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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지
컬러 필드 주희, 상수 옥토버 초록 소파 수치 없는 세계 회양목 사이로 천검 관광 방 안의 호랑이 패나 파경 누나와 보낸 여름 정생 해설 | 양경언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
朴文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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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아름다웠어, 처음엔.”
“무주지는 생겨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곳이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 오래 시도하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겠냐고. 그러면 안 되니까,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니까, 아무도 안 했던 거야.” 둘은 잠자코 있었다. 기정이 좁다란 강물을 한참 쳐다보다 말했다. “이런 말 우습지 않아? 상황 봐서. 두고 봐야지. 열어놓자…… 난 다른 가능성은 전부 닫고 싶었어. 선택할 필요가 없었어. 너만 좋았으니까. 너랑 도영이만 있으면 다 좋았으니까.” --- p.36 「무주지」중에서 컬러 필드의 링은 성적 페로몬에 따라 색을 드러냈다. 색은 날마다 조금씩 변했지만, 처음 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상황에 맞춰 가까이하고 싶은 색도 달랐다. 우위를 점하는 색은 없었다. 어떤 배색인지, 어떤 조화를 이루는지가 중요했다. 궁합 예상 확률을 점치는 글들이야 늘 돌아다녔지만, 무슨 색에도 어울리는 색이 있었다. 대체로 비슷한 계열의 색상끼리는 느긋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서로를 완강히 밀어내는 보색끼리는 격렬하고 전투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길에서 뜨겁게 싸우는 커플은 네온옐로우, 딥퍼플의 조합. 아침 산책로를 따라 걷는 커플은 라이트그레이, 빈티지그레이의 조합인 식이었다. --- p.47-48 「컬러 필드」중에서 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워지기 마련인 이곳의 법칙들이 아직 그에게는 부자연스럽고 부당하기만 했다. 계단을 한칸 한칸 올라설 때의 기쁨이 누군가에 의해 내팽개쳐졌고 아무도 잘못한 쪽을 뜯어말리지 않았다. 스스로 자리를 내주었지만, 자신이 원한 양보도 아니었다. --- p.84 「주희, 상수」중에서 “나는 뭘 그렇게 알고 싶었던 걸까.” “옥토버, 넌 다른 사람들이 발조차 떼기 두려워하는 일에 머리를 들이밀지. 그 투지와 강인함은 높게 평가받을 만해.” 하이마는 옥토버에게 무엇이 불안했는지 물었고 이런 대답을 들었다. “난 두렵기보다 슬펐어.” --- p.108-109 「옥토버」중에서 여진은 머릿속에 차량용 열선 시트 구조를 그렸다. 히팅컨트롤 원리는 익숙했다. 소파 가죽 밑에 열선 모듈을 삽입하고 등판 아래 스위치를 부착하면 끝이었다. 그러면 한서의 기분이 좋을 때 온기가, 기분이 나쁠 때 냉기가 흐를 것이다. 여진은 한서가 몸담을 곳도, 한서의 생각을 전환할 방식도 홀로 결정했다. 그날부터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까지 열달여간 아이는 언제나 여진 곁에, 천국이 아닌 그의 품에 있었다. --- p.123 「초록 소파」중에서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서 헤어지는 경우는 사실 드물지 않아? 아마 다른 사람에게 끌렸을 확률이 높겠지. 그럼 난 그렇게 됐다고 말할 거야.” 쉐임리스 시술은 무화과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 p.139 「수치 없는 세계」중에서 “너랑 나는 만화에 나오는 조연이야. 만화를 영화로 각색한 곳이 이 공간이고.” 나는 대꾸를 포기했다. 행사장 안전요원을 빨리 찾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믿든 안 믿든 들어. 난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챘어. 지금 여긴 한 노인의 뇌 안이야. 84세, 의식을 잃은 할머니. 가족들의 요청으로 이 사람에게 AI 코마 회복 프로그램을 돌리는 중이고.” --- p.168 「회양목 사이로」중에서 나는 황주임의 등을 향해 말했다. “쓰지 못할 것 같아요.” 그가 의자를 반쯤 돌렸다. “왜. 잘 구현됐잖아. 배경 그래픽 좀 봐봐. 아, 사운드가 별로야?” “떨고 있잖아요. 사람이 그냥 덜덜 떨고 있잖아요." --- p.200 「천검 관광」중에서 호랑이 한마리는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육과 관절이 강철 같아 보였다. 하지만 눈앞의 맹수는 난폭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 안에는 여러 힘이 공존했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고독하고 정다운 눈빛. 나를 바라보는 호랑이의 눈동자는 흔들리는 촛불처럼 황홀했다. --- p.234 「방 안의 호랑이」중에서 “비평가님 말씀대로 실감기기 시장이 커지면서 여기 관련한 부작용이 사회문제로 꾸준히 불거지고 있는데요.” “그렇죠. 아티스트의 인권과 사생활 침해 논란부터 기기에서 종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들까지. 이제 이런 말은 농담으로도 쓰기 힘들게 됐어요. 걔가 죽으면 너도 따라 죽겠다.” “요 몇달 업계 1위는 여전히 패나죠. 다른 기기들이 그 사람 옆에 있는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면 패나는 그 사람 자체가 되는 감각을 느끼게 합니다. 이게 패나의 성공 요인일까요?” “글쎄요. 저는 그 사람 옆에 있는 게 좋은데요.” “아, 비평가님은 패나 말고 다른 걸 쓰시는군요?” “그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 p.243-244 「패나」중에서 각자 애인이 있는 경과 후배는 월말정산을 하듯 매월 마지막 주 평일 중에 만남을 가졌다. 경은 휴대폰 화면 속 후배의 이름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여성스럽고 흔해 빠진 가짜 이름이 오늘따라 처연해 보였다. 곧 후배에게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식을 올릴 상대는 같이 만화를 그리는 진겸이었다. 어리숙하고 밋밋한 남자였지만 다감한 구석이 많았다. 경은 단정하고 낡은 단화 같은 진겸을 버릴 수 없었다. 그를 도려낸 자신의 삶은 이기와 고독, 그 자체일 것만 같았다. --- p.265 「파경」중에서 “너희 거야. 전부 너희 거야.” 나는 실눈을 뜨고 바람이 헤집어놓은 마을을 둘러봤다. 이게 내가 기다리던 풍경일까. 조, 콩, 팥, 율무, 귀리, 수수. 작물의 호칭과 형태처럼 이게 사람과 어울리는 풍경이었을까. 나는 도리질을 치다 멈췄다. 지금도 사람 말고 다른 걸 봐야 했다. --- p.331 「누나와 보낸 여름」중에서 ‘일년 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고, 삼년 뒤 혼자 있게 됩니다’. 정직하게 대면하기로 하자. 좋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미래다. 어쩌면 작은 흠결과 불운을 수긍하는 과정에서 삶이 나아질지 모른다. 평범한 시간은 고여 있는 시간이다. 분투하고 충돌해야 발전이 따른다. 전언은 나를 깨어 있게 할 것이다. 더 생생히. --- p.354 「정생」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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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상상력으로 복원해낸 이름들,
그 이름들에게 선물하는 아름답고 따스한 우주 『방 안의 호랑이』는 미미하고 희미하던 존재들에게 선명한 색을 입힌다. 표제작 「방 안의 호랑이」는 ‘작자 복원’ 프로그램을 개발해낸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스캐너로 그림을 읽어내면 홀로그램 빌더 위에 그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소설은 유명 화가 뒤에 가려져 어두운 곳에서 그림을 그리던 이의 모습을 복원해내며, 그가 지녔던 생생한 호랑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되찾아준다. 한편 「무주지」 속 ‘연음’과 ‘기정’은 무주지라는 일종의 지구의 대안공간에서 사는 클론이다. 무주지에서 클론은 ‘양육자’ 역할을 한다. 한두 사람이 아이를 키우는 데에서 무수히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판단한 인류는 자신들을 대신해 몇년간 돌아가며 아이를 양육할 클론을 생산했다. 클론은 양육뿐 아니라 각종 위험을 수반하는 일에도 투입이 되는데, 연음과 기정은 자신들이 돌보던 아이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탐사선에 탑승한다. 그들은 궤도를 벗어나 다른 행성에 불시착하게 되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긴다. 그러나 낯선 행성의 신비로운 힘을 마주한 그들은 또다른 존재로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다. 「누나와 보낸 여름」은 잇따른 재해로 다수가 빈곤해진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 세상에서 인간들은 약자와 동물을 혐오한다. 그들의 혐오는 특히 개들에게로 향해 개들을 순하게 만드는 기계장치를 만들기에 이른다. ‘나’는 내가 기르는 개 ‘누나’를 보호하기 위해 창고 안으로 숨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소용돌이가 몰아쳐오고, ‘나’와 ‘누나’ 그리고 개들만이 뜻하지 않게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소설은 늘 죽음과 가장 가깝던 약한 존재들을 희망 쪽으로 끌어당긴다. 「회양목 사이로」의 인물이 새로운 세계를 선택하는 방식은 조금 더 독특하다. 미디어아트 행사를 보러 간 ‘나’는 그곳에서 말을 걸어온 영화 스태프에게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사실 ‘나’와 그는 만화에 등장하는 조연이고,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 만화를 각색한 영화를 본 한 노인의 머릿속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동안의 삶에서 가졌던 의문들이 스쳐가고, ‘나’는 비로소 ‘진짜’ 삶을 찾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마치 스케치처럼 흐릿하게 지워진 삶을 살던 존재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누군가를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삶, 나보다 더 약한 존재를 돌보지만 나 역시도 ‘약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삶, 아주 거대한 체제에 의해 그저 기능하고 있는 것 같은 삶을 사는 지금 이곳의 현대인이라면, 박문영이 마련하는 자리와 각각의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색깔을 보며 마음이 두근거릴지도 모른다. 인물이 더 많은 색깔로 물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우리 역시 조금씩 밝은 빛깔로 채워질 수 있으리라. 박문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펼쳐내며, 독특함과 강렬함으로 가득한 박문영 월드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성적 페로몬을 반영한 색깔이 나타나는 링을 착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는 세상을 그린 「컬러 필드」, 월경과 통증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신약의 가격은 너무 비싸 꿈도 꾸지 못하는 가난한 연인의 이야기를 담은 「주희, 상수」, 사고로 뇌의 일부만 남은 아이의 의식을 소파로 이식해 그 소파로 미세하게나마 아이의 흔적을 느끼는 인물이 나오는 「초록 소파」, 수치심을 제거하는 시술이 가능해진 세상에서 시술의 정당성을 두고 사회와 개인이 겪는 갈등과 고민을 담아낸 「수치 없는 세계」, 기술로 과거의 한 장면을 복원해낼 수 있다고 해도 그 장면 속에서 계속 머물러야 하는 과거의 존재에 대한 존엄성에 대한 문제를 다룬 「천검 관광」,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동화되어 그들이 느끼는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실감기기’ 시장이 보편화된 세상을 그린 「패나」, 유전자 편집이 가능해진 시대, 결혼 직전 커플의 갈등을 담은 「파경」,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흐를지 예언해주는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끄는 상황에서, 우연한 기회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듣게 된 주인공이 사실은 예언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섬뜩함마저 느끼게 하는 「정생」, 그리고 독특한 소설적 실험으로 읽는 재미를 주는 「옥토버」까지. 『방 안의 호랑이』는 이 한권으로도 마치 놀이동산에서 여러 놀이기구를 즐기는 것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흠 많고 나약한 존재들마다 하나의 우주를 선물하는” 박문영의 “사랑”(추천사 박서련)은 이를 읽는 이에게도 가닿아 오래도록 따스하게 기억될 것이다. 작가의 말 언젠가 소설가는 어떤 사람이냐는 막막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이런 답을 했다. 이 직업군에는 아무리 전망 좋은 방에서도 얼룩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느냐고. 이 말을 뒤집으면 그 얼룩 너머 한뼘의 좋은 전망을 다시 발견하는 사람들이 소설을 쓴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희망과 절망이 짙어지거나 옅어지는 순간에 휘말리지 않고 싶다. (…) 늘 그럴 수는 없어도 혼잣말을 혼잣말로 두지 않는 지면이 생긴 이상, 세상에 독자가 있는 이상 나는 더 부드럽고 단단하게 지내야 한다. 자신이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거나 모르는 호랑이들에게 2024년 2월 박문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