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백악관 출입기자가 된 사연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내가 소련에 있을 때,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유세가 한창이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미국 대사관의 기자실에서 나는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TV 토론을 지켜보았다. 지구의 반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흑백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는 대담 프로였지만 나는 케네디의 매력에 압도됐다.
장래의 미국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난다. 1950년대 초, 나는 파키스탄 대사관의 한 파티에서 참석했을 당시 매사추세츠 주 상원이었던 그에게 집까지 바래다주기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의 성격이 활달하고 친절하면서도 아주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차 안에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다. 그는 친절하게 나를 아파트 앞에 내려주었다.
그 다음 날, 케네디 상원의원과 동행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던 친구가 그에 대해서 물어보앗다. 그러나 그녀에게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케네디 의원은 할 일이 그렇게도 없거나 아니면 멍텅구리 같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대답을 했을가?
케네디에 대한 호감도 있었지만,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백악관은 내가 가고 싶어하는 취재처가 됐다. 완고한 기자클럽을 상대로 투쟁했던, 경력이 화려한 나이기에 백악관 취재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는 못했다. 나는 매일 그 곳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고맙게도 UPI의 백악관 책임자인 메리만 스미티와 그의 동료 앨 스파이백이 나를 계속 지원해 주었다. 그때 내 나이 40세였고, 그 때부터 40여 년동안 일생의 후반기를 대통령을 취재하는 출입기자로 보내게 된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을 취재한다는 것은 일주일 내내, 그리고 하루 24시간 전부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나에게 첫 번째로 맡겨진 일은 조지타운 N가에 살고 있는 케네디 대통령 당선자의 가족을 취재하는 것이었다. 그 때의 인연으로 백악관 출입기자가 종신직이 되고 말았는데, 사실 문자 그대로 맨발로 뛰면서 시작했다. 신발이 닳도록 눈썹이 희도록 말이다.
나는 11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바깥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적어도 매일 한 번 대통령 당선자는 문 앞 계단으로 와서 그가 구성할 정부의 새 인물을 발표하곤 했기 때문이다. 당시 백악관 출입 여기자는 일반적으로 전문화된 사회의 컬럼니스트 정도로 봐주고 있었다. 나도 재키와 딸 캐롤라인을 지켜보면서 차기 영부인이 어느 오찬에 참석했고 그때 어떤 의상을 입었는지 본사에 보고했다.
추수 감사절 날 재키는 캐롤라인과 문 옆에 서 있었는데 그녀는 해산달을 맞아 잠시 플로리다에 있는 케네디 가家의 팜비치 별장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선거운동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케네디가 N가의 집을 떠나 저녁을 먹기 위해 돌아왔는데 자정 직전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재키가 조지타운 병원에서 존 F. 케네디 2세를 낳았다는 것이었다. 출산은 예정보다 2주 빨랐다.
케네디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황급히 돌아왔다. 그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많은 기자들과 사진기자들이 모여 있었고 시간이 흐르자 그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우리는 케네디가 병원에 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하루에 두 번씩 산모와 아기를 보러 왔다. 어는 날 나는 그를 붙들고 물었다.
''당신은 이 아기가 커서 미국 대통령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나는 다만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기만 바랄 뿐이오.''
선배인 메리만 스미티는 《편집자와 출판인Editor and Publisher》이라는 잡지에 존 F. 케네디 2세가 태어났을 때 내가 조지타운 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케네디도 나를 늘 그 자리에 지키고 서 있는 붙박이처럼 여겼다는 점을 기사로 쓴 바 있다.
어느 날 아침 케네디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취임 전 간담회를 갖기로 되어 있었다. 그 날 내가 맡은 일은 N가에 가서 그가 출발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때 케네디는 N가에 와 있는 나를 보더니 농담으로 한마디했다.
''당신, 내 아기 버리고 여기 왔군요.''
왜냐하면 항상 병원에 붙박이처럼 서 있었던 내가 그 곳을 이탈하여 N가에 나타났으니 당연히 그런 말을 할 만했다.
드디어 백악관 출입 여기자들에게도 남자들처럼 뉴스를 취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공보 비서관인 피에르 샐린저가 케네디와 그 부인의 뉴스까지 담당한다는 발표가 있은 후부터였다. 이와 같은 소식에 남자 동료기자들은 투덜대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종전의 남자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 사라졌다는 뜻이리라. 지금까지 고위급 정치회합 등에서 남자들은 그들만의 독과점을 누려왔으나 이제 여성들에게 침범당하고 보니 불평 불만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샐린저의 발표를 계기로 여기자들은 하루에 두 차례씩 있는 '뉴스 브리핑'에 참석할 수 있게 됐다. 그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였다.
케네디가 마지막 대통령직 인수 단계에서 크리스마스 휴가차 팜비치로 내려갔을 때 스미티와 나도 그 곳에 따라갔다. 나는 나중에 갔었지만 그 때가 백악관 출입기자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있을 자리에 당연히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내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기자단이 머물고 있는 타워 호텔에서 매일 샐린저의 브리핑 원고를 받아 그것을 송고했다. 샐린저는 팜 비치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브리핑을 했는데, 별로 예쁘지 않는 그녀의 통통한 다리가 사진기자에게 찍힌 다음부터는 긴 바지로 바꿔 입었다.
나는 재키뿐만 아니라 케네디도 취재하기로 했다. 나는 남자 전용 골프장에 잠입하여 마치 파파라치처럼 수풀 뒤에 숨어 케네디를 추적했다. 그 일을 두고 나중에 스미티가 나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말했다.
''마치 여자 골프 스파이 같았어.''
나는 팜비치에서도 열정적으로 재키의 뒤를 따라다녔는데, 본의 아니게 그 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사건이 발생했다. 내용은 이렇다.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해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재키가 아이들의 옷을 샀던 가게의 점원이나 혹은 미용사, 요리사. 그리고 파티를 위해 고용된 피아니스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해고되거나 거래가 끊기고 말았다. 이유인즉, 쓸데없이 기자와 인터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아기기저귀를 파는 가게의 주인을 예외였다. 그 가게 주인은 나와 인터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그 가게가 그 지역에서 아기용품을 파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은 가게가 하나만 더 있었다면 거래가 끊겼을 것이다.
재키는 수줍음을 타서인지 우리를 피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자신의 사생활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그에 비례해서 언론에 대한 반감도 커져갔다. 그녀는 백악관에 있는 동안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살아야 하는 자신의 현실에 타협하지 않았다.
대부분 여기자들이 취재하는 케네디 가의 세계나 그 후의 존슨 대통령이 주최하는 백악관 파티는 여기자들에게 대단한 기삿거리를 제공했다. 백악관 출입기자들은 취재한 내용을 전화로 각 데스크들에게 불러주고 나서 우리끼리 자주 모이는 니노 식당을 가곤 했다. 거기서 우리는 스파게티와 쇠고기 요리를 시켜놓고 토론을 하거나 그 날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잡담을 자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