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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붓꽃
홍천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밤의 망루 옛날에 농담이 있었어 소리와 흐름 멈춘다 흐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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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있는데 다리 사이에서 속살거림이 느껴진다. 간지럽다. 나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서 화장대에서 손거울을 빼들고 팬티를 내린다. 구부려 앉은 자세로 거울을 갖다 댄다. 검은 붓꽃이 거울에 모습을 드러낸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다. 숨어 있던 입은 얼마 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처음 본 뒤로, 충격을 받은 탓인지 그때부터 뒤늦게 말문이 터진 아이처럼 아무 때나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불만을 달래듯 두 개의 입술을 부드럽게 만진다. 꽃잎이라고 표현하는 그곳은 메말라 있다. 메말라 있는 입술에 검은 붓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가만히 손가락을 찔러 넣어 입술을 벌린다. 수다스러운 입은 자꾸만 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귓불을 어루만지듯 나는 그곳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검은 붓꽃」중에서 여기 모인 분들은 혼자 죽는 게 두려워 여행길에 동참한 거 아닙니까. 이번에도 같이 해보죠. 하루만 더 사용해 봐요. 본이 한 말 중에 제일 길었다. 다들 말이 없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하는 것 같았다. 전열이 흐트러지고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제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긴소매의 팔을 긁어댔다. 착화탄에서 불꽃이 튀며 연기가 올라왔다. 매캐한 연기가 바깥으로 맘껏 뻗어나가지 못하고 천정에 부딪치며 옆으로 퍼졌다. 탁은 연거푸 기침을 했다. ---「홍천」중에서 이순은 앉아서 망연히 하늘과 구름과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문득 발목에 젖은 모래를 털어내며 신발을 벗어 맨발을 내밀었다. 따끈한 모래의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발가락들이 저마다 자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집 안이 아닌 곳에서는 늘 감춰져 있는 발가락들이 해를 볼 일이 있겠는가. 역사적인 사건인데, 서로 햇빛을 쐬려고 구멍에서 얼굴을 내미는 두더지 같았다. 이순은 발가락 낱낱을 떼어 움직여주었다. 너희를 덩어리가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존중할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중에서 ㄱ은 11살 이후로 줄곧 성을 지켜왔다. 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괴이한 공격의 무리가 달과 해가 바뀌어 푸른 달이 피로 얼룩질 때 바람과 함께 나타난다는 운명적 예언이 있었다. ‘푸른 달이 피로 얼룩질 때’는 다분히 상징적인 것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 다만 밤과 낮이 바뀌는 경계 시점으로 밤과 관련되어 있다고들 했다. 하지만 진리인 양 떠드는 그 말들이라는 것은 다분히 낮의 진실을 가리기 위한 위장막일 수도 있었다. 밤과 낮의 구별은 무의미했다. 공격 시점이 밤이 될지 태양의 시간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성의 첫 번째 고위 관리자인 클람만 예언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들 말했다. ---「밤의 망루」중에서 경의 또렷한 귀를 본다. 귀를 세우고서 귀주머니가 움직인다. 내 말뿐 아니라, 어설픈 휘파람도 심지어 자신이 흘린 말의 일부도 귀주머니에 서둘러 담는다. 저리 바쁘게 쫑긋거리는 매력적인 그녀의 귀 문(門). 귀주머니 속 흩어진 말 조각들을 맞춰 본다. 어쩌면 이 세상에 없는 낯선 말들의 조합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기묘하고 낯선 말들의 감각이 농담처럼 흘러나올지도. ---「옛날에 농담이 있었어」중에서 록은 노래 부르다 간주 사이에 문득 뒤를 돌아봤다.?무대 뒤 어둠이 그녀를 골똘히 쳐다본다.?어둠 속 눈이 도마뱀처럼 벽에 붙어서 무대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천연덕스럽게 또아리 튼 무엇.?록은 얼핏 들여다본 어둠 속 눈을 외면하며 마이크를 힘주어 잡았다. ---「소리와 흐름」중에서 판서하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다 햇빛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본다. 운동장은 텅 비어 있고, 주택가와 경계진 울타리 아래의 테니스 코트에서 하얀 캡을 쓴 두 여자가 공을 주고받고 있다. 햇빛이 환하다. 빛의 내부로 들어가고 싶다. 나는 왜 여기 의자에 묶여 있을까, 안으로 흐르는 피는 끓어서 피부 속을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데, 심장은 뜨겁게 솟구치는데 침이 튀는 선생님의 말은 귀 바깥에서 머물고 교실에는 나른한 잠기 어린 권태가 떠돈다. 입체적이지 않다, 정물, 부당하다, 부조리하다,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과연 무엇을 위해…… ---「소리와 흐름」중에서 Y는 지금 차 안에 그대로 있는데, 찰나의 알 수 없는 영상을 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스르륵 몇 년 전의 그 회색빛 흐릿한 도로를 가고 있는데, 가고 있다고 느끼는데, 비루한 흰 고양이의 긴장을 접촉하던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 같은데, 그때와 현재 사이 한 치의 틈도 없는 그 시간의 밀착감이 피부에 생생히 닿는데, 지금 이 순간과 저 순간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멈춘다 흐른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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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에 한번 올라오면 다음 주자가 정해질 때까지
아래로 내려가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게 파수꾼의 운명이었다. 표제작 「밤의 망루」는, 작가가 프란츠 카프카의 『성(城)』을 오래 마음속에 어떤 이미지로 품고 있다가 쓴 소설이다. 「밤의 망루」에서는 고독한 망루에 홀로 서서 거대한 성을 지키는 파수꾼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임무를 안은 채, 어떤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홀로 성을 지켜야만 한다. 작가는 이를 두고 “불가항력의 본연적 임무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빈 땅, 안개로 휩싸인 적막한 공간에 발을 딛으며 헤맸다. 오리무중. 추상에서 구체화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시간이 걸렸다”고 술회한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상을 반복하던 파수꾼의 삶은, 한 여인의 등장으로, 그리고 그녀의 탈주로 요동치게 된다. 파수꾼과 같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던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그런 그녀가 파수꾼에게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망루 위의 파수꾼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네 인생의 마무리는 멋지게 환상적으로 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자, 들어봐.” 작품집의 문을 여는 「검은 붓꽃」은 몸의 소리를 애써 부정하고 가두려던 시대의 이야기이자, 그런 시대를 살아온 한 여성의 모습을 담은 소설이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고, 무엇보다 두려워하던 그녀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성기를 들여다보게 된다. “깊숙이 감춰진 성기를 드러내어 똑바로 바라보긴 처음이었다.” 작가는 한 사람 안에 고착된 고정 관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의 관습적인 시선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해서 그것을 실체라고 믿는 오류를 저지른다. 특히 그동안 여성들은 자기 신체의 주인 노릇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작가는 질문한다. 과연 지금은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서 살고 있느냐고.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하루를 선물하는 건 어때요. 작품집의 두 번째 이야기, 「홍천」은 어느 해 여름, 장의차처럼 검은 차를 탄 네 사람의 모습을 그린다. 그날 서로 처음 본 그들은 강원도 홍천으로 가는 차에 동승했다. 과연 그들은 왜 홍천으로 가는가. 작가는 언젠가 홍천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곳에 가기 전부터 어떤 정보도 없었음에도 ‘홍천’이란 장소로 소설을 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곳을 둘러보며 어떤 이야기가 자신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왔다고 회고한다. 마치 이야기가 “물 흐르듯이 내 안에서 흘러나와 소설 속 주인공들이 알아서 자기 길을 만들어 간 것이다.” 이순은 발가락 낱낱을 떼어 움직여주었다. 너희를 덩어리가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존중할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는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속으로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부부, 조금 더 정확히는 상운의 아내 ‘이순’의 이야기이다. 한때는 그들에게도 “서로의 심장에도 반짝하고 불이 켜지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순과 상운은 “각자 다른 별”이 되었을 뿐이다. 어느 날 상운이 이순을 위한 선물로 사들고 온 어항 속 물고기를 보는 것이, 이순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넓지도 않은 집 안에서 이순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고, “갈 곳이 없다”고 느낀다. 오랫동안 살아온 부부 사이라 해도 가장 가까이 밀착해서 산다 해도 서로의 마음속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눈치조차 못 채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다른 성향이나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어느 한쪽이 인내하지 않으면 가정을 건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물밑의 가라앉은 속말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착하다, 천사 같다, 자애롭다, 자비롭다’ 같은 칭송 뒤에 가려진 불편함, 거북함. 지금도 순간순간 사라지고 있어. 코로나 시대, 점점 더 삭막해지는 사회 분위기와 단절된 관계 속에서 그래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그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고 말한다. 「옛날에 농담이 있었어」에는 그런 작가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다. ‘경’과 ‘나’가 나누는 대화, 농담과 서로를 향한 시선, 마음. 그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일회용품처럼 소비되고 버려져 ‘옛것’이라는 창고 혹은 ‘낡음’, ‘쓸모없음’이라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박제되는 고도로 디지털화되고 스피디하게 전환되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작고 연약한 것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꿈틀거리는 생명력, 야생성, 자유를 향한 갈망을 엿보게 된다. 모든 것들은 소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2022년 제27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작, 「소리와 흐름: 록의 부치지 못한 노래」는 상실한 것에 대한 그리움, 이별과 만남의 우연과 필연, 이어짐과 끊어짐의 반복, 영원과 순간. 찰나의 스침같이 반짝이다 스러지는 것들에 대한 록의 헌사이다. 실험적인 문체의 변화와 파격을 시도해 하나의 아름다운 화성의 울림으로 다가가고 싶었던 작가는, “누구에게나 있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을 밀도 있는 문장으로 그려 냈다. 가볍게 문장을 끊어버리는 콤마들, 단어의 무수한 반복, 그러는 순간 갑자기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은 짧은 들숨과 긴 날숨이라는 상처의 호흡법을 매력적으로 형상화했다. 이 작품은 마음이 가난한 시대, 우리에게는 어쩌면 실종된 누군가가 필요하며, 실종의 그리움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는 성찰의 지점을 선사한다.”(심사위원 유익서·박향·권유리야) 시간은 흘러간 게 아니라 어딘가에 스며 있다 불쑥 나타난다. 시간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멈춘다 흐른다」는 얼핏 보면 전혀 연관성 없는 장면들을 갖다 붙인 듯한, ‘파편적 구성’을 취한다. 출근길 위를 흐르다 멈추다 하던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토끼, 도로로 뛰어든 흰 고양이를 본다.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의 순간, 꿈도 아닌 어떤 장면이 스르륵 펼쳐지는 것을 경험한다. 과거에 바라본 풍경과 현재의 순간이 연결되고, 과거의 기억이 침투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 현실과 가상, 지금 이 순간과 저 순간이 교차한다. 그렇게 작가는 “시간의 조각배에서 흔들리는 삶의 파편들”을 그려 낸다. 누구나 한 번쯤 “삶은 순간이고 허깨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장소, 현재라는 시간, 만져지는 감촉이 실체인지, 실재하는지 의심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작가는 “그런 느낌을 동시성의 공간에서 펼쳐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