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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센세이셔널한 상업사진이라도 기억되는 건 유행의 조명이 교체되는 잠깐의 시간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제작된 상업사진들은 그저 찬란하게 나타났다 잊힌 낡아버린 트렌드, 한때의 백일몽으로 취급된다. 이건 한낱 꿈일까? “아주 정밀한 기술이 그것의 산물들에게, 손으로 그린 그림이 우리에게 결코 줄 수 없는 마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사진이 인간의 눈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시각적 무의식(das Optisch-Unbewuβte)’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며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이라면 이 철 지난 상업사진들은 무엇을 비추고 또 말하려는 것일까?
김한용으로 대표되는 1세대 상업사진가들은 영화 제작소가 밀집한 충무로에 자리를 잡고 한국 영화 산업의 일부를 담당했다. 영화 투자자들에게 제작 과정을 공유하거나 촬영 세트를 점검해 주는 역할을 하던 이러한 확인 사진들은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옛 영화의 증거자료로 활용된다. 당시 사진가들은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는 장인처럼 자신의 작업실을 ‘연구소’라 명명하고, 촬영과 인화 작업을 비롯 광고주와의 소통이나 모델 섭외 등 기획자의 역할까지 직접 담당했다. 감각적인 사진들은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진 우연한 결과처럼 보이지만―완벽히 계획된 그대로는 아닐지라도―흐트러진 머리카락 한 올까지 논리적으로 계산되어 있다. 설득력 있는 연출을 위해서는 대개의 경우 협업자가 필요하다. 여러 협업자들과 물건이 어지럽게 뒤섞인 스튜디오는 카오스에 가까우며 촬영 과정은 지루하고 끈질긴 노동이다. 상업사진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중 하나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값비싼 물건들로 가득한 이 꿈의 공장이 그 결과물만큼이나 매혹적일 것이란 환상이다. 하지만 현실의 촬영 스튜디오는 대개 정신없고 태초의 공허만큼 고요하다. 1980년대에 들어 한국 상업사진계는 질적 변화를 맞이한다. 선진화된 시스템과 독자적 예술성으로 상업사진의 난제를 풀어갈 새로운 사진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앞서 구축된 기술과 자본의 토대 위에 제반 조건들도 갖춰져 나갔다. 첫 모델 에이전시(모델라인, 1983)와 한국패션모델협회가 설립(1985)되었고, 에스모드의 서울 분교(1989)가 신사동 가로수길에 개교(1989)했다. 『언커머셜》은 1984년을 상업사진계에 새로운 물결이 시작된 원년으로 상정한다. 생각해 보면 그해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신문사나 잡지사의 소속 사진가로 일했던 대다수 사진가들은 노동시장 개편으로 직장을 떠나 독립 스튜디오를 차렸다. 이로써 1990년대 이후 상업사진의 무대는 충무로에서 강남으로 완전히 이전된다. 고가의 브랜드들이 명품 거리를 형성하며 패션, 광고,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집결된 강남은 자본과 유행, 화려한 사람이 모이며 이른바 ‘강남 스타일’을 형성한다. 1960-1970년대의 충무로 사진 연구소가 영화와 공생하며 기술 장인으로서 사진의 기법을 연마했다면, 강남의 사진 스튜디오들은 패션·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글로벌한 성장과 함께 한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상업사진의 팽창기는 200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외환 위기로 인한 경제 불황은 한국 상업사진계에 뜻밖의 기회로 작용했다. 광고 제작비 절감을 위해 브랜드들은 외국의 유명 사진가를 기용한 해외 로케 촬영 대신 국내로 눈을 돌렸다 . 이제 막 강남에 자리 잡기 시작한 젊고 유능한 사진가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클라이언트에게 이들 사진가를 연결해 주는 사진 에이전시도 등장했다. 사진계는 양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보다 효율적인 체계를 만들어갔다. 가속화된 발전은 오랜 기간 한국 상업사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진의 흥망성쇠를 설명해 주는 역사적 물음이나 경우에 따라 철학적인 문제들까지 수십 년간 주목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한 물음들이 오늘날 의식되기 시작했다면 거기엔 엄밀한 이유가 있다. 한국 상업사진의 과거를 조사하는 일은 흙에 파묻힌 찬란했던 옛 도시의 흔적을 발굴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까다로웠다. 나를 포함한 여러 패션광고계 종사자들이 각자의 기억을 파헤치고 더듬어 모호한 조각들을 꺼냈고 그 유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맞춰나갔다. 『언커머셜』의 참여 작가들이 제공한 원본 필름과 카탈로그 자료들은 기존의 주류 미술계가 미처 담지 못한 문화산업 시대의 예술작품이자 사회·문화적 증거로서 가치를 지닌다. 대량 유통되었던 그 많던 사진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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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간 묻혀 있던 상업사진들의 비상업적 이야기
한국에서 최초로 사진 광고가 나타난 시기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적 의미의 상업사진 개념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자리 잡았다. 1959년 김한용이 사진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1세대 상업사진가들은 주로 충무로에 터를 잡고 1960-70년대를 거치며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는 장인”처럼 상업사진의 문법을 개척해 나갔다. 1980년대 들어 한국에 본격적인 소비사회가 태동하자 충무로를 중심으로 이뤄지던 상업사진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이 책이 기준으로 설정한 1984년은 기술, 매체, 산업, 인적 인프라 등 다양한 면모에서 상징적 변화가 두드러진 해다. 안상수가 아트 디렉터를 맡았던 『멋』을 인수한 동아일보는 『월간 멋』으로 개간하여 글로벌한 패션 무드를 한국에 소개하기 시작했으며, 애플이 출시한 매킨토시가 광고 제작 공정에 불러온 혁신은 여러 전문가가 분업하거나 협업할 여건을 마련했다. 김중만, 김영수, 구본창, 김용호 등이 해외 유학에서 돌아와 사진가의 역할을 재정립한 것도 같은 시기이다. 이들은 광고주의 의뢰에 따라 상업사진을 찍는 사진가이기 전에 “예술가의 자의식을 지닌 작가로서 일관된 주제의식과 작품의 내용에 부합하는 특유의 기법,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수사적 표현으로 예술사진과 상업사진의 경계를 오갔다.” 이후 충무로에서 강남으로 무대를 옮긴 상업사진계는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강혜원, 곽기곤, 김태은, 김현성, 김희준, 레스, 목나정, 목정욱, 박종하, 안상미, 안성진, 이전호, 최용빈, 홍장현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보를 형성해 나갔으며, 당대에 이르기까지 패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성장은 물론 사회?경제적 변화, 디지털 기술의 발전 등을 적극 흡수하며 실험적, 독창적 스타일을 구축해 왔다. 오늘날 한국의 상업사진 창작자들은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과 작업하고, 해외 사진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으며, 전 세계 패션지에 자신의 사진을 선보인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저 개인의 탁월한 미적 역량만이 아니다. 사진이라는 재현 매체와 광고라는 상징적 기제, 대중이 가진 욕망과 사진가 개인의 이상 사이의 좁은 틈을 뚫고 수많은 협업자와 조율하며 한 장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 한 달 혹은 그보다 짧은 주기로 이 까다로운 과제를 반복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잠시 빛을 발한 후 이내 잊힌다. 늘 새로운 이미지가 필요한 패션?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소임을 다한 이미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대량 유통되었던 그 많던 사진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라는 기획의 말처럼, 망각이야말로 상업사진의 독자적 의미를 묻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과 연보, 그리고 사진가 29인의 작품 247점은 그러한 망각에 맞서 “여러 패션광고계 종사자들이 각자의 기억을 파헤치고 더듬어 모호한 조각들을 꺼냈고 그 유물들을” 엮은 결과물이다. 그 모든 상업적 덮개가 휘발한 후, “유행의 조명이 꺼지고 꿈에서 깨어난” 지금, 비로소 40여 년간 묻혀 있던 이들의 비상업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