을 어찌 대면할 수가 있을 겐가.
아우야.
사건의 전모를 안 이상 내가 이 거문고를 탄주한다는 자체가 불충이라 생각한다. 하여 이 거문고를 돌려보내니 너무 야박하게 생각 말아라. 나는 고려인으로 이렇게 소주나 마시며 살다가 죽을 터이니 그리 알아라. 그리고 흩어진 식솔들을 모아 고향 땅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어릴 때 우리 여섯 형제는 함흥에서 밥 잘 먹고 천자문도 읽고 산을 타며 전쟁놀이도 하였다. 그때는 너무나 행복하지 않았느냐. 어머님이 그립구나. 날 찾지 말아다오. --고려인 이방우

공민왕의 거문고는 이방원의 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이방우의 서찰을 받아 읽고 나자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아, 큰형님께서는 이리도 아우의 심정을 몰라주십니까.”
이방원은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드디어 보위에 오른 왕세자는 공민왕 거문고를 탄주하고 나면 악몽에 시달렸다. 공민왕이 버선발에다 곤룡포는 황금색은 보이질 않고 핏빛이었다. 거문고를 돌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보게, 방원이! 내 거문고를 내놓게. 고려를 빼앗아가고도 욕심이 차지 않았는가? 피눈물에 젖은 왕금은 내 분신이니 돌려주게나!”
어느 때는 노국공주가 눈에 피를 흘리며 꿈속으로 나타났다. 몽골 말로 울부짖으며 따라왔다. 황급히 연못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다가 소스라쳐 일어나면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태종은 도화서에 명을 내려 공민왕이 흰말을 탄 모습을 그렸다. 종묘에서 머지않은 자리에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길일을 택해 예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 뒤로는 악몽의 빈도가 줄어들다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태종은 정국이 안정되자 공조판서에게 질 좋은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9기 만들도록 명을 내렸다. 거문고가 완성되자 먼저 왕위를 물려준 상왕 정종에게 진상했다. 큰형인 진안대군의 기일에 맞춰 거문고를 올렸다. 친구인 길재에게 사양하지 말라는 친서와 함께 거문고를 보냈다.
세월은 쉬지 않았다. 왕은 다시 명을 내렸다. 크기를 다소 줄인 거문고에 아름다운 문양을 넣게 하여 여섯째 아들인 회녕군에게 하사하여 따듯한 부정을 보이기도 했다. 회녕군은 ‘어사금’이라 이름을 짓고 가보로 삼았다.

***
1422년(세종 4년) 비가 귀했다. 5월에 들어서자 비가 늦어 농사에 지장이 많았다. 상왕이던 태종이 병석을 무릅쓰고 기우제를 지낸다고 나섰다. 닷새가 지나자 지쳐갔다.
“내가 죽으면 상제께 가서 내 백성을 위해 비를 내려주십사 하겠노라.”
그의 볼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5월 10일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강토를 적시는 해갈의 빗소리를 들으며 역성혁명을 이은 창업의 풍운아가 눈을 감았다.
세종은 부왕이 피바람을 일으켜 닦아 놓은 신흥왕국의 기틀 위에 문화의 대 설계자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었다. 세종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백성이 있었다. 중국과 다른 글자를 창제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백성들 간에 말과 글이 통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도 정확해야 하고 농사의 기본을 알려야 했다. 민초들도 목숨 부지가 아닌 삶이 있어야 했다.

임금은 절박한 고비를 넘기자 음악에 눈을 돌렸다. 불완전한 악기 조율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이었다. 문득 박연이 떠올랐다.
‘그래, 대금을 잘 부시던 스승님이 적임이야. 스승님이.’
앞서 박연은 시강원에서 임금이 세자시절 글을 가르쳤다. 박연은 제자를 위해 잠시 쉬는 시간에 대금을 불어 정서 함양을 도왔다. 세자 충녕대군은 아름다운 소리에 심취하여 기쁜 마음을 키워나갔다.
“스승님의 소리는 정녕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세자저하, 과찬이십니다. 부족하여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외람되오나 청을 한 가지 올렸으면 하옵니다.”
“스승님, 무엇이든 말씀을 하세요.”
“앞으로 국가의 동량을 뽑으실 때 과거시험의 성적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본바탕이라 여기는 인성을 살펴보심이 더욱 중요한 일이옵니다.”
박연은 하나를 가르치면 두셋을 아는 세자가 성군이 될 것임을 굳게 믿었다. 스승은 성심을 다해 제자에게 공을 들였다.
갑작스런 부름에 박연은 어전에 부복하였다.
“신은 감히 전하께 문후 여쭙습니다.”
“스승님, 그간 강녕하시온지요?”
“전하, 이제는 신에게 그리 부르시면 아니 되옵니다. 거두어 주옵소서.”
어전이 술렁거렸다.
“그대들은 들으시오. 스승을 스승이라 칭하는 것이 법도에 어긋나기라도 한답니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세종 특유의 정면 돌파가 먹혀들어 잠잠해졌다.
“스승님, 아악이 중국을 그대로 모방하여 우리의 정서와는 맞지를 않습니다. 조선에 맞는 아악으로 고쳤으면 합니다.”
“전하, 하명을 받자와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더불어 율관과 편경을 우리에게 맞게 제작하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요청하세요.”
“전하, 맹사성(孟思誠) 같은 숨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다른 청이 있다면 전조의 공민왕이 탄주하던 거문고가 수장고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신이 한번 살펴볼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신료들이 벌 떼처럼 들고나왔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저자는 다른 뜻을 품고 있나이다. 대대로 전조에서 녹을 먹었던 집안입니다.”
“전하, 불가하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임금의 안색이 푸르게 변했다.
“모두들 참 딱도 하시오. 스승님이 거문고를 앞세워 역심이라도 품는다는 게요. 그리고 이 자리에 선대에서 전조에 녹을 먹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된단 말이오. 야박하게 그러지들 마시오.”
박연은 충청도 영동 사람이다. 호는 난계이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였다. 집현전교리 ? 사간원정언 ? 사헌부지평 같은 출세 가도인 청요직을 두루 지내며 장래의 정승 감으로 주목받았다. 성절사 사절단으로 명나라에 가서 악기와 음률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각고 끝에 조선의 음률을 바로잡아 연주하게 되었다. 박연은 어릴 때부터 즐겨 불던 피리가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의 예술혼은 영의정보다 음률가로 역사에 남기를 바랐다.

박연은 임금의 허락으로 공민왕의 거문고를 집으로 가져와 마주하게 되었다. 마당쇠에게 사랑채에 보초를 서게 했다. 긴장감이 방안에 가득 찼다. 두 겹으로 싼 거문고의 비단보자기를 벗겼다. 향이 코에 먼저 닿았다. 말총으로 짠 향낭이 숨어 있었다.
덩더덩, 덩더덩
현줄을 누른 손이 부르르 떨었다. 술대를 연이어 당겼다.
‘전조의 거문고라 그런가? 현음도 애달프도다.’
심사를 달래보려고 늘 곁에 둔 피리를 집어 한 곡 불었다.
박연은 여러 악기의 조율에 필요한 편경을 제작하면서 재료인 경석을 경기도 화성에서 채석하여 쓰는 데 성공했다. 중국이 아닌 그의 손으로 편경이 완성되었다.
“전하, 어느 음률은 일 분(一分) 높고, 어느 음률은 일 분이 낮습니다.”
임금은 손수 편경을 살펴보았다.
“스승님, 이것 보세요. 소리가 높은 데에 군더더기가 붙어있어요. 여기서 일 분을 떼어내고 낮은 데는 일 분 붙이면 되리라 봅니다.”
박연은 조회, 회례, 제향아악을 정리하여 궁중음악을 개혁하였다. 세종은 그에게 안장 얹은 말을 하사했다. 이렇듯 군신 간의 돈독한 정리는 훗날 재앙을 불러온 계기가 되었다.
박연의 막내아들 계우(季愚)가 세조의 왕위찬탈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가 처형되고 만 것이다. 며느리가 세조의 측근 홍윤성 집안의 노비로 전락하는 참담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공민왕의 거문고는 다시 궁궐의 수장고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묵은 꿈결에 거문고를 쓰다듬는 손끝에 반가운 글자가 잡혔다. 당(?)이었다. 수심이 가득한 그의 눈에 물기가 가득하였다. 조묵은 환영(幻影)에 놀라 깨어날 뻔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하고 꿈결을 이어갔다.

***
문종은 부왕인 세종이 숙원으로 삼았던 ‘적자왕통’의 의지에 세자로 30년을 지내다가 보위에 올랐다. 안타깝게도 3년째 들어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국은 조선왕조 창업 초기의 피바람이 재연될 조짐을 보였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부왕의 뒤를 이었다. 삼촌들이 호시탐탐 옥좌를 노렸다. 그중에도 큰삼촌인 진평대군, 아니다. 수양대군의 날카로운 발톱이 길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을 피살하고 성삼문을 위시한 사육신을 몰살하였다. 나아가 단종의 옥좌를 찬탈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세종이 미리 수양대군에게 교화를 염두에 두고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편찬케 하였으나 야욕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선대왕의 유훈과 집현전 학사들과의 언약을 저버린 신숙주(申叔舟)의 현실 정치도 일조를 하였다. 발음이 같은 ‘숙주나물’이 잘 쉰다는 속설이 번져나갔다. 창녕성씨(成氏) 가문에서는 숙주나물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세조는 어리고 여린 단종을 첩첩산중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단종 복위 거사를 역모로 뒤집어 왕방연을 금부도사로 삼아 사약을 내렸다. 금부도사는 통한의 시조 한 수를 남겼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세조는 돌아선 민심을 돌리고자 열 명이 넘는 동생들을 십분 활용하였다. 그들의 성향에 따라 선물을 내려 불러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유림들을 포섭하고자 했다. 영해군(寧海君) 당은 세종과 신빈 김씨(愼嬪金氏) 슬하의 6형제 중에 5남이었다. 단종의 삼촌이자 세조와는 이복형제였다. 영해군에게 밀지를 내렸다.

당아, 보아라.
부왕께서 승하하시고 선왕께서는 병약하여 보위를 오래 지키지를 못하였노라. 노산군 홍위(弘暐)가 계승하였으나 너무 어려 김종서와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이 역심을 품어 종묘사직이 위태로워 거사를 도모하였느니라. 사사로이 따지자면 그대는 내게 아우이지 않은가. 모후께서 작은어머니를 대하듯이 짐도 아우를 그리 대할 것이다.
당아.
너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화목한 것을 따르고 커가면서 거문고 탄주를 좋아하지 않았느냐. 아직도 민심이 수습되지 않고 있어 아우가 짐을 멀리서나마 도와주어야 할 것이야. 이에 집현전의 서책과 전조의 거문고를 어주와 함께 보내니 사양치 말거라. 별도로 살생부에 낙점해서 보내는 중신들의 집을 암행하여 책을 전하여라. 어주로 흥을 돋워 거문고를 탄주하면서 회유에 나서라. 특히 김시습(金時習)과 남효온(南孝溫)을 잘 챙겨 입궐토록 권해라. 다 왕실과 백성을 위함이니라. 이에 밀명을 내리노라.

영해군은 청지기를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네이, 불러계시옵니까?”
“어서 화로에 불을 담아 가져오너라. 어여!”
“나으리께서 어디가 아니 좋으신지요.”
“거참, 말이 많구나. 어여 가져오래도.”
어리둥절하면서 들고 온 화로를 당겨 놓고 청지기를 물렸다. 화롯불을 뒤집어 불씨가 빨갛게 살아나자 밀지를 태웠다. 살생부는 문갑 안에 숨겼다.
영해군은 세상이 싫어졌다. 증조부인 태조의 창업 이래 불어 닥친 피바람이 부왕의 선정으로 끝장나는 줄 알았다. 백성들의 삶을 위해 글자를 만들고 시계를 전하고 농사법을 가르친 부왕을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어머니 신빈 김씨의 인자한 모습이 뒤따랐다.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시고 짧은 동안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였습니다.”
천지간에 엎드려 숨어 있던 피바람의 광풍이 운집하여 다가오고 있음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창졸간에 죽은 조카가 떠올랐다. 한탄을 거듭했다.
“홍위야, 홍위야. 너는 어찌 홍매화처럼 그리 빨리도 졌느냐.”
“아, 어찌하여 형님은 내 손에도 피를 묻히라 하는가.”
영해군은 거문고 술대를 찾았다. 주안상이 들자 소주를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맨정신으로는 이 밤을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취기가 오르자 세조가 대군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호위무사가 두고 간 거문고를 펼쳤다.
“이 거문고가 정녕 공민왕의 거문고란 말이지. 정녕코.”
덩더덩, 덩더덩
‘아, 현금의 소리가 이토록 애처로운 것은 망국의 한이 줄줄이 서린 것일까? 내가 무슨 업보로 이 악역을 맡는단 말인가?’
영해군은 밤이 깊도록 술대를 놓지 않았다.
---「왕금, 피눈물에 젖다」중에서

조묵은 저녁이 되어서야 가매와 객점으로 돌아왔다. 전갈이 미리 당도 했던지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가매는 쓰개치마를 벗고 조묵의 도포를 받아 활대에 걸었다. 정인들은 마주 앉았다.
“그래, 그간 어찌 지냈는가?”
조묵은 아무리 진정을 하려고 해도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가매의 손을 잡았다. 소맷자락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촛불이 일렁거리자 고개를 숙인 가매의 눈가에 맺힌 물기가 반짝거렸다.
“나리께서는 그간의 장도에 몸은 성하신지요. 소인은 나리께서 베푼 염려지덕에 무탈하였습니다. 안심하시어요.”
두 사람이 잡은 손을 쉽게 풀지 않았다. 가매가 운을 띄웠다.
“나리께서 탄주를 하시면 소인이 노래 한 가락 불러올릴까요?”
“그래, 그것 아주 좋은 생각이네.”
조묵은 만면의 웃음을 지었다. 서로 긴장이 풀렸다.
“나리께서 이 현금을 얼마나 애지중지하였으면 이리도 멀쩡한지요?”
“내가 자네를 대하듯 그리하였을 뿐이네.”
“기러기발이 하나 기울어지긴 하였네요.”
“어머님이 미치도록 보고 싶던 날에 술로 달래며 탄주를 하다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네.”
조묵은 술대를 잡았다. 왼손을 몇 번 쥐락펴락하고 손가락을 뻗어 현줄 누르고 힘을 주어 술대를 걸어 당겼다.
덩더둥
둥더덩
썰갱
가매는 황진이의 시를 창(唱)으로 운을 띄우자 조묵은 반주로 들어갔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암.”
“좋지.”
조묵은 신명이 나자 추임새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매가 소리를 멈추지 않고 주위를 맴돌면서 춤을 추었다. 한 쌍의 학이 호흡을 맞추는 모습이었다.
기쁘고 즐거운 시간은 쏜살같은 법이었다. 자시가 지나자 창호지 사이로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렸다. 가매는 조용하게 반닫이 위에 놓인 요를 내려 아랫목에 깔았다.
“나리, 보료 삼아 앉으시지요.”
겉옷을 치우는데 서로가 불편이 없도록 배려했다. 팔을 내주기도 하고 다리를 펴기도 하였다. 떨리는 손길이 오갔지만 서둘지 않았다. 손끝은 술대로 현줄을 타듯 낮기도 높기도 하면서 느리다 빠르기도 하였다. 가매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융기하더니 단단해졌다. 조묵은 조심스레 옥문을 열고 들어섰다. 충만한 희열에 감탄이 저절로 터졌다.
“아, 가매.”
“서방님.”
두 정인은 내일은 오지 않기라도 하듯 심신을 파고드는 황홀한 파정의 경지에 여러 차례 이르렀다. 밀려드는 사모와 연민이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
가매와 조묵에게는 금쪽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조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아파오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서로 잡은 손은 놓지를 못했다. 마주친 눈에서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마르질 않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가매가 조용히 손을 빼더니 윗목에 서 있는 거문고를 눕혔다. 비단 보자기를 풀고 거문고를 안았다.
“서방님, 소첩이 한 곡 타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을 듯하네. 그리도 행실이 고울까.”
조묵은 취기가 오른 탓인지 말투가 조금 흐트러졌다.
“청~산~리 벽~계~수야.”
가매의 소리는 단단하며 청아했다.
“옳지, 좋아.”
조묵의 추임새가 바로 뒤따랐다. 그는 흥이 오르자 일어나 덩실 춤을 추었다. 그녀도 질세라 거문고의 술대를 잡은 손이 바삐 움직였다.
딩뜰당뜰덩당디로~당뜰더라당둥다링~당디리다링~당디리다링
한바탕 가연(歌演)이 펼쳐졌다.
“아아, 이렇게 즐거울 수가. 이 사람아, 고마워. 이렇게 성의를 다해 나를 위로해주다니 무엇으로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조묵은 숨이 차서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가매도 노래를 멈추고 거문고를 내려놓았다.
“소첩의 재주가 모자라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렇지 않다네. 족하네. 한데 득음은 어디서 했는가?”
“예, 그야 박연폭포지요. 열 살이 채 안 되어 북을 멘 아버님 손을 잡고 다녔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는 날이 드물었지요.”
“저런, 목젖으로 피도 여러 번 쏟았겠구나.”
“호호. 어찌 그리 소상히도 아십니까.”
“소리하는 이들이 대개가 폭포 소리를 이겨야 자신만의 음을 취하여 득음한다고 하지 않든가 말일세.”
벽에 기대고 있던 조묵이 깜박 졸았다. 가매가 소리 없이 움직여 벽장에서 이부자리를 내려 아랫목에 깔았다. 그를 부축하여 자리끼에 눕혔다.

그녀의 손이 떨린다. 그의 저고리 고름을 조심스레 푼다. 그녀의 목덜미가 빨개진다. 대님을 푼다. 바지를 개켜 윗목에 단정히 놓는다. 그녀는 스스로 저고리의 고름을 풀려는 순간이다. 그가 벌떡 일어난다. 그는 손을 뻗어 고름을 풀고 있는 손을 붙잡는다.
“서방님, 그냥 계세요. 소첩이 하면 됩니다.”
“이 사람아, 그게 무슨 소린가. 이 일은 내가 해야 마땅한 일일세.”
그의 뜨거운 손길이 젖무덤 가운데로 다가온다. 옷고름은 가오리연의 꼬리처럼 길다. 매듭 하나를 풀더니 두 번째 매듭을 열자 속적삼이 나온다. 흰나비의 날개 같은 적삼에 붙은 작은 묶음을 연다. 등잔불이 어둡지만, 그녀의 살갗은 눈처럼 빛난다. 손끝에 전해지는 살결은 갓 따온 목화솜처럼 부드럽다.

그는 그녀의 귓불을 가만가만 만지며 가벼운 입맞춤을 시도한다. 작은 입술이 열리고 타액은 뜨겁다. 입술을 취한 그의 혀는 목덜미를 탐한다. 겨드랑을 파고들어 그녀를 숨 가쁘게 만든다. 적삼을 헤치고 작지 않은 젖무덤을 찾아낸다. 그는 유독 가슴에 집착한다. 좌우를 넘나들며 머문다. 그녀의 젖꼭지가 빨갛게 부풀어 오른다. 꼭지에서 하얀 분비물이 솟아오른다. 그는 분비물을 탐닉한다. 입술은 천천히 복부를 내려와 배꼽을 만난다. 비단 보자기 거문고 집에서 나던 향낭의 냄새가 난다. 사향노루의 매혹이다. 그녀는 여러 차례 허리를 들고 놓는다.
그의 손은 그녀의 속곳을 조심스레 내린다. 손에 곱슬한 거웃이 잡힌다. 그는 쓰다듬는다. 손가락을 벌려 거웃을 빗질하듯 쓸어내린다. 순간 그녀의 허벅지가 긴장하여 소름이 돋는다. 손을 따라 내려온 혀끝은 체면을 벗어던지고 달려든다. 양쪽 허벅지 안쪽을 자극해 들어간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간다. 뜨거운 입김이 부풀려 방을 가득 채운다. 혀끝이 옥문을 두드리자 비로소 열린다. 그는 옥방으로 들어선다. 전율이 흘러 잠시 정신이 혼미해진다. 잠시 뒤에 그는 다시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아, 내 정녕코 자네를 사모해.”
“서방님, 소첩의 서방님.”
둘은 큰 고개를 넘는다. 젊디젊은 육신은 바로 기운을 차린다. 또 한 차례 파정에 이른다. 그는 작은 새처럼 팔딱거리는 그녀를 가슴에 거둔다.

조묵은 가매를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아, 나의 정인이여.”
“서방님, 부디 소첩을 잊지 마소서.”
“내가 자네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소첩을 떠나 한성에 가시면 기억이나 하실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아닐세. 맹세코 그리하지 않을 걸세.”
“서방님을 믿어도 되나요?”
“내가 어떤 약조를 해야 자네가 믿겠는가?”
“아닙니다. 언약으로 진실한 서방님의 마음을 믿겠습니다.”
부푼 가슴이 분홍빛으로 선명해졌다. 땀에 흠뻑 젖은 두 사람은 밤새 떨어지지 않고 눈을 붙이지 않았다. 멀리서 닭이 홰를 쳤다.
꼬끼오, 꼬끼오.
---「재회」중에서

1837년(헌종 3) 5월이었다.
조묵은 자신의 감식안이 녹슬기 전에 거문고에 이름을 새겨 역사의 기록으로 삼고자 하였다.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남기고 싶었다. 거문고가 언제 자신의 손을 떠날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별점을 보아 길일을 택했다.
조묵은 목욕재계하고 거문고의 비단 보자기를 풀었다. 큰 바위 사이에서 고사한 석상자고동의 판대 위에 거북이 등가죽으로 만든 노란색 대모장식, 학슬에 매단 향낭에 옹골차 보이는 6줄의 현금이 금방이라도 소리를 낼 기세였다. 손을 올려놓고 현줄을 조율했다. 몸통을 살뜰하게 만지고 쓰다듬었다. 눈을 감고 구석구석 나뭇결을 감촉으로 느꼈다. 눈으로 손으로 마음으로 가슴으로 상통하여 혼자만 알고 있었던 공민왕 거문고의 비밀이 희미하게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향을 살랐다.
“거문고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이제 떠나야 할 때입니다. 소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이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미련을 거두고 제 손에 모든 것을 맡겨주기를 바랍니다.”
거문고를 뒤집었다. 지필묵을 준비하여 찬문의 초안을 잡아갔다. 먼저 수십 년을 맴돌던 거문고의 이름을 정했다.

恭愍王琴

‘공민왕금’을 적고 다시 먹을 갈았다. 붓을 다잡았다. 찬문을 적어 내려갔다. 몇 번에 걸쳐 문안을 손봐 고쳤다. 전각도 여럿을 숫돌에 갈았다. 거문고에 새겨진 여러 사람의 이름이며 낙관들을 지웠다. 조묵 자신의 이름도 지웠다. 붓을 들었다. 그 위에 이름을 지어 각인하고 찬문을 새겼다.

공민왕금

찬문

현금이 넉넉하기는 동료와 같지만 환패는 지보로 삼을 만하다.
공민왕이 신령스러운 오동을 얻어 이것을 만들었으니
그 후 야은이 진장하고 명현고사들이 그 맑고 상쾌한 소리와
가락을 특여사로 삼아서 다투어 켜지 않음이 없었다.
택당의 명과 문서등과 더불어 진실로 아꼈으니 이제 거의 마멸되었으나
그 짙은 세간에 직명하기에 충분하여 다행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정유년에 대를 쪼개는 날 육교는 이에 제를 찬한다

조묵은 거문고를 당겨 끌어안았다. 왼손으로 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현을 강하게 당겼다. 술대가 없어도 소리는 제대로 울렸다.
덩더둥, 쌀갱.
‘아, 이 소리는 울음이야. 망국의 한을 뿜어내는 거문고의 울음소리야.’
조묵은 평생을 두보의 〈강상치수여해세〉에 나오는 시구를 가슴에 담고 살았다.

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

나는 본디 성벽이 멋진 시구를 아주 좋아해서
말이 남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도 쉬지 않노라

1840년(헌종 6) 입춘이 돌아왔다. 조묵은 정초부터 몸져눕는 날이 많아지더니 이때가 되어 더욱 사그라지고 말았다. 가세도 주인을 따라 더욱 기울어졌다. 몸도 마음도 집안도 쇠락하였다. 조묵은 그동안 팔도를 다니면서 모은 금석의 탁본을 정리했다. 그리고 고서들을 분류하여 누구든지 찾아보기 쉽게 색인을 해두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과 시문들을 순서대로 묶었다. 연경에서 구입한 그림을 꺼내 펼쳐 보니 옹방강과 수곤 부자와 주학년이 더욱 그리워졌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진적들을 보내며 그때마다 수고를 아끼지 않던 섭지선도 고마웠다.
‘아, 그들이 스스로 나서 인맥이나 학맥을 동원하여 자신의 일처럼 책을 소개하고 그림을 주선해 주며 골동기완을 감식해주지 않았던가. 피붙이라 한들 어느 누가 그렇게 진심을 가지고 나서 줄 수가 있을 건가. 만사를 제쳐두고서 오직 나만을 위해 이 보물들을 모아 주지 않았던가. 지난날 마지막 시간을 앞두고 석묵서루에서 담계 스승님의 심사도 이토록 절실했을까.’

조묵은 그림을 차례로 어루만져 보았다. 소동파의 〈묵죽도〉. 보물 1호였다. 조간(趙幹)의 〈단림노옥도〉가 눈에 들어왔다. 유송년(劉松年)의 〈추강조어도〉, 관도승(管道昇)의 〈수정계죽도〉가 차례를 기다렸다. 예운림의 〈소림노옥도〉와 왕몽의 〈범라산도〉를 쓰다듬었다. 구십주(仇十洲)의 〈은산누각도〉, 문백인(文伯仁)의 〈추림배회도〉를 넘기고 여기(呂紀)의 〈노주설안도〉는 아직 녹지 않은 눈밭에 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나양봉의 〈필매화도〉가 펼쳐지자 얼굴에 기쁨이 잠시 돌았다. 글씨를 펼쳤다. 옹방강의 글씨와 편지를 눈으로 손끝으로 보고 만졌다. 옹수곤의 글씨를 열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수곤 형님. 곧 만나 세세생생 헤어지지 말아요.’
섭지선의 글씨는 너무나 정갈하였다.
조묵은 고려사람 정홍진의 〈묵죽도〉를 펼쳤다. 김부식의 손자인 군유의 〈묵죽도〉 또한 손색이 없었다. 무인 최우의 글씨에 눈길이 멈추었다.
‘할애비 충헌의 글씨를 닮은 것이야. 초서는 마치 날랜 송골매가 하늘을 날고 가벼운 바람이 안개를 말아 올리는 것 같구나. 해서와 행서는 전장에 나간 말이 나란히 하여 걸음걸이가 익숙하고 지극히 필법에 맞는 것이야.’
공민왕의 작품을 비단 보자기에서 풀었다. 대선사 구곡운공에게 내린 글씨와 그림이었다. ‘龜谷(구곡)’과 ‘覺雲(각운)’ 큰 글씨 4자와 보현과 달마의 초상화 2점이었다. 초상화는 보현이 코끼리를 타고 달마가 갈댓잎을 탄 것을 묘사하였다.
‘아, 공민왕은 어찌 이리도 나와 만나는 것인가? 거문고와 글씨에 그림까지 인연인가, 악연인가. 모를 일이다.’

조묵은 파리한 손을 내민다. 성석린(成石璘)의 〈태조건원릉비〉의 글씨는 순간 숙연하게 만든다. 안평대군과 김정희의 글씨들도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만 기력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김홍도와 윤제홍 등의 많은 그림과 겸재 정선(鄭敾)의 초기작품에도 눈길에 손길이 간다. 잠시 쉬면서 벽장을 열고 제나라 환공이 쓰던 화로를 만져보고 방초투계완도 쓰다듬어 본다.
‘아, 이것들이 걱정이야. 내가 죽으면 어찌 지켜 낼 것인가. 옹수곤의 가문이 멸문에 이르지 않았던가. 심히 염려스럽구나. 골동서화에 미쳐 가산을 모두 잃었으니 가족에게도 미안하구나. 내 예술적 동지이자 정인 오운은 곁에 없으니 어쩌랴. 내 운명이 이토록 야박한가.’
조묵은 마지막 힘을 모아 큰 책궤를 열고 그동안 모아둔 붓들을 본다. 짧고 길며 가늘고 굵은 붓이 서로 엉켜 가득 쌓여 있다. 그는 붓 무덤 속으로 팔을 뻗는다. 손에 몽당붓 한 움큼이 쥐어진다.
며칠 전이었다. 이하응이 조묵의 오두막으로 어둠을 뚫고 난초가 그려진 서찰을 보냈다.

머지않아 흥선정(興宣正)에 봉해질 예정이오. 그리만 되면 흥선군(興宣君)으로 품계가 오르는 일은 떼어 놓은 당상이요. 하여 공민왕 거문고를 순순히 내놓길 바라는 바요. 진정한 금객(琴客)이라면 순리를 따르시오.

금객 이조묵은 거문고를 눕히고 술대를 잡는다.
덩덩, 궁궁
싸르갱, 쌀갱
탄주에 거문고의 날카로운 울음이 귓전을 스친다.
“아, 공민왕의 거문고 소리. 아니다. 내 거문고 소리.”
금객은 거문고를 안고 쓰러진다.
쌀갱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현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금객, 마지막 탄주에 지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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