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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평전
효당(曉堂) 이홍구(李洪九) 전 국무총리의 정치철학과 현장실천
김학준
중앙북스(books) 202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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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 top100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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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1부 국내외에서의 배움의 시절(1934~1968년)

제1장 전통적 유교교육 속에서 정치관(政治觀)의 기반을 형성하다:
출생에서 도미 직전까지(1934년 5월~1954년 1월)
제2장 14년에 걸친 미국에서의 연구와 교수 생활:
특히 에모리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의 연구생활을 중심으로
(1954년 1월~1968년 6월)

2부 학계 시절(1968~1988년)

제3장 정치학의 고전들을 강의하면서 ‘민주정치의 부활’과 ‘정치적 자유의 보장’을 요구하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제3공화국 후반기에 발표한 저술들 (1968년 6월~1972년 10월)
제4장 국민참여의 확대를 제의하면서 동시에 ‘코리안 코먼웰스’안을 발표하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제4공화국 시기에 발표한 저술들 (1972년 10월~1979년 10월)
제5장 제5공화국의 입각 제의를 거부하고 ‘협의민주주의론’을 제시하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제5공화국 시기에 발표한 저술들 (1979년 10월~1988년 2월)

3부 정·관계 시절(1988~2000년)

제6장 국토통일원장관으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정부의 공식적 통일방안으로 확정하고 영국 주재 대사로 북방정책을 뒷받침하다 (1988년 2월 25일~1993년 4월)
제7장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원칙적 합의를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구체화하다:
통일부총리를 거쳐 국무총리 그리고 여당 대표로(1993년 7월~1998년 2월)
제8장 외환위기 수습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현장에서 뛰다: 주미대사로(1998년 5월~2000년 8월)

4부 언론계·시민운동계 시절(2000~현재)

제9장 국제적 협력과 평화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다:
서울국제포럼 이사장과 중앙일보 고문으로 「한·중·일30인회」를 이끌며(2000년 12월~현재)
맺음말
나가는 말 : 현인(賢人)이면서 외유내강의 정치지도자 이홍구 교수를 말한다
이홍구의 발언록: 정치, 정치학, 정치학의 주요 개념, 그리고 역사적 사건에 한정하여
이홍구의 저술, 강연 좌담, 인터뷰
이홍구의 연보
참고문헌

저자 소개 1

인천대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회장, 카이스트 김보정석좌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943년 중국 심양에서 출생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인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서울대학교대학원과 미국 켄트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받고,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1983년도에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2년 상해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이 책의 초판에 해당하는 <매헌 윤봉길 평전>을 민음사에서 펴냈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 역사와 정치, 인물에 관한 다양한 도서를
인천대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회장, 카이스트 김보정석좌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943년 중국 심양에서 출생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인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서울대학교대학원과 미국 켄트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받고,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1983년도에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2년 상해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이 책의 초판에 해당하는 <매헌 윤봉길 평전>을 민음사에서 펴냈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 역사와 정치, 인물에 관한 다양한 도서를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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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3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760쪽 | 152*222*40mm
ISBN13
9788927879664

책 속으로

이홍구는 1953년 여름, 서울로 환도해 1학년 2학기를 이화동 캠퍼스에서 시작하면서 도미 유학을 결심한다. 법대에 입학할 때는 고등고시를 거쳐 판사가 되기를 희망한 아버지의 뜻을 따랐지만, 그는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컸기에 자신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침 어머니의 큰오빠의 딸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수료하고 조지아주립여자대학(Georgia State College for Women: GSCW)을 졸업한 뒤 테네시주립대학교에서 교육학석사학위를 받고 1953년에 귀국한 주정일(朱貞一, 1927~2014) 교수가 도움을 주었다. 주정일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출발해 숙명여자대학교로 옮겨 아동복지학과를 신설하고 거기서 정년퇴임한다.
---「‘도미 유학의 길에 오르다’」중에서

이홍구는 핫스혼 교수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와 예일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동시 지원했으며, 두 곳 모두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이홍구는 하버드대학교에 관심이 컸으나 핫스혼은 이홍구에게 폴 와이스(Paul Weiss, 1901~2022) 교수가 아직도 형이상학을 강의하고 있는 예일로 진학할 것을 권고했고, 그는 그 권고를 받아들였다. 와이스 교수는 뉴욕시립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화이트헤드 교수의 지도를 받아 192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 브린모어칼리지(College of Bryn Mawr)에서 조교수로 출발해 예일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됐다.
---「‘예일대학교를 선택한 배경‘」중에서

이 교수는 귀국한 이후 자신의 박사학위청구논문에서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다. 그것들은 크게 보아 다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자신이 회원이었으며 한때 회장을 맡았던 한국정치학회와 한국의 정치학 현황, 그리고 자신이 집행위원을 맡았던 세계정치학회(International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IPSA)에 관해서다. 둘째, 자신이 속한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한국의 대학들과 교육제도에 관해, 그리고 지식인사회와 청년문화에 관해서다. 셋째, 남북한관계와 통일, 한미관계·한일관계를 비롯한 한국의 주요한 국가들과의 관계에 관해서다. 넷째, 자원문제와 공해문제 및 환경보호문제 등을 포함한 국제적 쟁점들에 관해서다. 이 글들에서 그는 제17명제로부터 제25명제까지 아홉 개의 명제를 제시했다. 다섯째, 국내외에서 출판된 저서들을 대상으로 한 서평이다.
-’박사학위청구논문에서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 대한민국의 대외관계 및 국제문제 그리고 한국정치학의 현황 등’」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교수의 정치학적 사고와 저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를 설명하지 않거나 언급하지 않은 사례는 보기 드물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는 경우, 특히 그가 『정치학』에서 말한 ‘좋은 인간과 좋은 시민의 관계’를 상기시키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인간이라는 것이 언제나 좋은 시민이라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제왕국에서의 좋은 시민이 민주공화국에서도 좋은 시민이 될 수 없듯, 좋은 시민의 기준이란 구체적인 국체(國體)와 정체(政體)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라는 취지로 설명했는데, 이 교수는 이 설명을 때때로 인용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중에서

이홍구 교수는 1980년 4월 1일에,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때의 제도와 관행에 따라 대통령 발령으로 정교수로 승진했으며, 1986년 9월 1일에 정교수로 재임용을 받았다.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 국토통일원장관으로 입각하기 하루 전인 1988년 2월 24일에 사직할 때까지 8년 가까운 기간에 우선 정치학과 동료 교수들이 공동제작한 『신정치학개론』의 지속적 증보 작업과 『현대정치학의 대상과 방법』 편집에 참여했으며,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이 연구소를 이끌어나갔다. 동시에 1981년부터 한국공산권연구협의회 회장으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와 제휴해 북한을 포함한 공산권 전반을 다루는 국제학술회의를 이끌었다. 1985년에는 파리에서 열린 제13회 세계정치학회 세계대회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집행위원으로 선출됐으며, 1986년에는 한국정치학회 15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서울대학교 교수로서 서양정치사상에 관한 저술을 계속하면서 사회과학연구소를 이끌다’」중에서

이홍구 교수는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서양의 정치사상과 정치철학 분야에서 지도적이었는데, 그 이전에 이 분야를 이끌었던 정치학자로는 김경수(金敬洙) · 민병태(閔丙台) · 백상건(白尙健) · 서임수(徐壬壽) · 이용희(李用熙) · 정인흥(鄭仁興) · 한태수(韓太壽)[가나다순]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들 가운데, 김경수 · 서임수 · 이용희의 경우, 국내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일제강점기이던 당시 국내의 대학 또는 전문학교에는 정치학과가 개설되어 있지 않아 그 공부는 처음부터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으로, 김경수와 서임수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에서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한 가운데 정치사상을 공부했고, 이용희는 연희전문학과 문과에서 정치사상의 기초를 닦았으며 이후 동서양 원전을 포함해 자료를 많이 소장한 만철(滿鐵) 조사부에서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연구를 심화했다. 광복 이후, 김경수는 미국의 정치학자 레이몬드 게텔의 주저를 번역했으며, 서임수는 독일의 철학자 쿠르트 슈테른베르히의 주저를 번역했고, 이용희는 서양의 정치사상에 관한 저서를 출판했다.

---「‘한국정치학계에서 서양정치사상 분야의 선학들’」중에서

출판사 리뷰

현인(賢人)이면서 외유내강의 정치지도자 이홍구의 삶으로 그려낸
한국정치학의 ‘대동여지도’를 만나다!


전 국무총리를 지낸 효당(曉堂) 이홍구 교수의 인생과 업적을 모두 다룬 책, 《이홍구 평전》이 출간됐다. 이 책은 이홍구 교수가 그간 한국 정치학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또 정치전기학 또는 정치리더십의 시각에서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 대북·통일문제와 대외관계에서 거둔 그의 괄목할 만한 성과의 원천은 무엇이었는지, 글로벌 리더의 반열에 올라선 성과를 뒷받침한 것은 과연 무엇인지, 출중한 업적에 버금하는 그의 인품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총 5가지 물음에 대한 분석과 대답을 모두 담은 책이다.

이홍구는 1988년 2월부터 2000년 8월까지 12년 6개월에 걸쳐 대한민국 정치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대통령부(大統領府)에서 대통령정치담당특별보좌관으로 봉직했고, 내각에서 국토통일원장관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및 통일부총리를 거쳐 마침내 국무총리에 올랐으며, 국회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함과 아울러 신한국당 대표위원으로 집권여당을 이끌었다. 1997년 12월에 실시될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신한국당의 경선에도 참여했다. 그는 또 주영대사와 주미대사를 차례로 맡아 외교현장의 일선에 서기도 했다. 그러면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그리고 동시에 화려하게 활동한 그는 정치전기학 또는 정치적 리더십이라는 시각에서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평가를 내놓는다.

제1장은 출생(1934년)으로부터 도미 유학 직전(1954년)까지의 20년을 다룬다. 서울의 전형적인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기본적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 8·15해방을 맞은 그는 중학생 때 좌·우익 투쟁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목격했으며 고등학생 때 6·25전쟁을 겪었고 대학생 때 휴전을 보았다. 유교교육의 내용에, 역사적 격변을 현장에서 체험하며 터득한 깨달음을 결합해 그는 자신의 인생관(人生觀)·세계관(世界觀)·국가관(國家觀)·정치관(政治觀)의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다. 서로 연결되는 이 관념들은 그의 개인생활에 대해서도 그러했지만, 특히 그의 공직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1장은 그가 받은 유교의 가르침 그리고 그가 터득한 깨달음이 무엇이었는가에 대답한다.

제2장은 에모리대학교(Emory University) 입학(1954년)으로부터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1968년) 14년을 다룬다. 그사이에 그는 에모리대학교에서 방문조교수,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교(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에서 조교수로 봉직했다. 이처럼 긴 시기에 그는 누구의 무엇을 누구로부터 배웠고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무엇을 전수했는가? 그가 배운 정치학은 구한말 이후의 정치학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제2장은 이 물음에 답하고 있다.

제3장은 그의 귀국(1968년)부터 유신체제 등장 직전(1972년)까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봉직하는 가운데 발표한 저술들의 분석에 초점을 맞춘다. 주요 학술지들과 그리고 사회적 요구에 따라 국내의 유력지들에 발표한 그의 논설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하는 ‘근대화’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명하는 가운데 박 대통령이 주로 물질적 성장에 치중하는 ‘근대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근대화’ 아래서는 ‘인간소외’가 깊어질 것이기 때문에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논평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박 대통령이 ‘근대화’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행정의 효율성을 앞세우며 정치를 희생시키는, 이른바 ‘정치의 비정치화(非政治化)’를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정치의 회복’을 일관되게 제의했다.

제4장은 유신체제의 등장(1972년)으로부터 박 대통령의 ‘시해’에 따른 유신체제의 붕괴(1979년)까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봉직하는 가운데 발표한 저술들의 분석에 초점을 맞춘다. 대학과 지식인사회에 대한 공안기관의 통제가 그 이전에 비해 훨씬 강화됐던 이 시기에도 그는 ‘국민참여의 확대’를 통한 ‘정치의 회복’을 제의했다. 동시에 1975년에는 국제학술회의에서 남북한의 통일방안으로 ‘코리안 코먼웰스(Korean Commonwealth)’안을 제의했다.

제5장은 유신체제 붕괴(1979년)로부터 제6공화국 출범(1988년) 직전까지의 시기에 여전히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봉직한 그의 언행들과 저술들을 분석했다. 유신체제가 붕괴하면서 곧바로 개헌 논의가 활발해지자, 한국방송공사(KBS)는 헌법 개정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몇 차례 열었는데, 그때마다 좌장을 맡은 그의 토론회 진행방식과 발언 내용이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특히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선봉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정치지도자 모두 직선대통령제로의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 선출되려는 강한 집념을 보이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나라는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역설한 그의 발제는 학계와 언론계를 포함한 지식인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12·12 군사반란을 거쳐 제5공화국 수립을 주도한 신군부는 국민 사이에 인기 있는 그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 한 보기로, 그를 상대로 우선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으로 들어온 뒤 문교부장관 또는 국토통일원장관 또는 외무부장관으로 일했으면 좋겠다고 당시 실세 가운데 꼽히던 몇몇 요인이 끈질기게 회유도 하고 ‘협박’도 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미소로써 거절했다.

제6장은 민주화를 개시한 제6공화국의 첫 대통령인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이끈 정부에서의 공직생활을 다룬다. 그는 노 대통령의 권유를 받아들여 국토통일원장관으로 입각해 자신의 개인적인 구상이었던 ‘코리안 코먼웰스’안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다듬어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공식화했으며 국회의 여러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아내 적어도 그 국내적 기반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곧 대통령정치담당특별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주영대사로 봉직했다.

제7장은 제6공화국의 두 번째 대통령인 김영삼 대통령 정부에서의 공직생활을 다룬다. 그는 주영대사를 떠나 귀국한 직후 대통령 자문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부총리급)으로 출발해 통일부총리로 봉직했다. 통일부총리로 봉직하던 때인 1994년 6월에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은 미국 카터 전 대통령의 알선에 따라 7월 하순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홍구 부총리는 곧바로 판문점에서 북한 대표단과 회담하고 남북정상회담을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의제를 놓고 개최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를 여덟 시간 만에, 그것도 북한에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고 끌어냈다. 그러나 김일성이 뜻밖에 1994년 7월 8일에 사망함에 따라 이 합의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 부총리는 곧 국무총리로 기용됐으며, 1996년 4월에 실시된 15대 국회에 여당인 신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신한국당 대표위원으로 활동했다.

제8장은 우선 제6공화국의 세 번째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이 이끈 정부에서의 공직생활을 다룬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을 때 이홍구 전 총리는 신한국당 대표위원이면서 국회의원이었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난 외환위기의 수습을 위해 당시 미국 행정부를 이끌던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해 그 보좌관들과 가까운 이 전 총리의 역할이 긴요하다고 판단해 주미대사직을 제의했고,이 전 총리는 ‘6·25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으로 불리던 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조한다는 공인으로서의 마음가짐으로 그 제의를 받아들여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로써 그는 직업공무원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 및 김대중 대통령 등 세 대통령을 모시고 고위직에서 일한 특유한 경력을 보여주었다.

이어 2000년 8월에 주미대사를 사임하고 귀국한 이후, 앞에서 설명했듯, 여러 분야에서 국가원로로 밟은 길을 다룬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실현하고 그것을 굳히기 위해 과거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북한에 대해서도 핵무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개혁과 개방의 길로 스스로 전환할 것을, 그리고 서방세계는 북한의 전환을 유도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이 책의 논점들을 정리하고 동시에 그의 인품에 대한 여러 사람의 증언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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