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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된 할망
설문대루트, 신의 길을 찾아 나선 물음표의 순례
한진오
한그루 20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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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신화학 top100 1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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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제주섬의 창세기 10

01 생각의 지도 속 설문대 27
02 물 가운데 섬 하나, 섬 가운데 산 하나 36
03 청산에 앉아 등경돌에 불 밝히고 48
04 가장 깊고 높은 전설의 두럭산 62
05 신들의 본향에 무쇠솥을 걸다 73
06 여신께서 밤사이 바다를 메우시니 83
07 나는 바람으로 모든 세상을 잇는 다리를 놓으리라 91
08 사라진 홍릿물을 찾아서 101
09 세월을 엮고 대지를 다져 111
10 다시 솥을 앉혀 만생명의 양식을 짓다 120
11 선마선파 활아활아 131
12 신과 만난 어느 석수의 이야기 142
13 세상을 지으신 뒤에 권능을 버리다 152
14 다끄네 솥덕바위는 어디로 164
15 산꼭대기는 다시 산이 되어 174
16 창조주의 지문을 찾아서 183
17 섬은 또 하나의 섬을 낳고 193
18 마르지 않는 물에 새긴 여신의 발자국 204

에필로그 돌아오시기를 기원하며 215

저자 소개 1

제주도 신화와 굿의 힘을 길어 작품을 빚어내는 문화예술가. 이십 대에 삶의 고통을 승화시키는 신화와 굿의 매력에 빠져서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굿을 직접 사사하고 연구를 병행하면서 문학, 연극, 음악, 미디어아트 등 전방위 예술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관광이라는 렌즈로는 보이지 않는 아름답고 내밀한 제주의 속살을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제주 동쪽』을 썼다. 지은 책에는 『모든 것의 처음, 신화』, 『사라진 것들의 미래』, 『이용옥 심방 본풀이』(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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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19쪽 | 284g | 140*195*15mm
ISBN13
9791168670877

책 속으로

설문대할망은 어떻게 섬을 만들고 산을 쌓아 올렸을까? 얼마나 클까? 어떻게 생겼을까? 고스란히 되살아난 어린 시절의 질문들은 내 이름조차 물음표로 바꿔놓았다. 근원을 향한 의문이 샘솟자 그동안 내 머릿속에 주워 담아온 설문대의 모든 사연을 차례로 복기했다. 섬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물음표가 된 나는 제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천지창조의 옛이야기들을 갈무리하며 마치 한 편의 창세기 같은 서사시를 엮어내기 시작했다.
--- p.15

어느덧 물음표는 섭지코지를 장악한 리조트 코앞까지 다다랐다. 그는 환락의 휴양지를 애써 외면하며 고래도 물개도 사라진 새끼청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래와 물개의 깊은 잠을 떠올렸다. 원래 뭍짐승인 포유류였던 고래와 물개는 바다살이를 하는 쪽으로 진화했지만 여전히 허파로 숨을 쉰댔다. 수중에서 잠이 들어도 좌뇌와 우뇌 중 하나는 늘 깨어있다고. 호흡이 달릴 때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들이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든 채로 목숨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물음표는 고래와 물개의 반쪽 잠을 달리 풀이했다. 먼 옛날 창조주의 섬에서 태어나 바다로 떠나갔지만 두고 온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늘 깨어있는 것이라고. 고래와 물개는 만생명이 함께 공생하라는 여신의 뜻을 여전히 간직한 채 섬을 향해 숨비소리를 내고 있는데 인간만은 눈을 떠도 잠든 영혼인 불쌍한 존재라고.
--- p.61

김녕 토박이들은 두럭산은 음력 3월 보름날이 오면 신비로운 자태를 가장 많이 드러낸다고 한다. 그래봤자 산이라고 부르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막상 눈으로 보게 되면 실망할 사람들이 많을 법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신화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신성을 부여한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셀 수 없이 많지 않은가. 어쩌면 설문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려고 작고 볼품없는 갯바위에 신성을 불어넣었는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존재를 우러르고 함께 공생하라는 메시지야말로 설문대가 두럭산에 새겨놓은 신화의 속뜻은 아닐는지.
--- p.71

세상 어느 곳이든 그곳에 오랜 신화와 전설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신들의 터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주술적 세계관에 잇닿아 있다. 그들이 숭배하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그 중심이 자신들의 터전이라고 여기는 것은 신화가 지니는 공통적인 서사다. 그런데 우리는 왜 스스로 제주를 섬이라는 제한성과 변방이라는 한계에 가두려고 하는가? 물론 끊임없는 자연재해와 외세의 수탈과 학살에 수난당한 이력에 근거한 해석인 점에 대해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99라는 숫자에만 사로잡혀 콤플렉스로만 해석하는 것이 온당할까?
--- p.99

세 마을에 남아있는 설문대할망의 공깃돌 바위들은 오늘날 제주가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처럼 보였다. 앞만 보며 돌진해온 개발지상주의가 이제 기후위기의 티핑포인트를 목전에 둔 오늘, 여전히 우리는 옛사람들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 여겨 설문대를 찾지 않는다. 저 공깃돌 바위를 움켜쥔 거대한 손이 다시 한번 천지개벽을 일으키지나 않는 한….
--- p.119

엉장메코지에서 다리를 만들던 설문대할망은 족두리를 벗어 한천 계곡에 잠시 놓아두고 속치마가 완성되었는지 굽어보았다. 안타깝게도 명주 한 통이 모자라 여신의 옷가지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설문대는 새 치마를 얻지 못하리란 것을 깨닫고 한걸음에 오름 하나를 성큼 넘고 또 한걸음에 계곡 하나를 훌쩍 건너뛰며 한라산 깊은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인간 세상에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설문대할망의 권능이 담긴 족두리 하나뿐이었다. 족두리는 어느 틈엔가 커다란 바위로 변신해 한천의 고지렛도에 덩그러니 남기에 이르렀다.
--- p.160

언젠가 사계리 잠수굿에서 제주섬이 설문대할망의 육신이라면 바람이 된 영등신은 설문대의 영혼이라며 파도 위에 새겼던 착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물음표는 달빛 서린 돈짓당의 언덕 위에서 사계리의 착상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열한 달을 다른 세상에 머물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월이 되어 찾아왔는데 영혼이 깃들 육신이 부서지고 무너졌다면 제주섬의 창조주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 돈짓당마저 사라지고 설문대의 영혼 바람할머니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제주섬은 어떻게 될까?”
--- p.203

태어나서 사랑하다 죽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라면 물음표의 사랑은 언제나 창조주만을 향하는 나침반에 갇혀 있었다. 사랑이며 연민이었다. 슬픈 섬에 태어난 서글픈 운명의 섬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갈망이 물음표에겐 설문대를 향한 의문부호로 발현된 것이다. 제주섬의 이력이란 것이 아프고 슬펐기 때문에.

--- pp.217~218

출판사 리뷰

나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누구에게나 태어난 곳이 있다. 나는 이따금 고향이 없다는 사람들을 만난다. 태어나자마자 한곳에 발붙이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살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붙는다. 그런 말을 듣게 될 때면 고향이 무엇인지 생각에 빠지곤 했다. 제주라는 섬에서 태어나 여태껏 살아온 나에게는 고향이라는 이미지가 단단히 각인되어 있어서 그들이 사뭇 낯설게 보였으니까.

그들이 말하는 고향이란 단지 장소이거나 공간이 아니다. 삶의 내력과 영혼의 서사가 담겨 있는 곳을 고향이라고 이른 것 같다. 고향이 없다는 이들은 대부분 스스로 영혼이 메마른 삶이라고 말한다. 첨단도시의 군중 속에서 찰나의 휴식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쟁이 인생의 전부라고. 영혼이 기화되어 메말랐다는 그들과 달리 나는 고향이 있다. 그런데 나 또한 그들처럼 영혼이 사라진 채 부유하는 이유는 뭘까?

시곗바늘이 미래를 향해 척척 나아갈수록 내 고향 제주의 모습은 지나온 시간처럼 엷게 지워지고 있다. 어느 날은 어릴 적 뛰놀았던 언덕이 사라지고, 또 어느 날은 자맥질했던 바다가 빌딩 숲으로 변하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잊게 만드는 고향 지우기가 시간마저 추월하는 것 같다. 고향에 발붙여 사는데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거나 나 또한 애초에 그런 곳이 없었다는 착란의 미망에서 벗어나기 힘겹다.

이 미망은 당연히 상실감에서 비롯되었다. 상실감이 원인임을 자각한 뒤 질문을 바꿨다. 내가 태어난 곳은 어떤 곳이며 누가 만들었을까? 그것을 알면 번민도 사라지고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제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섬의 창조주 설문대할망을 만나기로 작심했다. 설문대의 전설과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샅샅이 뒤지다 보면 여신을 만날 수 있겠다. 그때가 되면 내가 이 섬에 태어난 이유는 물론 내 영혼의 정체에 대해서도 답해주시리라 믿었다. 그렇게 나는 의문부호로 가득 찬 꾸러미를 메고 여신을 찾아, 고향을 찾아, 잃어버린 내 영혼을 찾아 오랫동안 이 섬을 맴돌았다. 그 사이 물음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제주토박이는 섬이 되었다는 할망 설문대를 찾는 탐사기를 여정 내내 써 내려갔다. 그리고 쉼표 하나를 찍고 잠깐 쉬는 사이, 그동안의 여정을 담은 탐사기를 이렇게 펼친다. 언젠가 할망을 만나 느낌표를 얻을 때까지 여정은 계속되겠지. 섬이 된 할망 당신을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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