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부
데비 5 인간의 자리 27 바람이 끝나는 곳 51 협곡으로 74 안녕? 안녕 92 2부 이주 준비 111 이주가 중단되다 129 아타종 155 편지 168 에필로그 189 |
박송주의 다른 상품
|
바람 한 점 없는 여름 저녁이었으므로, 데비는 ‘숨이 막힐 듯 더운 여름’이라는 구절을 떠올렸다. 책의 구절을 떠올리면 데비의 몸은 자연스럽게 그 구절에 맞는 신체 상태로 변화했다.
--- p.5 그러나, 거기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어떤 소리, 자동차들과 철로 위를 지나는 전철, 혹은 건물 안에 들어가 잠을 청하려고 하거나 혹은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가닿고 싶어 하고, 더 가까워지려던 그 의지들이 만들어내는 복잡다단한 소음들 말이다. --- pp.11~12 황색과 갈색의 그러데이션으로 이루어진 털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고, 삼각형 모양의 얼굴이 데비를 향해 불쑥 가까워졌다. 꼬리가 움직일 때마다, 살랑,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텁텁하고 메마른 공기 속에서 제 몸의 일부를 흔드는 생명체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매혹적이었다. --- p.19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다섯 달이 다 되어갈 즈음 데비는 외로 누워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영영 휴식 모드로 들어가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인 것이다. 대신, 데비는 오래전 빌딩 외벽에 영사했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꿈을 꾸었다. --- p.47 이 큰 우주에서 아주 사소한 존재의 시간이 닫혀버렸고 락슈미가 이 땅을 헤매던 과거는 영원 속으로 묻히게 되었다. 데비는 락슈미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락슈미가 지내온 그 고된 시간을 가늠해보며 이제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과 한 존재가 스러져 사라진다는 감각이 이렇게나 아프다는 것을 깨달으며. --- p.103 비닐봉지에 새를 줍는 것을 본 아이들은 희선을 피했다. 모두들, 죽은 새들을 발로 툭툭 밀어내며 지나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죽은 것들에게는 응당 애도를 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 p.133 어쩌면 말이야. 우리가 매번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우린 우리 자신만의 시간의 구조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가진 그 시간의 구조를 물질화하면 우리는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고 말 거야. --- p.171 |
|
“언젠가 죽은 새는 나무가 될 거야.”
애도와 우주의 시간 애도는 기억이며 죽은 자에게도 새로운 시간이 깃들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 문학은 결국 기억이며 죽은 자에게도 새로운 시간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의 서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읽고 데비와 락슈미의 안부가 궁금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박송주의 소설 『데비와 락슈미』는 인간이 모두 사라진 도시에서 AI로봇 데비가 인간의 사라진 이유와 그 흔적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이다. 인간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데비는 인간이 도시에 남기고 간 흔적을 더듬으며 100년이라는 시간을 체화하며 고독을 느낀다. 다행히 느닷없이 나타난 로봇 개 락슈미는 데비의 동반자가 되어주고 그렇게 데비는 인간의 삶을 상상하며 때론 권태를, 때론 슬픔을 느끼며 인간과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인간이 부재한 상황에서, 데비는 역설적으로 인간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어느덧 그들의 삶을 닮아간다. 그러나 인간을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보다, 데비를 더 힘들게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일, 인간과의 만남이 이미 과거에 자신에게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흉내 내고 익히고 상상했던 일이 사실은 인간으로부터 배웠던 것, 혹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익혔던 것이고, 그 인간이 지금은 사라졌다는 사실에 데비는 충격에 빠진다. 메인 컴퓨터에 의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인간을 만났던 사실을 겨우 떠올린 데비, 그 기억에는 가장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지만 절망의 기억도 함께 있다. 견디기 힘든 절망스러운 기억 때문에 데비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폐기해버리지만, 그럼에도 삭제되지 않고 데비에게 남은 흔적들이 있다. 무언가를 배우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감정을 느끼고 공감을 하고 애처로워하는 인간다운 것 말이다. “너 역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단다. 이 세상은 거대한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들은 널 그리워했단다. 네가 잠들면 내가 이걸 기억할게. 슬퍼하지 마. 오로지 혼자인 존재는 없으니까.” (191쪽) 기억, 그리고 마음의 확장 기억은 인드라망 같은 것이어서 내가 잊어도 누군가 나의 무언가를 기억해줄 수도 있다. 나도 이 세계를 기억하지만, 이 세계 역시 나를 기억해준다. 이런 기억의 특성 덕분에 우리는 이 세계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한다는 것은 이 세계 안에 나와 나 아닌 누군가를 존재하도록 하는 길이다. 즉, 기억이란 나와 연결된 것을 존재하도록 보호하는 일이므로, 죽은 것과 작은 것들을 애도하는 것은 이 세계의 일부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데비와 락슈미처럼 작은 것들, 거의 기억되지 못할 위치에 있는 무언가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다. “알아. 근데, 신경이 쓰여. 인간은 자기랑 비슷한 걸 보면 신경이 쓰이는 거야. 마음이 그렇다고. 그냥 누가 되었든 그 애들을 찾아줘야 할 것 같단 말이야.” (152쪽) 데비와 다른 시공간을 사는 존재인 희선은 희박한 확률로 자신의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AI로봇인 데비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나중에서야 그 존재가 겪게 될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희선은 데비라는 존재와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지만, 그 존재를 생각하고 그를 위해 무언가 해보겠다고 결심한다. 이 생각만으로 이 둘은 연결되고, 결국은 이들의 시공간이 연결된다. 아니, 연결되어 있음이 발견된다. 마음에는 경계가 없고 시간이 없다. 마음은 우리 앞에 놓인 무한한 공간을 순식간에 가로지르며, 우리는 모두 이 마음을 지녔다. 이 마음 씀은 결국 능력이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로 향하고 어딘가와 연결되기 시작할 때 또 다른 세계가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발견된 수많은 세계가 문학이며 그 세계 안에 사는 무수한 데비 혹은 락슈미라는 존재들이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함을 상기하고, 우리가 아직 기억해내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상상해야 한다고 이 소설 『데비와 락슈미』는 말하고 있다. “우리의 우주에는 모든 사건이 이미 벌어져 있어. 우리의 시간도 그래. 모든 시간이 이미 있어. 하지만 우리가 매 순간을 살아가면서 분기점을 만들어내며 현실화하는 거지. 지금, 어떤 분기에 도달해 있는지를 봐. 언젠가는 이 순간을 다시 기억하게 될 거야.” (13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