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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광장(廣場)과 책-장(冊-場)-황정은의 ‘dd’ 연작과 2010년대의 아카이빙착한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최근 소설들의 ‘선한’ 물음에 답하며고유명사가 대명사가 되는 순간-김숨의 『L의 운동화』와 백남기음모론의 품격청년 서사의 모색과 한계‘지방-여성’의 장소는 어디인가구직-해직의 사이클(cycle)과 연작소설(short story cycle)-이기호의 『눈감지 마라』와 비정규직 장편소설의 불가능성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의 블로그남편과 사파리 파크와 ‘산 자들’재생산노동력의 상품화와 여성 연대의 곤경-장류진의 「도움의 손길」에 부치는 주석감염병의 사회적 형식과 돌봄의 탈가족주의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나나The Vampire Writes Back여성 재현의 ‘몫’을 묻다역사적 존재의 탈역사화, 그 ‘불공정’함에 대하여-‘램지어 사태’와 『파친코』 열풍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일리언 캠프(alien camp)의 지구인들슬픔의 ‘이곳’에서다른 세계로Unreleased Track두 번의 파묘와 남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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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세계가 자명한 미래에 잠식되지 않도록.”미래를 ‘도출’하는 것이 아닌, 미래에 ‘개입’하는 읽기·쓰기 책의 본격적 서두를 장식하는 「광장과 책-장」은 황정은의 ‘dd’ 연작을 경유하여, 한국사회의 2010년대를 아카이빙하는 글이자, 당신의 ‘광장’은 어디였는지 또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고 되묻게 하는 평문이다. 광장과 책장, 이는 문학과 사회가 교차하는 이지은 비평의 키-워드이자 본령이기도 한 터. 이 광장은 책(의 광)장으로 이어져 “책장이야말로 투쟁의 장소”가 되며, “책을 솎아내는 것은 툴을 바꾸는 일이고, 이 새로운 툴로써 지의 네트워크를 재구축하는 것이 바로 혁명”(33쪽)이라는 설득력 있는 통찰로까지 뻗어나간다.이지은의 문장을 읽다 감탄하고 또 안심하는 순간이 있다면, ‘사각의 탐문’이라 명명할 법한 인간과 텍스트의 그림자를 차분하게 응시하는 면모를 발견할 때일 것이다. 「착한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는 이기호와 윤이형의 소설 속 “착한 사람들이 시간에 마모되고 (…) 사건에 피로해질수록 그 선의는 조금씩 의심스러워”(36쪽)지는 순간들을 포착해, 선한 마음이 우리를 속이는 메커니즘을 조목조목 파헤친다. 선한 마음이 “개인적 죄책감으로 소모되고 말 때, 죄책감을 공동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전환하지 못할 때”, 그 부채감을 그저 ‘기억’하기만 할 때, “누군가는 이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할 것”(50쪽)이라는 경고는 서늘하기까지 하다. “우리의 세계가 자명한 미래에 잠식되지 않도록”(51쪽) 우리는 적극적으로 연루되고 관성과 타성에 저항해야 한다.착한 사람들의 선의는 공동의 문제를 봉합해버리면서도, 봉합되어버렸다는 사실마저 감추는 기능을 한다.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우리의 선의는 어떤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선량함’은 실은 우리의 불편함을 제거하기 위한 기만이다. 유가족이 광화문광장 찬 바닥에서 시위를 하고 있으니, 밥을 굶으며 절규하고 있으니, 우리는 “더운 국을 먹을 때나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때”마다 불편한 것이다. 이제 최초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일까?” 그것은 애꿎은 사람이 우리를 ‘착한 사람’에 머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_「착한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40쪽) 저자가 진단하는 청년/지방 담론 역시 주목을 요한다. 장강명과 장류진의 소설 속, 힘겹게 응전하는 청년들이 결국 시스템에 복무하거나 재생산하는 오작동을 읽어내면서, ‘실패의 정확한 파악’을 강조한다.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고, 청년 탈출기는 실패하기 쉽다. 그러나 그 실패는 한계 지점까지 나아간 성실한 실패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실패한 그 자리에서 누군가 다음의 걸음을 꿈꿀 수 있다”(「청년 서사의 모색과 한계」, 79~80쪽)는 문장은 몇 번이고 되새겨봄 직하다. 이와 궤를 같이하여, 거짓된 낙관 없이 더 많은 삶을 발견하길 요청하는 「‘지방-여성’의 장소는 어디인가」 역시 일독을 권한다.역사와 인물이 교차하는 김숨, 조해진, 최은영의 소설은 저자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 듯하다. 「여성 재현의 ‘몫’을 묻다」는 조선인 ‘위안부’의 삶을 다룬 김숨의 저작과 조해진 소설 속 인물들의 자기 재현을 분석하며 ‘글쓰기의 몫이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과 대면한다. 그리고 최은영의 『몫』을 통해, 그 질문은 “하나의 답안으로 막음 될 수 없고, 글을 쓰는 내내 안고 가야 할 물음”임을, “질문과 답을 반복하는 한에서 글쓰기는 실천적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음을, 그러한 읽기와 쓰기의 반복 운동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로서 함께 상상할 수 있고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206쪽)음을 역설한다. 소설과 차트가 똑같이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다고 해서 그 서사에 내재하는 욕망마저 동일하지 않다. 차트는 항상 과거의 궤적만을 그린다. 차트를 읽고 쓰는 일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도출’하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과거는 미래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데이터다. (…) 소설이 남기는 메시지가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그것은 미래를 ‘도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꿈꾸기 위한 것이다. (…) 비극으로 끝났다고 해서, 더 많은 비극을 예견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소설이 비극의 미래를 도출하려는 것이라 읽지 않는다. 소설은 차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을 읽는 일 또한 소설의 꿈을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소설을 읽는 일은 미래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개입’하는 일이다. _「구직-해직의 사이클과 연작소설」(110쪽)끝으로 ‘Unreleased Track’이라는 명칭으로 미발표 원고 「두 번의 파묘와 남은 것들」을 실었다. ‘파묘’ 작업과 ‘비평’ 작업을 유비하며 전개되는 이 글은, 영화 [파묘]와 황정은의 단편소설 「파묘」를 통해 2010년대 비평의 의의와 한계를 되짚어보고, 문학의 윤리의 향방에 대해 묵직한 직구를 던진다. ‘험한 것’들이 속출했던 2010년대를 지나 “한국문학은 사법적?도덕적 심급 이상의 윤리를 탐구할 준비가 되었는가”(265쪽) 묻는 저자의 질문은, 앞으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질 비평세계를 예고/약속하는 것이자, 도래할 한국문학과 그 독자에 요청하는 제안이자 부탁으로도 읽힌다. 이지은의 『소셜 클럽』에 초대장이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지 않을까? “함께 갔으면 좋겠다. 아니 함께라야 갈 수 있다. 다른 세계로.”(「다른 세계로」, 253쪽)오이디푸스가 끝끝내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보다 그 진실을 향한 돌진이 ‘충동’이었다는 점을 강조할 때, 윤리학(ethics)은 진실을 향한 인간의 충동이라는 행동학(ethologie)으로 다루어질 수 있으며, 윤리가 행동학으로 사유될 때 그것은 인간 존재론적 심급으로 육박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문학(비평)이 새롭게 발견해야 할 오이디푸스란 진실을 향한 충동을 가진 인간일 것이다. _「두 번의 파묘와 남은 것들」(264쪽)■ 작가의 말2010년대에 평론 활동을 시작한 나는 우리가 처한 세계의 조건과 그 속에서 부침을 겪는 삶에 관해 소설을 통해 말을 건넬 수 있는 문학평론집을 기획해보는 일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국문학 평론장의 현재가 궁금하여 펼쳐 드는 책이라기보다, 삶이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 이 모순적인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하여 소설책을 펼쳐 들 때, 그때 옆에서 맞장구도 쳐주고 싫은 소리도 할 수 있는 책이었으면 했다. 거꾸로 이럴 땐 이런 소설을 읽어보라고 참견하는 오지랖을 부리고도 싶었다. 문학을 잘 몰라도, 평론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도, 삶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할 수 있는 문학평론집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2024년 여름의 초입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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