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이제 와서
광해, 빛의 바다로 가다 사라진 것들의 미래 실명풀이-꽃사월 순임이 숨을 잃은 섬 해설 : 사라지는 섬을 위한 비념 - 김동현(문학평론가) |
한진오의 다른 상품
|
노인 저분이 섬의 심장이며 여신일세. 비바람 속에서 내게 말하시더군. 섬의 심장께선 세상이 생겨날 때
부터 이곳에 계셨대. 많은 생명들을 낳고 품었다는군. 그러나 우리 인간들만 달랐다는군. 인간들 은 욕망의 끝을 모르는 존재들이래. 노인이 잠시 밭은기침을 하는 사이에 섬의 심장 맥박 소리가 울리고 땅이 흔들린다. 맥박 소리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맥박 소리를 따라 암벽이 금 가기 시작한다. 놀라는 물음표를 노인이 다독인 다. 노인 그리 놀라지 말게나. 섬의 심장께선 몸소 보여주시려는 것일세. 사라진 것들의 미래를 말이네. 다시 밑바닥이 없는 호수 속으로 사라지실 걸세. 나 또한 저분과 함께하고 싶네. 그사이 섬의 심장 맥박 소리는 점점 빨라지고, 소녀의 그림도 점점 빛을 잃어 간다. --- 「사라진 것들의 미래」 중에서 환 근데 어르신, 굿을 하면 효험이 있을까요? 노인1 게메이. 알 수 없주. 겐디 굿이라는 건 꼭 바라는 만큼 뒈고 안 뒈고를 떠낭 잘못을 빌려고 허는 거주. 환 잘못요? 노인1 아, 제주 섬에 이런 재난이 닥친 이유야 과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이 알앙 풀어낼 문제고. 우린 사람 덜이 무슨 잘못을 헤도 크게 헤시난 천지신명이 진노허 동티가 낫다고 보는 거주. 게난 바라는 건 둘째 치고 잘못을 먼저 빌어야 뒐 거 아니라. --- 「숨을 잃은 섬」 중에서 소리1-여 나무와 풀은 모두 어디에 있니? 코러스들 다리는 어찌 되었나요? 소리1-여 새와 짐승은 모두 어디로 갔니? 코러스들 다리는 어찌 되었나요? 소리1-여 옷을 다 지었니? 코러스들 다리는 어찌 되었나요? 소리1-여 나와의 약속을 묻는 거야. 옷은 어찌 되었어? 코러스들 다리를 보여주소서. 그리하면 옷을 바치겠나이다. 소리1-여 나무와 풀, 새와 짐승들, 모두가 너희를 대신해 죽었어. 코러스1 당신의 몸을 감쌀 옷감이 되었나이다. 소리1-여 너희들은 또 다른 잘못을 저질어. 코러스2 당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나이다.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소리1-여 내가 바란 건 온 생명이 함께 사는 거야. --- 「숨을 잃은 섬」 중에서 떡집 아이고, 시리떡 다 뒛져. 찜기 김빠지는 소리만큼 시원헌 것도 엇어예. 삼춘, 경 안 허꽈? 나 인생도 저렇게 시원허게 뚫려시문 좋으켜만은. 예? 복에 겨운 소리? 삼춘이야말로 사름 속 모른 소리 허지 맙써. 이 추석 대목에 삼춘네 알바 불러가멍 눈코 뜰 새 엇이 바쁜디 코빼기도 안 비치는 서방 생각만 허민 터져분 송편 속만큼이나 복통 터졈수다. 요 대목에 솔짝 도망가수게. 나가 맨날 웃으멍 일허난 살만헌 거 닮지예? 말도 맙써. 놈덜은 꿀떡같이 사는디 나 인생은 완전 개떡이우다. 개떡. (뒤돌아보며) 야, 김군아. 송편 담을 박스에 채울 솔잎 시치라. 시리떡은 나가 꺼내켜. --- 「이제 와서」 중에서 대표 좋습니다. 여러분들의 뜻이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이 불량위패들을 박살내는 의식을 거행하겠습 니다. (관객들을 보며) 자유민주주의와 국가의 질서를 수호하는 60만 제주도민 여러분! 지금부터 4·3폭동 주범들의 불량위패 박살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달군 대표님. 불량위패가 뭐꽈? 대표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불량위패를 모른다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우리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무룡 (큰소리로) 4·3폭동이우다! 대표 예, 맞습니다. 유사 이래 가장 악랄하고 무자비했던 폭동이지요. 그럼 누가 일으켰습니까? 무룡 그거야 당연히 북한괴뢰도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폭도덜이 벌린 거 아니꽈게. 대표 딩동댕! 고무룡 어르신. 역시 반공용사답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폭동을 미화하고 왜곡시켜 말도 안 되는 4·3특별법을 제정한 것도 모자라 국가 추념일까지 제정하는 망국적 사태가 벌어졌다 이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달군 정부에서 허는 것도 잘못된 거우꽈? 대표님이 존경헤 마지않는 대통령님께서 정헌 거 아니꽈? 대표 저분 누굽니까? 뭘 그렇게 따져요. 여기가 애국대회장이지 토론장입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4·3폭동 바로잡자 이겁니다. 무룡 맞수다. 야당부터 시작헤서 시민단체다 뭐다 허는 빨갱이덜을 전부 때려 잡아뒙니다게. 대표 맞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욱 분통 터지는 일은 저 4·3평화공원 위령실에 안치된 희생자들의 위패 속에 남로당 빨갱이들의 위패가 버젓이 걸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그냥 놔둬서야 되겠 습니까? --- 「실명풀이-꽃사월 순임이」 중에서 |
|
표제작 「사라진 것들의 미래」는 최근 극심한 난개발로 인한 자연 파괴와 거대 자본의 유입으로 유사 이래 최대의 몸살을 앓는 제주의 현실을 신화적 문법으로 그려낸다. 제주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2월이면 등신(登神) 일행이 바다를 건너와 제주섬 곳곳을 돌며 해산물과 농작물은 물론 초목의 씨앗을 뿌려 봄기 운을 퍼뜨린다고 믿어 왔다. 이 때문에 2월을 ‘등이월’이라고 부르며 초하루에서 보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마을마다 등굿을 치러 왔다. 「사라진 것들의 미래」는 살육과 파괴로 황폐해진 채 버려진 섬이 되살아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바다 너머의 신(神)들을 청하는 이야기다.
「이제 와서」는 주인공 ‘떡집’을 통해 새로운 여성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대학 시절에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당찬 삶을 살았지만 결혼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제 와서」에는 남편을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주인공의 기막힌 인생 역정이 펼쳐진다. 그리고 구수하고 질펀한 입말의 향연이 그 기막힌 사연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광해, 빛의 바다로 가다」는 제주에 유배당해 죽음을 맞이했던 비운의 왕 광해군을 다룬 창작음악극이다. 절망과 회한의 가시 울타리에 갇힌 광해는 마침내 19년 유배의 종지부를 제주도에서 찍는다.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칼을 뽑아야 했던 고통, 재위 기간보다 길었던 19년 유배 시절의 심경과 죽음에 이르러 망망한 바다 속으로 잠겨드는 광해의 마지막 모습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실명풀이-꽃사월 순임이」는 극우 단체들이 제주 4·3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불량위패’ 논란을 형상화한다. 달군과 무룡은 친구 사이로 4·3 때 부모를 잃었다. 달군은 연좌제로 고통을 겪었고 무룡은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의 꼬임 때문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믿고 있다. 이 작품은 제주 4·3이 여전히 현재적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을 그려낸다. 「숨을 잃은 섬」은 더 이상 신성이 깃들지 못하는 섬의 현재를 신화적 상상력으로 말하고 있다. 신이 깃들지 않는 섬, 혼이 머물 수 없는 물성(物性)의 섬은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는다. “설문대의 육신이 제주섬이라면 여신의 숨결인 등신은 제주의 바람”이라는 잊힌 전설을 각성하게 되는 2막의 문제의식에서 볼 수 있듯 이 이 작품은 물성의 탐욕을 성찰하는 영성의 힘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한진오는 이 희곡집을 통해 과거와 현재, 신과 인간, 바다와 뭍을 잇는 파노라마와도 같은 작업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사실은 그것이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은 삶을 살아가는 순간, 동시에 다가오는 시간들이다. 그 시간의 동시성과 연속성 안에서 제주 사람들은 삶을 살았고 죽음을 살았다.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결국 삶과 죽음의 힘으로 생(生)을 만드는 긍정과 생산의 미학이다. 그 미학의 찰나가 번개처럼 새겨진 비석, 그것이 바로 제주의 신화이며 제주의 이야기이다. 한진오는 그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읽고 그것을 저잣거리에서 한바탕 만담으로 풀어낸다. 울고 웃기는 심방의 몸짓으로 만들어낸 비념의 순간들, 그것이 한진오가 보여주는 제주의 굿이다.”(김동현 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파도를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물져 오는 파도와 쉼 없이 불어오는 바람의 발원지를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제주, 섬에서 태어나 물 밖 세상은 겪어보지 못한 채 머리가 굵었다. 그 덕분인지 바다는 널따란 종이가 되고, 바람은 보드라운 붓이 되어 상상의 노트를 선물해줬다. 문학 소년을 꿈꾸던 사춘기의 열망을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 끝물에 대학에 들어가서는 탈춤반 활동을 하며 장구채를 손에 쥔 것이 졸업 후로도 이어져 30대 중반까지 마당판을 전전하는 광대로 살았다. 광대의 삶은 자연히 고향에 대한 탐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70여 년 전 다섯 살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고아가 된 어머니의 이력 속에 4·3이 잠복해 있었고, 그 아픔을 달래는 것이 하루도 그치지 않은 이 섬의 굿판인 사실도 광대의 삶 속에서 알게 되었다. (중략) 다섯 편의 극본에는 내게 주어진 광대로서의 소명이 관통하고 있다. 광대로서의 소명이며 제주 사람의 숙명이기도 한 나의 모든 작업은 ‘주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에 뿌리를 둔다. 척박한 자연환경과 정치적 변방이라는 삶의 조건은 제주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스런 현실의 돌파구를 주술에서 찾게 했다. 제주를 일러 1만 8천 신들의 고향이라고 부르다시피 섬사람들은 곳곳에 신성을 부여해 삶의 의지처로 삼았다. (중략) 이렇게 내 작업의 원천은 오롯이 제주의 굿 속에 있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굿판에 머무를 듯하다. 아직은 예술적 소양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작정한 만큼 스스로의 기대에 답하는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준 도서출판 ‘걷는사람’에 답례하는 마음으로 게으름 없이 걸어가야겠다. 굿처럼 아름답게…. 2020년 1월 한진오 |
|
물로야뱅뱅 돌아진 섬에서 선후배의 연으로 적지 않은 시간을 나눈 바, 한진오라는 인간은 한마디로 설명하기에 참으로 난감한 사람이다. 대학 시절 탈꾼으로 문화예술판에 발을 들인 이래 연물패, 마당판 광대를 거쳐 극작에 손을 대는가 하면 때로는 연행 예술의 연출가로서 활동하다 결국 제주의 ‘굿’에 꽂혀 두어 차례 누름굿에도 불구하고 그는 ‘심방’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가 들려주는 신의 이야기는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상처받은 신들의 이야기다. 해방 이후 4·3의 북새통에 불타버린 중산간 어귀 본향들이 그의 현장이며, 해군기지 건설로 파괴되고 매몰되어버린 강정 구럼비가 그의 현장이며, 제2공항이 들어설 어간에 위태롭게 자리 보존하고 있는 본향이 바로 그의 현장이다. 어디 그뿐이랴. 광포한 난개발로 인해 파헤쳐지고 무너지고 있는 이 섬이 곧 ‘설문대할망’이다. 제주는 그에게 설문대할망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한진오의 첫 희곡집 『사라진 것들의 미래』가 그 뚜렷한 증거다. 그는 말한다. 대동(大同)의 세상이란 천하 만물 모두가 주인인 세상이며, 그 반대는 한 줌도 안 되는 힘있는 자들이 천하를 독점하는 소강(小康)의 세상이라고. 그리고 묻는다. 지금은 대동의 시대인가? 소강의 시대인가? - 김수열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