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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지역과 문학의 자리에서, 무한을 꿈꾸며 작가와 비평 목소리‘들’, 혹은 냄새‘들’의 세계 ─편혜영 론 위무(慰撫)의 수사학, 그 이중적 효과에 대하여 ─김미월 론(論) 무한한 사랑을 꿈꿨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책과 비평 못다 한 세이렌의 노래들 ─이상섭, 『바닷가 그 집에서, 이틀』 무한한 사랑과 적대의 세계 ─황은덕, 『한국어수업』 웰 컴 투 통일조국 ─이응준, 『국가의 사생활』 담론과 비평 동일선 담론 너머의 김유정 문학 코로나 시대의 문학, 비말과 점액질로서의 글쓰기 다시 이야기를 펼쳐야 하는, 문학의 자리에 서서 새로운 시대의 해양문학을 위하여 ─문학의 실천적 부표로서의 바다 동화와 대중소설 속에 고착된 ‘여성성’과 ‘환상’을 통한 새로운 소설쓰기의 가능성 유비(類比)로서의 세계 ─이상의 시 「꽃나무」와 고흐의 그림 「해바라기」를 중심으로 청년, 다시 거리에 서다 ─부산, 쓰는 것으로서의 공간을 회고하며 독서와 비평 나와 타자가 만나는 길 혹은 소설이라는 지도 활용법 ─박향 『파도가 무엇을 가져올지 누가 알겠어』 비재현적(非再現的) 삶과 미생(未生)의 장편소설 ─조갑상, 『밤의 눈』 교육이 아닌 삶을 담아내는 동화 ─최영철, 『어중씨 이야기』 문학의 미래, 그 새로운 밤(夜)을 위하여 ─이예훈의 『이타방』과 민찬의 『도청도설(道聽塗說)』 한국형 드라마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정혜경, 『바람고개의 봄』 소설쓰기, 그 비유의 감각에 대해서 ─조명숙, 『조금씩 도둑』 사목(司牧)과 유목(遊牧) 사이에서 글쓰기 ─이규정, 『치우(癡友)』 우리는 왜 아직도 ‘아비’찾기를 반복하고 있을까? ─이경자, 『빨래터』. 이대환, 『콘돔과 큰돈』 독재국가의 경험과 그 비판적 성찰의 가능성 ─박유리, 『은희』 폐허 이전의 말들을 조형하는 소설가 ─문성수, 『말의 무덤』 언어의 지평을 걷는 그대에게 ─김형로, 『백 년쯤 홀로 눈에 묻혀도 좋고』. 이기록, 『소란』 사물들의 사이에서 읊조리는 힘 혹은 시(詩) ─최정란, 『사슴목발 애인』 무르익은 시가 주는 언어의 맛 ─김려, 『어떤 것은 밑이 희고 어떤 것은 밑이 붉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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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무한이다. 기하학에서 좌표점일 뿐인 ‘점’이 사실 현실에서는 무한한 인식점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수학적 공리와 같은 합리성에 갇혀서 ‘점 혹은 문학’을 크기가 없는 좌표로만 인식할 필요가 없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형식과 가치를 정형화해 그것의 가능성을 폄훼하는 것은 현실의 물질적 문제보다는 권력적, 이론적 형이상학 앞에 먼저 좌절시키고 있는 담론적 성격이 더 강한지도 모른다. 모든 소수자의 이야기와 모든 지역의 글이 다 소중한 것은 이러한 무한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믿었고, 변화 가능성 안에서 타자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기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참새가 대붕의 뜻을 알 수는 없겠지만, 참새가 대붕이 될 수 있는 것은 ‘무한’의 ‘잠재성’으로 남겨져 있다. 우리는 그래서 거대한 매체들 앞에서 이 가냘픈 좌표점 하나를 아직도 굳건히 붙잡고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삶의 현실은 앞서 말했듯이 한낱 좌표점 따위가 아니기에, 우리의 자리에 서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공동의 자리를 계속해서 가꾸고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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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구 없는 나라의 앨리스
시작은 있으나 결말이 없는 스토리는 근본적으로 허무를 조장한다. 사르트르 식으로 말해, 세계의 개진이 없는, 오직 시작만 있는 이야기라니. 달리 말해 희망과 낙관을 지나치게 서둘러 폐기한 이야기에 열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편혜영의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문학과 지성사, 2005)의 텍스트들이 그러하다. 거기에는 뚜렷한 결말이 없고, 긴장감도 없으며, 속도감 또한 없다. 다만 똑같은 템포로 섬뜩하고 역겨운 이미지들을 점액질같이 흘릴 뿐이다. 동물들과 사람들이 가차 없이 시체로 돌변하기 일쑤이고, 시체는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다시 일상의 피곤함을 견디며 살아가기가 다반사인 이야기들의 암울한 반복. 거기에다가 ‘시체’들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묘한 상상력은 공포영화에서 흔히 만나는 영화적 줄거리를 반추하게 한다. 그러므로 편혜영의 소설에서 출구 없는 세계를 부유하는 좀비들의 운명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B급 영화처럼 편혜영의 소설이 흔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아오이 가든』에 실린 단편들에서 변함없이 일관되고 있는 작가의 세계관, 혐오스러운 것에 고집스럽게 매달리고 있는 그 서사가 이 세계에 완전히 투항한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런 서사적 집요함은 어떤 대상과의 대결과 저항, 그 극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한 특별한 저항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 텍스트 안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 특별한 저항상대가 무엇인지 뚜렷이 알기 어렵다. 다만 소설이 전제하는 것은 ‘암울한 세계’이며, 누구도 이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편혜영의 소설들은 오염되고 더럽혀진 세계의 암울한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도 낙관할 수 있는 지점이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 지점이 편혜영 소설이 우리에게 일종의 묵시록을 펼쳐 보여주는 중추로 여겨지게 만들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편혜영의 소설은 독자에게 아주 곤혹스러운 질문 하나를 던진다. 그것은 썩어 들어가는 도시 문명을 부패하는 대상들로 알레고리화해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지금-여기의 상황에서 무엇을 대안적으로 사유할 수 있겠는지 대답해보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러나 부패하는 대상들로 알레고리화된 도시를 그려냄으로써 말하려는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이란 말이란 말인가? 우선은 ‘자본주의’의 체계 안에서 뿔뿔이 개인화된 ‘시체들’이 다름 아닌 우리의 현실임을 직시하게 만드는 소설적 장치가 여기에 답하는 첫 번째 열쇠가 될 수 있다. 「저수지」나 「문득」에서 시체를 살아있는 인간처럼 다루기도 하지만 「마술피리」에서는 실험용 쥐를, 「퍼레이드」에서는 서커스를 하는 코끼리를, 「동물원의 탄생」에서는 철장을 탈출한 늑대를 인간의 삶과 대비해 바라보게 하면서 ‘동물’을 알레고리화해 인간을 ‘사육’되는 동물로 성찰하도록 만든다. 편혜영은 ‘알레고리’를 통해 시체와 사육된 동물들을 인간과 같은 등가체계 안에서 살펴보게끔 유도하고 있다. 특히 시체와 인간을, 죽은 자와 산 자를 같은 의미로 바라보는 것은 ‘환영’인 ‘살아있는 시체’를 실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들기에 가능해진다. 이 상상은 소설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알 때, 우리는 ‘자본주의’를 투영하는 것으로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상품이 유통될 수 있는 것도 모든 것이 균질적인 것으로 놓일 수 있다는 ‘등가체계’의 ‘환영’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모든 대상이 ‘환영’을 통해 서술되거나 판매될 수 있다는 지점에서 편혜영 소설의 알레고리는 자본주의 자체를 투영하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환영’을 통해서만 자본주의와 인간의 삶을 알레고리화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작가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시각의 한계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따라가서는, 그리고 선형적인 텍스트의 악몽만을 읽어내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편혜영 소설들에서 우리 삶의 역사에 묻어있는 이미지들을 선별하거나, 환영을 마치 현실처럼 게워내는 화자의 흥미로운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알레고리’로 점철된 서사의 덫을 비껴가며 정작 우리가 사유할 틈새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끝내 소설적 재현의 그물망에 봉합되지 못/않는 기호들로 소설 텍스트를 벗어나야만 볼 수 있는 숨겨진 의미들이다. 그래서 편혜영의 소설에서 출구가 없는 이야기들의 연쇄를 쫓아 헤맬 필요가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이상한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상징인 ‘시계를 찬 토끼’를 쫓지만 언제나 실패했던 것처럼 결국 잠에서 스스로 깨는 것 외에 이상한 나라를 벗어날 길은 없다. 2. 발설되지 않는 젠더, 그 여성성 먼저 편혜영 소설에서 드러나는 편향된 서술자의 시각에 주목해보자. 그의 소설에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사건을 이끄는 주인공이나 화자는 ‘성적 관계’를 주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성적 관계란 것이 꼭 이성적 대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에 동성을 넘어서 시체를 애호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성관계의 희열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집중해서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고통’ 자체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인간의 ‘성(性)’은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 편혜영의 소설은 이 ‘성(性)’의 프리즘에서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활용하지 않는 점이 특이해 보인다. 예를 들어 「맨홀」에서 남성 화자인 ‘나’는 C라는 친밀한 관계의 여성에 대해 “나는 C의 젖가슴을 만지거나 살갗이 얇아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배를 쓰다듬었다.”라며 친근한 신체적 접촉 이외에 ‘성관계’를 욕망하는 남자의 시선은 그려지지 않는다. 기묘하게도 남성과 여성의 관계지만 화자가 남성적 욕망을 지니지 않고 있기에, 마치 여성과 여성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적인 친밀감을 넘어설 수 없는 듯 보인다. 남자와 여성의 일반적인 ‘성관계’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에게서는 절대 구현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동성애적인 친밀감 밖에 있는 부정적 대상, 예를 들어 폭력적인 남성으로 그려지는 P는 주인공인 ‘나’를 향해 “야, 내가 몇 달 전에 어떤 년을 따먹었는데”라는 둥, “개걸레처럼 너덜거리는 년”이라는 둥 남성적인 성적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 부정적 대상을 통해 성관계에 이야기를 끌어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에 대한 ‘부정성’ 안에 머물러 있다. 그렇기에 편혜영 소설의 주인공과 화자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성적 욕망의 대상과 표현방식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단 한 번 특별하게도 「밤의 공사」에서 주인공인 남자가 자신의 아내와 부부간의 성관계를 가지긴 하지만 역시나 앞서 전제한 남녀의 일반적인 성관계를 ‘부정’하는 원칙에 놓여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할 뿐이다. 「밤의 공사」는 3인칭 소설이지만 남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성관계를 묘사하는데, “흥분한 아내가 등을 할퀴며 그를 다그쳤다. 그는 재게 엉덩이를 놀렸다. 아내의 살이 출렁거렸다. 벌거벗은 아내의 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라며, 남편은 붙잡고 자신의 성욕만을 채우는 모습으로 아내를 그려내고 있다. 식탐이 강하고, 아이를 잘 때리는 성격의 아내에 의해 이끌리는 성관계는 일방적인 성적 편력에 의한 것으로, 부부관계에서 아내가 남편보다 권력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것은 일반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다. 화자의 감정이 이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 남성 주인공을 통해 성적 욕망을 진행할 수 있음에도 화자는 남성 주인공을 성적 지배를 당하는 ‘여성’과 다름없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남성’ ‘여성’의 위치만 바뀌어 남편이 여성적인 만큼 아내가 남성적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이는 화자의 목소리가 소설의 중심인물인 남성 주인공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맨홀」에서 보았던 남자 P처럼 완전히 악한 인물로 타자화하지 않은 이상 화자는 언제나 주인공의 입장을 ‘남성적 욕망’과 관련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에게 화자의 목소리가 여성성의 형태로 집중된 대신 오히려 여성인 아내가 완전히 적대적인 타자로 성적 욕망을 폭력적으로 분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서술의 태도를 견지해 보면, 화자는 주인공들을 젠더의 편차 안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이것은 작가가 거의 자동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동일시’ 속에서 주인공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특별히 여성성을 ‘배제’하기 위한 원칙을 둔 작가의 원칙에 따라 작가가 서술자의 목소리를 제어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스토리와 사건의 편차, 그리고 성적 편차까지 각양각색으로 대상들을 그려 넣을 수 있는 화자의 서술 태도가 작가에 의해 개성 없이 규제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사실 화자의 목소리는 작가의 목소리와 다른 것이다. 만일 그런데도 각기 다른 소설들이지만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작가 스스로가 완전히 규제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화자의 목소리나 주인공들에 대해 작가 스스로가 ‘동일시’의 착각을 버릴 수 없다고 발언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그려낸 세계가 곧 현실이라고 작가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그것은 곧 ‘작가의 내면’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게 된다. 대상을 포착하는 방식이 곧 작가의 내면일 수는 없다. 그것은 지독한 동일시이지 알레고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화자나 주인공들을 통해 표현되는 일반적인 성관계가 부정되는 것은 작가가 지닌 세계관의 문제에 관련해서만 주제의 일관된 태도를 견지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곳곳에 드러나는 부패하는 도시의 암울한 세계관은 일종의 희생적인 모성애로 그려져 왔던 여성성의 근원을 부정하는 형식으로 출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설 「아오이 가든」에서, “고양이의 배를 봉합하는 것으로 수술은 끝났다. 떼어낸 자궁은 금세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라며 동물로 여성성 부정의 알레고리를 진행하게 하는가 하면, “시커먼 가랑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가랑이가 찢어질 듯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정말로 누이의 가랑이는 붉은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찢어져 있었다.”라며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의 ‘질’을 황폐화해버리는 묘사로 그 부정의 강도를 계속해서 높여나가고 있다. 화자가 ‘성관계’를 직접 발설하지 못하면서 오직 ‘여성성’만을 공격하는 태도는 ‘자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 자학적으로 보이는 동력은 놀랍게도 편혜영의 등단작품인 「이슬 털기」(≪대한매일신문≫, 2000년 신춘문예 당선작)에서 ‘사랑’을 잃어버린 여주인공이자, 소설 내적 화자가 규정지은 미래상을 미리 예감하게 하는 것처럼 인과론적 필연성을 보여준다. 「이슬 털기」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와 자신의 아이를 동시에 잃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임신한 사실을 몰라주는 남자에게 아이를 지워버릴 것이며,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던 저주의 ‘목소리’가 실현된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이제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인정된 죽음의 세계로 가버렸다. 잃어버린 욕망의 실체들이 되어버렸기에 금방 생동하며 느낄 수 있던 것으로 다시 그들을 눈앞에 불러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된다. 이제 사랑의 의미를 온전히 고통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앞에 오직 역겨운 냄새와 그 냄새를 풍기는 물질들로 사물들을 감각하게 된다. 나는 우욱, 먹은 것을 토해내고 질질 침을 흘렸다. 대학병원 전체가 장례식장인 듯 어딜 가나 전을 지지는 기름내와 비릇한 육개장 냄새, 만수향내가 났다. 포르말린 냄새가 지독해서 물도 마시지 못하다가 그의 하관식 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이슬 털기」 중에서 여기서 딱 한 번 언급되고 있는 이 ‘역겨움’에 대한 묘사들을 볼 때, 사랑하는 것들을 죽음의 뒤안으로 보내 버린 뒤 느끼게 되는 한 여성의 슬픈 상처가 불쾌한 냄새들로 전이되고 있음을 살필 수가 있다. ‘사랑’은 ‘죽음’으로 치환되고, 남은 것은 사랑할 것이 없는 ‘역겨운 세계’의 냄새뿐이다. 역겨운 세계는 곧 자신의 ‘자궁’의 이야기로 전이된다. 결말에서 여자는 다시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임신하게 되지만, 죽어버린 자들을 아직 상처로 간직한 여자는 자신의 자궁 안에서 양수가 터지고 있음에도 새 생명에 대한 ‘탄생’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되지 못한다. 앞에서 보였던 장례식장의 모습처럼 다시 정신을 잃는 것으로 서사를 닫아버림으로써 다음에 태어날 ‘아이’에 대한 모성애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산 자보다 죽은 자에 대한 사랑, 이미 지워지거나 다른 대상으로 대체되어야 할 죽은 자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순수’한 여성의 집착 앞에서 다시 사랑할 ‘욕망’의 대상은 있을 리 없다. 또 그러한 욕망은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순수한 마음을 지키는 자의 내재적인 규율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제 그 죽은 자에 대한 ‘순수’한 선택 때문에 모성애 없이 잉태된 ‘아이들’의 끔찍한 서사가 담긴 소설집 『아오이 가든』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 죽은 자에 대한 사랑의 왜곡된 힘들, 그 욕망들이 어떻게 어머니의 모태와 같은 상징인 ‘집’이 격파되는 양상으로 변주되고 있는지 ‘아오이 가든’이라는 매력적인 제목과 함께 천천히 살펴나가 보자. ─「목소리‘들’, 혹은 냄새‘들’의 세계─편혜영 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